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세, wikipedia를 이런 식으로 글바꿈한 글 정도밖에는 적어볼 여력이 없습니다.
TOEIC 860점을 받아야 하는데 -200점 수준이라서 큰일입니다.
그나마 한 달에 한 개 페이스로 진행하고 싶기는 한데... 될려나 모르겠습니다.

함정

원문 출처입니다

우왓, 글바꿔놓고 팽개쳐놓았더니 그새 내용이 엄청나게 늘었다(역쉬 wikipedia).
나중에 update해야 되것습니-_-다. (언제일지 며느리도 모르지만)

SMS Von der Tann 은 독일 제국 해군의 첫 순양전함이었으며, 독일의 첫 터빈 방식 추진 전투함이었다. 함부르크의 블룸&보스에서 지어졌으며, 정찰 함대의 일꾼이었다.

사양
함종: Unique battlecruiser
이름: SMS Von der Tann
출처: Ludwig von der Tann
주문: 1907년 9월 26일
제작사: Blohm and Voss, Hamburg
시작: 1908년 3월 21일
진수: 1909년 3월 20일
취역: 1910년 9월 1일
최후: 1919년 6월 21일 Scapa Flow 에서 자침

기준배수량: 19,370 t (21,350 short tons)
만재배수량: 21,300 t (23,500 short tons)
길이: 171.7 m (563 ft)
폭: 26.6 m (87 ft)
홀수: 8.91 m (29.2 ft) 9.17 m (30.1 ft)
출력: 4 screws, Parsons steam turbines, 43,600 shp (39 MW)
속력: 설계 24.8 knots (46 km/h), 최대 27.75 knots (51 km/h)
항속거리: 4,400 nautical miles (8,100 km) at 14 knots (30 km/h)
승무원: 장교 41명, 882명
무장:
- 8 × 28 cm (11 in) SK L/45 guns (4 × 2)
- 10 × 15 cm (5.9 in) guns
- 16 × 8.8 cm (3.5 in) guns
- 4 × 45 cm (18 in) torpedo tubes
장갑:
- 측면 80 mm (3.1 in) ~ 250 mm (9.8 in)
- 포탑 앞 230 mm (9.1 in)
- 주탑 250 mm (9.8 in)
- 어뢰 벌지 25 mm (0.98 in)

함선

개발

전투함의 설계는 1906년 8월에, "순양함 F"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305mm 와 343mm 구경을 포함한, 몇 가지 전거포함의 방안이 제안되었다. 재정 문제로 덜 비싼 방식이 채택되었다. 나사우(Nassau)급과 같은 280mm 2연장 주포탑으로 결정되었다.

새 전투함에게 주어진 역할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티르피츠(Tirpitz) 제독은 영국의 새 순양전함과 같이, 더 큰 주포, 가벼운 장갑, 빠른 속도를 요구하였으며, 전열의 최일선에서 운용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해군 본부에 살다시피 한 황제는 초기 접촉 후에 전열에 참가하도록 하는 의견 쪽이었고, 그런 이유로 장갑이 더 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1907년 6월 22일, 황제는, 1870년의 대프랑스전쟁에서 싸운 바바리아 장군의 이름으로 명명된, 순양함F의 건조를 승인하였다.

설계

1) 무장

8문의 28cm 주포를 2연장 포탑 4개에 탑재하고 있으며, 포탑은 앞에 하나, 뒤에 하나, 각 측면에 하나씩 위치해 있었다. 모두 660발의 포탄이 165발씩 나뉘어져 4군데의 포탑방에 탑재되었다.

영국제와는 다르게, 10문의 15cm 포도 포상의 축에 탑재하였으며 각각 150발의 HE와 AP탄이 탑재되었다. 또한 16문의 88mm 포도 탑재하고 있었는데, 어뢰정과 구축함 방어용이었다. 포상의 축에 위에 위치해 있었으며 모두 3200발(문당 200발)의 포탄이 탑재되었다.

당시 관습적으로, 4발의 발사관을 배의 함수, 함미, 양현에 가지고 있었으며, 11발의 어뢰가 탑재되었다.

