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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25 집쥔 뜬금없이 챈슬러스빌 전투
엔하에서 놀다가 충동적으로 끄적여본 글입니다.
잭슨의 대규모 우회기동이 늘 감탄하곤 하던 포인트였는데,
다시보니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니 쫌 약하군요.

1863년 5월 1일~6일 즈음에 챈슬러스빌 지역에서 13만3868명의 북군(포토맥군)과 6만892명의 남군(연방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이 근처는 1862년 프레드릭스버그 개울가에서 남군의 돌담에 돌진한 북군이 도륙당한 프레드릭스버그 전투가, 이후 북군 대장이 율리시스 그랜트로 교체된 다음 리를 추격하다가 부하가 하도 많이 죽어 그랜트를 밤중에 울게만든 스팟실배니아 전투가 1864년 벌어진 나름 죽음의 땅이다.

새 지휘관 후커는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이후 망가진 북군을 북부 자원의 힘으로 추스리고,

위와 같이 다수의 병력으로 [[로버트 리]]의 남군을 포위해 박살내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전투 전 사열하러 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의기양양하게, '언제' 남부의 수도를 점령하느냐는 문제만 남았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에 링컨 왈, "그런데... 나는 암탉이 가장 똘똘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놈은 알을 낳기 전에는 울지 않으나 말이오." 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북군은 계획대로 기동하여, 세지윅의 4만 군대는 4월 29일 밤에, 후커의 7만 군대는 4월 30일에 남군의 저항이 없는 가운데 강을 건너, 양쪽에서 남군을 포위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였다.

첫 총알교환은 5월 1일 11시 시작되었는데, 교전 시작 후, 후커는 리의 명성에 쫄았는지, 현재 위치를 포기하고 숲으로 들어가 방어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려버렸다!

당시 2군단장 카우치 장군은 후일, "후커는, '그동안 우리는 성공적으로 기동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숲 속에 들어가 방어전투를 통해 그 동안의 성공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실성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라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리는 후커의 꼬락서니를 보고 상대의 생각을 간파하여, 세지윅 쪽 4만 병력앞에 얼리의 1만1천명만 남겨 견제하도록 하고, 6월 2일, 스톤월 잭슨에게 2만8천 병력으로, 북군의 우측면으로 19km를 우회기동하여 측후방을 기습하도록 하면서 그 동안 1만3천으로 후커의 7만 북군을 견제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였다.

잭슨의 기동은 성공하였으나, 17시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북군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세지윅 휘하의 레이놀즈 군 2만명이 옮겨와서, 북군은 거의 집중된 2배의 병력으로 남군의 두 부대를 박살낼 기회를 얻었지만, 전투중에 남군의 포탄에 사령부가 피격을 당해 부상을 입은 후커는, 지휘권도 이양하지도 않고, 7만 6천명의 병력을 가지고 가만히 방어만 하고 앉아있으면서, 동쪽 2만의 세지윅 군에게 진격할 것을 명하였다.

6월 3일 세지윅 군이 프레데릭스버그 돌담을 돌파하고 얼리 군을 밀어내며 전진하자, 리는 맥그로우 사단을 급파하여 세지윅군의 전진을 지연시켰다.

후커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확신한 리는 6월 4일 앤더슨 사단을 추가로 세지윅 쪽으로 보냈고, 얼리 사단을 포함한 세 사단에 포위된 데다가 후커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난 세지윅은 5월 5일 해뜨기 전 강을 건너 철수하였고,

이를 본 후커는 일부 부하군단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월 5일 밤동안 철수하였다.

이후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후커는 잘리고 후임으로 군단장이던 미드가 새 북군 사령관이 되었다.

리는 절반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두 배의 상대방을 포위하는 화려한 기동과 놀라운 공세능력을 보여주었다. 2일 잭슨의 우회기동은 남북전쟁 최고의 전술기동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사상자는 북군 1만7197(1606명 사망), 남군 1만3303(1665명 사망)으로, 병력이 모자란 남군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큰 피해는, 2일의 기습전 와중에, 스톤월 잭슨 장군이 아군의 오발에 부상당하여, 10일 사망한 것이었다.

잭슨은 과묵한 성격에 리의 명령을 잘 알아듣고 저돌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남군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장군으로,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그가 죽지 않고 게티스버그 전투까지 가서, 롱스트리트 위치에 있었더라면, 7월 3일 전투에서 북동쪽에서 이월의 포성이 들리지마자 주저없이 피켓 사단을 돌진시켰을 것이고, 그렇게만 되었더라만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군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게 만약을 달고 나오곤 하는 떡밥이다.

전쟁터는 1927년 미국의회의 허가를 얻어 프레드릭스버그와 스팟실배니아 국립군사공원으로 조성되었다.

2012/02/25 23:54 2012/02/25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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