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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개설입니다

 

Gerald Bull - 꿈을 이루지 못한 한 과학자의 이야기(랄까요)

 

출처는 http://www-istp.gsfc.nasa.gov/stargaze/SGbull.htm의 글이 입맛에 맞아 들고 왔으니 집쥔의 가난한 영어실력을 아시는 분은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도 관련 사이트는 많이 있습니다.

 

박사올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전쟁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평화적인 용도로도 쓰이기는 했습니다마는 화학의 발전은 폭발물에, 물리학과 수학의 발전은 병기의 발전에 이용이 되어왔던게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이지요. 로켓 기술 또한, 선지자들의 목적은 지구 밖의 우주를 탐사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마는, "박사는 별을 노리고 쏘았으나, 로켓은 런던을 때렸다"는 블랙조크로 회자되는, 독일의 유명한 로켓과학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Wemher von Braun) 박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래도 박사는 운이 좋게도 전후 민간인 입장에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도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베르너 박사만한 꿈과 실력을 가지고 있는 천재였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횡사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박사만큼의 명성도 얻지 못하고요.

제랄드 빈센트 불(Gerald Vincent Bull)박사는 1928년 3월 9일에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실부모하고 삼촌집에 얹혀살게 되고, 그 삼촌마저 유명을 달리하여 숙모의 밑에서 그다지 좋지 못한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비상한 천재였던 그는 24살에 박사가 되어 당시 2차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영국의 과학기술들이 피난차 이전되었던 캐나다 무기 연구 및 발전 시설(Canadian Armament Research and Development Establishment)에 들어가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박사가 맡은 일은 모형과 풍동실험을 통하여 초음속이 비행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였습니다. 기존 방식은 기체 주변의 공기를 이동시켜 환경을 만들어주는 방법이었는데, 초음속 레벨에 달하자, 그만한 기류를 만들어주는 데에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때 박사는 발상을 전환하여, 관찰모형을 새보트에 집어넣고 대포를 이용하여 발사하는 방식으로 모형을 초음속상태로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박사는 자신의 목표를 결정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캐나다 정부의 군사기술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투자 문제이겠지요)와 고루한 관료주의와 더불어 소득에 대한 불만 - CARDE에서 공기동역학 학자로서 박사가 1959년에 받은 월급은 1만7천불인데 반해, 1961년 박사는 10만불이 넘는 소득을 미국 국방성과의 노즈콘(탄두뚜껑이라고 생각하시면)관련한 상담으로 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 은 박사를 기존 직장을 버리고 몬트리올의 McGill대학의 교수로 옮겨앉게 하였습니다. 또한 미군 탄도연구실(US Army's Ballistic Research Lab)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지요.

일생에 걸친 박사의 꿈이라면 대포로 발사한 투사체가 바로 지구 중력권을 빠져나가 외부궤도에 올라앉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언급한 쥘 베르느의 '달세계여행'이라는 소설에서 따온 모티브라고 할까요. 이라하여 1961년, 박사는 HARP(High Altitude Research Project) 계획을 시작하게 됩니다. HARP 계획은 McGill대학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비군사적인 학문적 계획이었습니다. 박사는 기계공학부분의 교수로 차가를 하계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획의 특성상 미군 탄도연구실도 이 계획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고, 관대-_-하게도 미군은 실험을 위해 퇴역한 전함의 함포와 레이더를 비롯한 군사장비를 제공하였습니다.

HARP 계획은 바아베이도스(Barbados)섬 - 유명한 로켓발사기지인 플로리다의 카나베럴 곶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 에서 거점을 마련하게 됩니다. 퇴역한 구경 16inch함포의 20m의 포신을 36m로 연장한 포에 '마틀렛(Martlet)'으로 이름붙여진 나무로 만들어진 새보트에 담긴 투사체를 발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포 발사순간의 포음은 섬 전체에 들릴 정도였으나 실질적인 피해는 전무하였으며, 섬의 주민들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기뻐하였다고 하더군요.