2) 장갑

전열에서 싸울 계획이었기 때문에, 함의 장갑은 나중에 유틀란트(Jutland)에서 맞짱을 뜨게 되는 영국의 HMS 지치지않는(Indefatigable)급 대비 10%정도의 더 많은 양이 사용되었다.
장갑은 크룹사 제 합금니켈강으로 만들어졌다. 앞부분은 80~120mm, 핵심부는 250mm, 후면은 100mm, 앞부분 사령탑은 250mm, 뒷부분 사령탑은 200mm, 주포탑 전면은 230mm, 측면은 180mm, 지붕은 90mm, 갑판은 25mm, 경사갑판은 50mm 두께로 만들어졌다.

직전에 건조된 장갑순양함 블뤼헤르(Blucher)처럼, 함도 선체에서 4m 떨어져 있는 25mm 두께의 대 어뢰용 방뢰격벽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소에는 석탄저장고로 사용되었다.

3) 속력

이후에 건조된 동시대의 순양전함들처럼, 함도 최소 24knot 이상의 속력을 가졌는데, 어디에서인가에서 독일로 돌아오는 동안 평균 27knots, 최대 28knot 이상의 속력을 내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속력은 함이 활동하던 시대 내내 건조되었던 노급전함들의 속력과는 급이 다른 수준이었다.

내역

함은 건조 후 몇 번의 장거리 항해를 뛰었다.
1911년 초에는 리오 데 자네이로(Rio de Janeiro), 푸에르토 밀리타(Puerto Militar), 바히아 블랑코(Bahia Blanco)를 방문하고 5월 6일 킬(Kiel)로 귀환하였다.
1911년 5월 8일, 정찰함대의 일원이 되었다.
1911년 6월 함은 조지5세의 즉위식 참석을 위하여 스피트헤드(Spithead)에 다녀왔다.

1차 세계대전 개전시, 함은 정찰부대, Konteradmiral Tapken의 제3함대의 기함이었다.

1914년 함은 헬골란트 해역(Helgoland Bight)에서 벌어진 전투 후, 영국 순양전함을 찾기 위한, 실패한 정찰에 참여하였다.
1914년 11월 2~3일에 걸쳐 벌어진 야머스(Yarmouth)와 12월 15~16일에 걸쳐 벌어진 스카브로(Scarborough)의 습격에 참여하였다.

1915년 배는 북해와 발틱해에서 작전에 참여하였다.
1915년 8월 10일 함은 발틱해 동쪽에 있던 우토(Uto)의 요새섬에 포격을 하였다. 함은 장갑순양함 바얀(Bayan)과 5척의 러시아 구축함과 접촉하였다.

1916년 초 함은 야머스(Yarmouth)와 로위스토프트(Lowestoft)의 포격에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31일 ~ 6월 1일간에 있었던 유틀란트 해전에서는 함은 HMS 인디패티거블에게 5발의 주포탄을 먹였는데, 그 중의 한 발이 상대방의 탄약고를 유폭시켜 폭침하게 만들었다. 반대급부로 함은 HMS 바함(Barham)에게 15인치 주포탄 1발, HMS 타이거(Tiger)에게 13.4인치 주포탄 2발, HMS 리벤지(Revenge)에게 15인치 주포탄 1발을 얻어맞았다. 전투 행로 동안 4군데의 주포탑 모두가 상대방 포격으로 인하여 박살이 나던가 혹은 기계적인 문제로 시달렸으며 2군데의 주포탑은 전투종료 이전에 회복이 가능하였다. 인원 피해는 11명의 사망자와 35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전투 후 함은 건선거에서 수리를 받은 후 북해에서 있었던 몇 번의 실패한 습격에 참여하였다.

1918년 11월 24일 대해함대의 남은 일원으로서 항복하였고, 스카파 플로(Scafa Flow)로 끌려갔다. 1919년 6월 21일 자침하였고, 몇 가지 어려움 끝에 1930년 건져져서 로시드(Rosyth)에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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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지 HMS 인디패티거블 급 대비 부지런히 일하다 간 것 같다는 일꾼 이미지가 들어
막연히 좋게 생각되는 전투함입니다.

