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오스트프리스란드 호의 마지막과 관련된 폭격 이야기입니다.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이런저런 구멍이 많았지만, 여튼 수십 년이 지난 후에는, 대함거포시대를 종식시킨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달까요. 출처는 영문 wikipedia에서 빌리 미첼(Billy Mitchell) 글 중 일부랍니다. 어제쯤 올리려 했다가... 에구구... 대체 몸이 왜이리 쑤시는 건지... (-_-) 펼치기 접기 1921년 2월, 공중 폭격에 의한 함선의 격침이라는 그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미첼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육군장관 뉴튼 베이커와 해군장관 요셉 다니엘스는, 계획B로 알려진, 예비 혹은 포획된 배를 이용하여 여름에 실험하도록 하는, 육해군 합동 실험에 동의하였다.
1921년 시카고 트리뷴의 카툰은 노급전함들의 건조비는 항공력 구축에 사용될 귀중한 방어 달러를 소비하는 것이라는 미첼의 언급을 실었다.
미첼은 해안 방어에, 해안포와 해군 전함들의 조합보다 항공력의 사용이 더 저렴하다는 확신을 시키기 위하여 노력중이었다.
노급전함 한 척을 만들 비용이면 천 대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고, 천 대의 비행기는 노급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완전무장상태"의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는 미첼의 주장은 해군을 격노하게 하였으나, 미첼은 노획한 독일 전함을 이용하여 이를 증명하여보이겠다고 큰소리쳤다.
해군은 마지못해 시연에 동의하였고, 폭격의 피해를 학습할 수 있도록 엄격한 제한사항을 제시하였다.
거기에는 피해 결과 자료가 완전히 분석될 때까지 외부에 공식적 보도를 하지 않도록 하는 요구도 있었다.
미첼은 해군이 결과를 덮어버리려고 한다고 느꼈다.
1921년 5월 1일, 미첼은 제1 임시 공군 여단을 조직하였다. 버지니아의 랭글리 기지에 1000명의 사람과 125대의 비행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6개 대대로 조직되었다
Air Service Field Officers School, Langley Field, Virginia, (SE-5 fighters)
미첼은 애버딘 병기 시험장에서 폭탄, 뇌관, 다른 장비들을 시험한 후 5월 27일에 취임하였고, 대함 폭격 기술을 훈련하기 시작하였다. 1차대전때 독일 전함에 폭격을 했던 노련한 러시아 파일럿, 알렉산더 세베르스키가 합류하였는데, 그는 당시 경험에 의하면 직격탄 대진 지근탄이 수중에서 터지며 발생하는 수압을 이용하여 배에 구멍을 내는 것이 더 좋다고 하였다. 알프레드 윌킨슨 존슨과의 추가적인 토론 후에, 지근탄이 더 큰 피해를 준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시연 시작 후, 미첼은 해군의 제한사항을 테스트의 초반 며칠동안 준수하였다. 1921년 7월 13일에는 노획된 독일의 구축함 G-102를 성공적으로 가라앉혔고, 1921년 7월 18일에는 노획된 독일의 경순양함 프랑크푸르트를 성공적으로 가라앉혔다. 이 배들에 대한 시연에서 배들은 처음 SE-5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았고, 25파운드 대인 폭탄의 갑판 폭격을 받았는데, 이는 대공포에 대한 압박을 시뮬레이션하려는 목적이었다. 이후 쌍발 마틴 NBS-1 (마틴 MB-2) 폭격기에 의하여 고폭 대형 폭탄의 폭격을 받았다. 미첼은 그 광경을 자신의 오스프리라는 별명이 붙은 DH-4에서 관측하였다.
1921년 7월 20일, 해군은 불침전함이라고 생각되던 노획한 독일 전함 동프리슬란트를 데려왔다.
첫 날에는 해병, 해군, 육군의 비행기에서 230, 550, 600파운드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전함은 선미로 3피트, 좌현으로 5도 기울어졌다.
추가 폭격은 기상악화로 하루 연기되었다.
1921년 7월 21일, 5대의 NBS-1 폭격기가 5개의 11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였고, 3발의 명중탄이 있었고, 12시 즈음, 전함은 함미로 2피트 더, 함수로 1피트 가라앉았다.
이 시점에서, 월터 로손 공군 대위 지휘 아래 각각 2000파운드 폭탄을 싣고 있던 3대의 핸들리페이지 O/400와 8대의 NBS-1 폭격기는, 직격탄 대신 지근탄을 목표로 하여 6발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명중탄은 없었으나 3발의 지근탄이 있었고, 그 수중 폭발은 배가 전복될 만큼 충분한 구멍을 선체에 내었어주었다.
전함이 가라앉는 데는 21분이 걸렸고, 7번째 폭탄이 가라앉는 배 근처에서 터지며 거품을 내었다.
근처의 관측선 USS 헨더슨 위에는 많은 외국인 참관인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인 일본의 오사미 나가노 대령은 지역신문에 "많이 배우게 되었다"는 논평을 하였고,
몇 년 후, 그는 진주만 공습에 한 건 했다.
미첼은 "전시전투상태"라고 압박해왔으나, 이 실험의 전함은 멈추어있는 상태였고, 전함의 침몰은, 비록 2천파운드 폭탄이 투하되기 전에 바뀌었지만, 작은 탄약에 의한 피탄 결과를 해군 기술자들이 검사하도록 허가되었던 규칙을 위반하여 수행되었다. 미첼의 항공인력들은 규칙을 무시하고 합동공격으로 배를 빨리 가라앉혔다. 난파된 함의 연구로부터, 전함은 직격탄에 의해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연속적 침수에 의해 가라앉았으나, 만약 함내에 피해대책반이 위치하여 금방금방 막아주었다면 가라앉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비록 그 결과가 육해군의 원활한 관계를 원하던 육군대장 퍼싱장군에 의하여 경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첼은 격침을 자신의 홍보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험은 당시 큰 영향을 주었는데, 공군을 위한 예산의 조정을 가져왔으며, 공군력에 대한 해군의 위기감을 가지게 하였다. 어쨌든간에 미첼 보고서에서 강조된 점은 후일의 전쟁에서도 증명되었다. ...최신 전함을 비롯하여 바다의 모든 탈것들은 공습에 의해 가라앉을 것이며, 이는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강해질 것이다. 시연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폭격의 위력을 보여주었고, 공군으로 조직된 폭격비행대는 침략해오는 적에게 맞설 훌륭한 대항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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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5/02 집쥔 계획B : 대함 폭격 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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