마틀렛은 연구 목적으로 만들어져, 금속 채프, 화학적 연기 혹은 기상학용 풍선을 탑재할 수 있었습니다. 장거리 탐색 레이더를 이용하여 투사체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1965년말에는 HARP 계획은 100여발의 마틀렛들을 날렸고 그것들은 고도 50마일(80km) - 대기가 거의 없는 전리층에까지 날아갔습니다. 1966년 11월 19일에 미군 탄도연구실은 박사의 HARP 포를 이용하여 185파운드(90kg)의 마틀렛 미사일을 고도 111마일(178km)까지 날릴 수 있었습니다. 저 고도는 대포로 발사된 투사체가 도달한 최고 고도로 지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론적으로 말해서 대포로 지구궤도에 투사체를 발사하는 일은 로켓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투사체의 크기에 제한을 받고 발사 순간의 강력한 압력 - 거의 1만G에 달하므로, 생물은 탈 수 없음 - 을 견뎌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나, 고정위치에서 발사되므로 발사체의 제어를 로켓보다 훨씬 정확하게 할 수 있으며, 연료를 기내에 탑재하지 않는 이유로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지며 뭐니뭐니해도 로켓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사는 로켓추진체의 도움을 받는 투사체인 마틀렛4를 이용하여 그 동안 꿈꾸어왔던 일인, 대포로 발사하는 투사체를 우주로 올릴 계획을 야심적으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HARP 계획은 1967년에 중단 - 월남전이 한창이다 보니 군사적 여력이 그 쪽으로 집중되어서인 듯 싶습니다 - 되었습니다. 박사는 이렇게 된 이상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기로 하고, 계획의 경력자들을 재조직하여 상업적 기업인 우주연구회사(Space Research Corporation)를 세웠습니다. 박사는 그의 슈퍼 건에 관한 비전의 실현을 도와줄 후원자를 찾기 위하여 나토, 미군, 캐나다, 중국, 이스라엘, 핀란드 그리고 이라크등의 다양한 나라들과 접촉을 하게 됩니다.

 

16inch HARP Gun이올습니다

 

당시는 베트남전이 한창이었고, 박사의 항공역학 투사체 연구 덕에 박사는 회사를 군사병기회사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투사체를 고고도까지 날도록 한 그 동안의 연구는 또한 기존의 포탄에 비해 더 먼 거리를 날아가 목표를 더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신형 포탄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박사의 회사에서 만들어진 포탄은 당장 미 해군에 채택되어, 월남의 해안에서 미군의 구축함들이 소련이 지어준 신형 해안요새를 요새포의 사거리 밖에서 피해없이 침묵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박사의 회사가 생산하는 포탄은 박사의 국적이 있는 캐나다의 공장에서 생산되었는데, 박사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박사의 생산품을 많이 사용하는 미 국방성의 무기 거래에 걸리적거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사의 전략적 중요함을 알게 된 이상 박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저런 문제는 사소한 걸림돌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상원의원 베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후원으로 박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이전에 단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마르퀴스 라파예트(the Marquis de Lafayette)만이 누릴 수 있었던 아주 드문 영예였습니다.