인물

Ludwig Samson Arthur Freiherr von und zu der Tann-Rathsamhausen (June 18, 1815 - April 26, 1881) 는 바바리아의 장군이었다.

인물

어렸을때

워털루 전투가 있던 날,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으며, 바바리아, 알사스와 라인지역에 뿌리를 둔, 본 데르 탄의 오래된 가족의 후예였고, 바바리아 임금의 허가 아래 1868년 그의 어머니의 이름(그녀는 알사스의 귀족 Freiherr von Rathsamhausen 의 딸이었다)을 아버지의 이름에 붙이게 되었다. 바바리아의 2번째 임금 루드비히 1세는 어렸을 때부터 그의 후원자였으며, 그 이름 또한 받았으며, 웰링턴 공작의 영예로운 이름인 Arthur가 덧붙여졌다. (열라길다-_-)

어렸을 때부터 주의 깊은 교육을 받고 1827년 바바리아 법정에서 수행원이 되는 것으로, 훌륭한 미래가 예약되게 되었다. 1833년 포병대에 입대하였고, 몇 년 후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 Radetzky 휘하에서 이태리에서 오스트리아 군의 기동작전에 참가하였고, 모험가의 정신으로 튀니지아 개척자들을 상대로 한 프랑스 군의 알제리에서의 탐험작전에도 참전하였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돌아온 후, 후일 막시밀리안 왕이 되는 바바리아 왕자 막시밀리안 조셉과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1848년 소령으로 승진하였고, 덴마크와 독일연합 사이에 벌어진 슐레스비히의 첫 전쟁에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경기병대의 대장으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첫 작전에서 그는 프러시아 왕으로부터 Red Eagle 훈장을 수여받았고, 군주는 그에게 막스 조셉의 군사 훈장을 수여받았고, 중령으로 승진하였다. 1849년에는 바바리아 대표단의 참모장으로서 전선에서 활동하였고 티볼리의 선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 이후 헝가리 전쟁에서 하이나우의 사령부를 방문하였고, 이후 Idstedt 작전에서 윌리센스의 참모장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활동하였다.

독오전쟁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 위협이 왔을 때, 그는 바바리아로 소환되었다. 이 위기는 '올무츠의 항복'으로 끝났고, 그는 1866년까지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1851년에는 대령으로, 1855년에는 소장으로, 1861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기간의 초반 그는 왕의 보좌관이지 충실한 동료였다. 1866년의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전쟁에서 그는 남부 독일 분견대의 지휘관인 바바리아의 왕자 칼 테오도르의 참모장이었다. 거의 불가능한 결과를 요구하는 작전계획은 그에게 과도한 공격을 가하게 하는 압박이 되었지만, 어차피 준비도 부실하고 효율도 부족한 군대와, 이 전쟁에 대하여 극도로 사기가 낮았던 일부 군인들을 가지고서야, 남부 독일군의 실패는 해 보기도 전에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독불전쟁

이후에도 임금의 호의를 계속 받았고 1869년에는 기병대장으로 승진하였으나, 1866년의 실패의 쓰디씀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머리색이 바래지는 42살이 되었고, 건강도 안 좋아졌다. 1869년 그는 바바리아 1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군을 이끌고 1870~1871년에 벌어진 독프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독일군에서 으뜸 중 하나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의 용맹은 워쓰와 세당 전투에서 돋보였다. 가을에 루아르의 독립된 사령관으로 전속되어, d'Aurelle de Paladines 에 대항하는 작전을 이끌어갔다. 처음에는 기록될만한 성공을 거두어, 오를레앙의 항복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이후 Coulmiers 마을에서 숫적으로 많은 프랑스군과 교전 끝에 밀려났다. 이후 증원을 받고, Mecklenburg-Schwerin 대공의 아래에서 오를레앙 근처에서 몇 건의 성공적인 교전을 벌였다.

전쟁이후

바바리아 1군의 사령관으로 재임명되었고, 1881년 메라노에서 죽을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는 바바리아 군 대십자 훈장을 받았고, 프러시아 임금에게서 1급 철십자 훈장과 블루맥스 훈장을 받았다. 1878년 독일 황제는 프러시아 보병 연대의 명예 대령 자리와, 별장을 내리고, 스트라스부르그의 새 요새에 그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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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말해서 좋은 집 자식으로 태어나 잘 살면서 천수를 누린 사람입니다.

2009/01/02 18:13 2009/01/0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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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오스트프리스란드 호의 마지막과 관련된 폭격 이야기입니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이런저런 구멍이 많았지만, 여튼 수십 년이 지난 후에는,
대함거포시대를 종식시킨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달까요.
출처는 영문 wikipedia에서 빌리 미첼(Billy Mitchell) 글 중 일부랍니다.

어제쯤 올리려 했다가...
에구구... 대체 몸이 왜이리 쑤시는 건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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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2 09:52 2008/05/0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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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제국해군 헬골란트급 전함의 2번함인 동프리슬란드호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모습

평범합니다마는, 마지막의 예의 그 사건, 때문에 적어붙여보았습니다.
출처는 (언제나처럼) 위키피디아 영문판을 거지반 고대로.

일단 접어놓았는데 내용 펼치기

등급 Helgoland class
기준배수량 22,808 tonnes
만재배수량 24,700 tonnes
길이 167.20 m (548.6 ft)
28.50 m (94 ft)
홀수 8.94 m (29.3 ft)
추진 3축, 3기관 수직 3중확장 증기엔진으로 22,000 shp
속력 20.8 knots (38.5 km/h)
항속거리 10 knots (19 km/h) 로 달릴때 5,500 바다마일 (10,190 km)
승무원 장교 42명, 모두 1027명
무장 12 × 12 in (305 mm) 주포,
14 × 150 mm (5.9 in) 포, 14 × 88 mm (3.5 in) 포,
6 × 500 mm (19.7 in) 어뢰발사관


이름은 독일의 네델란드와 북해와 연한 동프리지아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지도일세

1908년 10월 19일 빌헬름스하펜의 제국 공창에서 건조가 시작되었다. 1909년 9월 30일 진수되었고, 1911년 8월 1일 독일 제국 해군 함정으로 취역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개전 때, 함은 해군 중장 슈미트 제독 예하의 제1전투함대의 기함이었다.
이후 해군 소장 히퍼 제독의 지휘 아래 1914년 12월 16일 스카버러, 하틀플, 휘트비 지역의 기습 작전에 참여하였다.

1916년에는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하였는데, 전투에서 11발의 12인치 주포탄을 발사하였다.
영국 함대와의 전투에서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귀항 도중 6월 1일 수뢰에 접촉하여 1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하였다.
귀환 후 수리는 빌헬름스하펜에서 1916년 7월 26일 마무리되었다.

종전 후, 4척의 헬골란드급 전함은 모두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로시드 항에서 1920년 4월 7일, "Ship H"로서 미국의 손에 넘어갔고, 해군 대령 헬윅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수리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뉴욕으로 항해하여, 1920년 9월 20일 퇴역한 후, 뉴욕 해군 공창의 건선거에서 전체적인 검사를 받고 1921년 1월 4일 바다로 돌아왔다.

해군력에 대한 공군력의 힘을 보여주려는 빌리 미첼 준장의 실험을 위하여, USS 알라바마를 포함한 다른 퇴역 미군 및 독일 함정들과 함께 시연 및 실험의 목표가 되었다.

첫 날에는 전투기에서 투하된 작은 폭탄의 공습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약간의 침수가 발생하였고, 밤중에 해군 기술자들은 수평유지를 위하여 약간의 역침수를 시켰고, 홀수는 낮아졌다.

둘째 날에는 큰 폭탄(1천파운드)의 공습이 우선 있었다.

공습

이후, 비록 실험이 주의깊게 조절되고 관측되도록 협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첼 준장은 계획을 위반하여 시연을 진행하였고, 결국 버지니아의 랭글리 필드로부터 출격한 핸들리 페이지 0/400s 폭격기에서 떨군 아주 큰 폭탄(2천파운드)의 공습으로 확고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지근탄의 수중폭발로 인한 충격파로 인하여 일어난 피해로 함의 침수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1921년 7월 21일 버지니아 곶으로부터 97km 떨어진 장소에서 가라앉았다.