상원의 의결에도 불구하고, 해군과의 거래는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미해군이 박사의 상품을 경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은 그런 단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박사의 사거리 연장 포탄과 그를 쏘기 위하여 디자인된 살상용으로는 끝내주는 성능의 야포는, 이집트, 이스라엘, 네델란드, 이태리, 영국, 카나다, 베네수엘라, 칠레, 태국, 이란,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스트리아 그리고 소말리아 등 많은 나라들이 채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국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박사의 입장은, 두 나라 군수제품의 수출법령의 차이를 이용하여, 법망을 피할 수 있는 나라에서 상품을 선적하여 수출하면 되는, 사업에 잇점을 제공하였습니다. 벌어들인 돈으로 박사는 버몬트 주 북쪽 경계의 고립된 시골에, 무기의 천재는 그 자신의 포격장, 측정탑, 사격제어탑, 레이더 추적실, 작업장 그리고 기계실을 지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SRC는 300명이 넘는 사람을 고용하고 1500만$가 넘는 첨단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HARP 사업의 중단은 박사에게 정부 출자 과학 기관을 불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정부의 연구자들을 "광대" 혹은 "잡종과학자"라고 언급하였고, 자신의 미래는 자유로운 사업의 활력있는 세계에 의존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고고도를 탐색하는 대신, 박사는 그의 준비된 지능을 치명적인 군수품의 개량에 바쳤습니다. 박사는 그가 싫어하였던 소련이나 그 동맹국에 대해서는 자사제품을 팔지 않았지만, 그 외는 누구에게나 팔았습니다. 박사의 대포는 앙골라의 요나스 사빔비의 UNITA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었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도 양 측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우주개발자였던 박사는 이제 전문 무기상이 되었습니다. 박사는 무기상으로는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는데, 상업적인 재능은 없던 이유에서였습니다. 많은 엔지니어들처럼, 박사도 사업적인 경영에 지배되기보다는, 기술적 성취의 결과에 즐거워하고는 했습니다. SRC의 분위기는 박사는 교수, 고용인들은 학생으로 비교가 되는 매우 학구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박사의 고용인들은 그에게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아 거의 숭배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SRC는 박사의 천재적인 기술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박사는 1980년에 큰 시련을 맞게 됩니다. 카터 행정부는 박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거래를 비난하며 박사를 관세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이 형벌은 박사에게 보통 이상으로 큰 충격을 주게 되었습니다. 박사는 자신이 위선자이며 편향되고 배타적인 워싱턴의 관료집단의 정치적 희생양으로서 고립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사는 미국 감옥에서 7개월동안 옥살이를 하였고, 많은 양의 서적을 읽고, 감옥의 난방시설을 성공적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감옥에서의 경험은 박사를 씁쓸하고 냉소적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감옥 안에 있을 때, 박사는 벌써 그를 열렬히 원하였던 고객 중의 하나로 판명된 공산주의 중국으로부터의 상업적인 접근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 감옥에서의 판결이 끝난 다음에, 박사는 미국-카나다 경계 안의 이상한 고립을 포기하고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전하였습니다. SRC는 국제적 무기 거래의 유럽의 최전방 무기고이며, 어떤 전쟁상품도 거래될 수 있는 이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1987년 11월, 박사는 브뤼셀의 이라크 대사관의 정중한 접촉을 받고 이라크측의 모든 경비제공하에 바그다드로 가게 되었습니다. 1980~1989년의 오래되고, 치명저깅고 끈질기게 결론이 나지 않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정권은 800억$의 병기와 병장비를 소비하였습니다. 사담은 특별히 소련이 지원한 스커드(Scud) 미사일을 좋아하였는데, 이것은 "도시간의 전쟁"으로 불리어진 기간동안 도시 한가운데에 발사되어 시민들을 살상함으로서 이란인들의 전쟁사기를 가혹하게 흔들었습니다. 사담의 심중에서 스커드 미사일의 가장 큰 문제는 제한된 사거리와 낮은 명중율이었습니다. 그리래서 그는 이라크 로켓 기술의 발전에 많은 장비와 인력을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는 이미 박사의 155mm야포를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리아로부터 많은 양을 사들였었고, 그 위력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는 미군이 했던 이상으로 더 좋고, 더 멀리 나가며, 더 정확한 박사의 야포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사는 다시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크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깨는 일에 대해 마지못해 동의하였습니다. 박사는 그의 후견인이 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고, 그들은 그 손님의 꺼림직함을 주의깊게 경청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박사의 평화적인 우주대포계획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박사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주도권을 생각하십시요" 박사는 이라크 산업부에 제의하였고 그 생각은 이라크 정부의 흥미를 끌었습니다.

이스라엘은 1988년 9월에 그들의 샤비트(Shavit) 로켓을 궤도상에 올려놓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아랍 연맹에게는 매우 감명을 주었으며 또한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박사는 이라크는 수십 혹은 수백의 아랍 인공위성을 궤도상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작고 무인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발사체들은 한 개에 단지 5천$정도의 비용만이 들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이것이 달성된다면 이라크는 대단한 우주력을 가질 것이었습니다. 초강대국에 비하면 작지만 유일한 아랍의 우주력이 될 터인 힘을 말이죠. 그리고 비록 작은 위성들은 단지 보이지 않을 뿐만이 아니고, 작은 위성일지라도 감시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터였습니다.

미국 군부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가장 나쁠 때에 그들의 스파이 위성을 사담 후세인의 머리로 날려보내여 스파이 위성의 유용성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라크 측은 박사와의 협력을 통하여 매우 넓은 범위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과학적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지식이 평화적이든 아니든 말이죠. 평화로운 목적인 HARP 프로젝트도, 결론적으로 박사 자신이 스스로 익힌 지식을 이용하여 병기시장에서 이득을 얻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별을 노려서 만든 비군사적인 목적의 노즈콘의 디자인 또한 잠자는 런던시민을 머리위에 떨어지던 초음속의 비명을 내게 만든 물건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튼 박사는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다양한 지원을 할 수 있는 관대한 후견인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1989년 이라크는 박사와 그 회사에 그들의 야포를 개량하는 댓가로 1년에 500만$를 지불하고, 이라크 우주 야포를 만들기 위한, 계획의 절정인 "바빌론 프로젝트(Babylon Project)"에 착수하였습니다. 박사는 북부 이라크에 사드 16(Saad 16) 미사일 테스트 복합단지와 같은 전조 무기 벙커를, 서방 기술자의 관리와 그레이 마켓에서 구한 텍트로닉스(Tektronix), 과학 아틀란타(Scientific Atlanta) 그리고 휴렛팩커드(Hewlett-Packard)사의 첨단장비들을 가지고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바빌론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꿈꾸어 온 박사의 대망이었고, 이제 모든것이 그의 손 안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습니다.