침몰

사실 피해복구반이 함내에 대기하여 제때 조치를 취했더라면, 침몰할 정도의 피해는 아니었다.
여튼 이 시연으로 인하여 나름 한 시대의 이정표가 된 배우로서, 동급함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 되어버렸달까. 요.
2008/04/30 11:55 2008/04/3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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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wikipedia 영문판입니다.
그런 이유로 wikipedia 한글판에도 올려보려고 합니다.
검색해보니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기는 한데, 그래도 (출석체크용으로) 그냥 올려봅니다.
그러려니 하시기 바랍니-_-다. (아님말고)

건조 : 4 May 1940
진수 : 5 October 1944
취역 : 19 November 1944
최후 : Sunk on 29 November 1944 by the submarine Archer-Fish

사양(?)

만재배수량 : 71,890 tons
기준배수량 : 68,059 tons
길이 : 266.1 m (872.9 ft )
수선너비 : 36.9 m
갑판너비 : 40 m
홀수 : 10.8 m
추진 : 12 Kanpon 기름보일러, 증기터빈, 4축, 153,000 hp (114 MW)
속력 : 27 knots (51 km/h)
항해범위 : 27 knots 일때 10,000 nm (50 km/h 일때 18,400 km)
무장 : 127 mm (5' inch) 40구경 16문, 120 mm (4.7 inch) 45구경 12문, 25 mm 60구경 대공포 120문, 28총신 127 mm (5 inch) 대공로켓발사기 20문 등
장갑 : 127 mm (5 inch) 측면, 100 mm (4 inch) 갑판, 79 mm (3.1 inch) 비행갑판 등
탑승인원 : 2,515명
탑재항공기 : 47대 (120대 이상도 가능)

약력(?)

길어서 접었는데 펼치기

시나노는 처음에는 야마토급 전함의 3번함으로 계획되어, 1940년 6월에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건조가 시작되었다가, 인력과 자원문제로 1941년 여름에 건조대기상태가 되었다가,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측에게의)끔찍한 결과 뒤에, 항모로서의 개장이 결정되었다.

개장시 초점은 장갑에 맞춰졌는데, 예를들어, 갑판장갑은 454kg 폭탄에도 견딜 수 있도록 1만7700톤의 강철이 투입되었다. 만재배수량은 7만2000톤이고, 이는 1961년 USS Enterprize가 건조될 때까지 가장 큰 항공모함이었다. 시나노는 지원항모로서 설계되었는데, 대규모의 수리공방과 연료저장고를 갖추어, 다른 항공모함의 전투를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그리하여 자체적으로에 배당된 항공기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배당되지 않은 여분의 항공기를 타 항공모함의 손실에 대비하여 가지고 있는 구조였다. 최고속도는 27knots로, 당시 어떤 미국 잠수함의 속도보다도 빨랐다.

배는 매우 엄중한 보안속에 건조되었다. 높은 담장이 3면으로 쳐져 있었고, 노동자들은 아예 갇혀 살다시피하였다. 배의 이름을 말하는 것 조차도 사형당할 수도 있는 중대한 보안위반이었다. 그 결과, 배는 20세기에 만들어진 대형 전투함 중에서 유일하게 건조중에 촬영한 공식적인 사진이 없다.

이런 조건아래서, 1944년 10월 5일 진수되었고, 1944년 10월 8일 공식적으로 이름이 부여되었으며, 1944년 11월 11일 시험항해를 가졌고, 1944년 11월 19일에 취역하였다.