 

Babylon Gun의 모형이올습니다

 

1989년 8월, 아기 바빌론(Baby Babylon)이라고 이름지어진 작은 규모의 원형이 중앙 이라크의 자바이 함랸(Jabai Hamrayn)이라는 비밀장소에서 건조되었습니다. 아기 바빌론은 탄두를 우주궤도에 올릴 수는 없었지만, 국제적인, 아마도 대륙간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형은 첫 번째 시험사격을 하였습니다. 이라크는 다른 슈퍼 건 원형을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부품 밀수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무기 상인으로서의 박사의 재능이 별 볼 일 없다는 것은 그가 이미 감옥을 다녀 온 것으로부터 증명이 된 바였습니다. 박사는 알랑거리는 대신에 말하였고, 말하는 대신에 떠벌이곤 했습니다. 박사의 역할이 상당하였던 "지적 공동체"의 내부에서 말들이 새기 시작하였고, 몇 가지는 이라크와 미사일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단어가 이스라엘측에 도달하였을 때, 그들은 박사의 천재적인 재능을 두려워하였고, 박사에게 여러 측면에서 경고와 위협을 하였습니다.

이라크의 슈퍼 건은 통상적인 군사무기로서의 효용성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커서 은폐를 할 수 없고 이동은 커녕 방향전환마저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발사시에는 500피트(150m) 크기의 화염을 내뿜는데 이는 일반적인 스파이 위성이 간단히 잡아낼 수 있었으며 그 파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F-15기의 단 한 번의 공격이면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슈퍼 건은 단 한방의 발사체로로도 적국을 끝낼 충분한 가능성 - NBC병기를 적의 수도 한 가운데에 떨구는 방법 -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사는 그러나 바빌론 계획이 전적으로 평화롭게 쓰이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사는 계획의 군사적 용도로서의 전용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박사가 그의 바빌론 계획에서 원한 것은 "명성"이었습니다. 박사는 전 세계가 "제리 불(Jerry Bull)" 자신을 우주개발계획을, 더도말고 덜도말고 홀로 이루어 낸 사람으로서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푸트니크(Sputnik)가 처음 발사되었을 때 들렸던 세계의 반응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에게 있어서 바빌론 프로젝트는 군사적 무기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무기였습니다. 단지 얼마간의 야포대대로부터 이라크의 명성이라는 성공이 얻어질 수 있다는 환상적인 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랍 세계를 주도권을 쥐는 것은 사담의 야망이었고, 박사의 대포는 이라크 주도권의 상징이 될 것이었습니다. 호메이니와의 오랜 전쟁은 사담의 위대함을 위한 야망을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80년 파리 호텔방에서 이라크 핵물리학자 야하 엘 메스하드(Yayha El Meshad)가 모사드에 의하여 살해된 사건과, 1981년의 오시리크 원자로 폭격작전을 통하여, 이런 사담의 야망을 좌절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약점들로 인하여, 슈퍼 건 자체는 그리 위협적인 무기는 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이스라엘은 일단 박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이라크 측의 요청에 의해 스커드 미사일의 노즈콘 설계에 나서게 되고, 이것은 (슈퍼 건과는 달리)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측은 여러 번의 암시적 경고를 박사가 듣지 않자, 행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1990년 3월 22일 박사는 브뤼셀의 그의 아파트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만나, 무소음 자동권총으로부터 발사된 30구경 총탄 5발을 목과 뒷머리에 얻어맞고 절명하였습니다. 박사를 암살한 자는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Doomsday Gun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영화로 보실 분은 한 번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 집쥔은 본 적 없음. CIA개입건은 이 글에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못하였는데 사실인 듯 싶습니다. 정치논리에 의해 희생된 순진한 과학자의 이야기라고 할까나-_-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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