1944년 11월 28일 배는 추가장비설치를 위하여 3척의 구축함의 호위하에 구레 항으로 출발하였다. 도시노 아베 제독이 2176명의 사관과 선원들을 지휘하였고, 추가로 300명의 일꾼과 40명의 민간고용인이 타고 있었다. 아베 제독은 공중지원이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야간이동을 계획하였는데, 레이테 해전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함의 수리와 선원들을 휴식이 필요하였던 구축함 함장들과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베는 항공지원 없는 주간이동은 재난일 뿐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해군본부는 시나노에 대한 기대가 커, 기울어져가는 전세를 되돌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기대의 반영으로, 아베는 구레항에 도착하였을 때 해군소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이 배가 출발하여야 할 때가 다 되었지만, 이 배는 아직 방수격벽의 검사도 완벽하지 않았다. 게다가 700명 정도는 실전경험이 있기는 했으나, 승조원들의 피해대응능력은 떨어졌다. 게다가 12기의 보일러 중 4기는 동작하지 않았다. 아베는 이런 것들이 개선될 때까지 출항을 연기하기를 바랐으나, 미군의 본토공습을 두려워하던 지도부는 이를 반려하였다. 비록 8개의 보일러만 돌아가지만, 20knots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고, 아베는 이 정도 속력이면 혼슈 남단에서 사냥감을 찾아 방황하는 미군 잠수함들은 떨쳐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시나노는 바다에서 Joseph F. Enright 함장의 USS Archer-Fish 잠수함에 발견되기 전까지 몇 시간동안만 바다에 떠 있었다. 당연히 일본측이 훨씬 우월한 화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USS Archer Fish는 호위 구축함들을 흩어지게 하기 위한 떡밥이고, 그 뒤에 여러 척의 잠수함이 늑대떼(wolf pack) 작전을 위해 숨어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그는 휘하 구축함 중의 한 척이 잠수함의 공격을 위해 치고 나아가자 도로 불러들였다. 원래 아베는, 배를 구레 항에 안전하게 가져다 놓는 것이 작전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수비적인 편이었는데, 시나노의 주 기관축 중의 하나가 과열로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함의 최대 속도가 18knots - 대부분의 미국 잠수함의 속도와 같은 - 로 떨어지게 되자, 더욱 더 수비적이 되었다. 늑대떼 작전에 낚이지 않기 위해, 아베는 지그재그 침로로 함을 전진시켰고, 이러다 그만 배는 잠수함에게 우현을 노출시키게 되었다.

1944년 11월 29일 03시 17분, Archer Fish는 6발의 어뢰를 발사했는데, 그 중 4발의 얕은 침로를 가진 어뢰가 대 어뢰용 bulge와 수선 사이를 뚫고 들어가 배의 앞부분에 격돌하였다. 배는 가라앉기 시작하였고, 06시 경에 동력을 잃고, 11시 경에는 부력을 잃고 침몰하였다. 아베 함장과 그의 두 항해사를 포함하여 대략 1400에서 2500명 정도가 같이 배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쌀국 해군성은 시나노가 출항했을 때에는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고, 3번째 야마토급 전함의 존재 정도만 추정하는 정도였다. Archer Fish는 처음에는 순양함을 격침시킨 것으로 인정받다가, 함장의 격침시킨 배의 모양 sketch로부터 2만8000t급 항공모함을 격침한 것으로 전과를 인정받았다. 전후 양측의 기록을 대조해 본 다음에야 쌀국 사람들은 Archer Fish가 7만2000t급 월척을 잡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시나노는 잠수함에게 낚인 역사상 가장 큰 전투함으로 남아있다.

전후 일본에 대한 쌀나라의 해군 기술 임무 분석가들은, 시나노는 심각한 설계상 문제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무엇보다도, 선체의 대 포탄용 장갑과 수선 아래의 대 어뢰용 벌지 사이의 연결이 형편없이 설계되었다는 점이었다. Archer Fish의 어뢰는 모두 이 연결부위를 따라서 폭발하였다. 게다가, 어뢰의 폭발력은 기관실 중 하나의 H형 들보를 밀어내었는데, 밀려난 들보는 두 기관실 사이의 구멍을 내는 초대형 망치가 되어버렸다. 덧붙여서, 방수격벽의 문제도 한 건 하였는데,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침수가 너무 급격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도무지 대응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른 증언에 의하면 접합부의 리벳이 터져버려 침수가 급격히 진행되었다고 한다.

명명(Nomenclature)

다른 일본 전함들과 마찬가지로 시나노는 옛 일본 지명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시나노 지역은 현재 나가노현에 위치해 있었다. 아카기와 카가와 마찬가지로 시나노도 처음 전함에서 항모로 용도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References(참조) 는 wikipedia 영문판을 고대로 번역.

2008/03/04 12:10 2008/03/0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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