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1. 고구려 대 수·당 전쟁의 승리 요인

고구려 대 수·당 전쟁(高句麗對隋唐戰爭)은 고구려(高句麗)가 수 (隋)·당(唐) 양대제국의 무력침공에 맞서 전후 50여 년에 걸쳐 항 쟁을 전개한 미증유의 대전란이었다. 수는 중국의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시킨 대통일제국으로서의 막강 한 국력을 동원하여 598년부터 613년까지 4차에 걸친 고·수 전쟁 (高隋戰爭)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말 미암아 수의 주력 부대의 육로군(陸路軍)은 고구려를 침공할 때마다 최전선인 요동(遼東)지역을 통과해 보지도 못한 채 번번히 기수를 돌려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는 연인원 2백여만 명이 넘는 인 력과 수백 척의 전함(戰艦), 그에 상응하는 군량 및 각종 장비들을 동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굴복시키거나 그 영토의 일부마 저도 장악하지 못하였다. 수는 대고구려 전쟁(對高句麗 戰爭)에서 엄청난 인력과 전비(戰 費)를 소모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의 여파에 휩쓸려 제국의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결과적으로 고·수 전쟁에서 승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 제국의 뒤를 이어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고 644년부터 647년까 지 2차에 걸쳐 고구려에 침공하여 고·당 전쟁(高唐戰爭)을 일으킨 당 제국도 끝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만 을 입은 채 고구려 정복 야욕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대고구려 전쟁 에서의 패배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가 고·수 전쟁과 고·당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그 내부에 서는 국민의 자긍심이 크게 고양되었으며, 국제적으로는 고구려가 동아시아 세계의 강자로 부상하여 국위를 떨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가 이와 같이 수·당 양대 제국의 대규모 무력 침공을 물리 치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고구려군의 수뇌부는 수·당 침공군의 수뇌부에 비하여 우 수한 전쟁 지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수와 당의 침공군은 침공 초기 단계부터 대규모 병력을 집중 운용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 부대를 수시로 이합 집 산시킬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상대방인 고 구려군에 비하여 항상 병력의 수적 우위를 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후방 내륙의 여러 지역 에서 증원병력을 차출하여 전방 방어지역으로 파견하여 방어력을 증 강하지 않으면 침공군의 내륙진입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고 구려의 전방 방어군은 적어도 증원부대가 도착할 때까지는 압도적으 로 우세한 수·당의 침공군과 싸워서 그들이 고구려 영내로 진입하 는 것을 지연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방 벙어군은 후방으 로부터 이동해 오는 증원군의 도착이 늦어지거나 합류가 불가능해질 경우에는 더욱 심화되는 병력의 수적 열세로 말미암아 고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침공군과 공방전을 전개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도 군 수뇌부의 전술 운용 능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군 수뇌부는 대체로 수·당의 침공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기 보다는 요새화된 성곽을 이용하여 장기농성을 계속하면서 공 방전을 전개함으로써 침공군의 전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 작전을 구 사하였다. 특히 수군을 요동성(遼東城)에 고착시켜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승전의 단서를 열었던 제2차(612) 및 제3차(613) 고· 수 전쟁과, 안시성(安市城)에서 당군을 패퇴시킨 제1차 고·당 전쟁 (647)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고구려군 수뇌부는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요동지방의 기후조건을 유효 적절히 활용하기 위하여 겨울이 올 때까지 장기전을 전개함으 로써 침공군이 스스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전법을 구사하 였다. 수·당의 침공군 수뇌부에서도 요동지역의 이와 같이 특이한 기후를 고려하여 겨울이 시작되기 이전에 작전을 완료하고 신속히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전략의 대 계(大計)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고구려군 수뇌부는 바로 이와 같은 수·당 침공군의 취약성을 간 파하고 주요 기동로상에 위치한 성곽에 군량과 무기를 대량으로 비 축하여 장기간 농성이 가능하도록 요새화한 다음, 민(民)과 군(軍) 이 혼연 일체가 되어 이를 고수하는 방어전술을 효과적으로 이용함 으로써 그들과의 전쟁에서 빈번히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둘째, 고구려는 침공군의 경직된 군령체제(軍令體制)의 허점을 이 용하여 위장항복(僞裝降服)을 반복함으로써 적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그 틈을 이용하여 수성태세(守成態勢)를 재정비 강화하였다.

고구려가 제4차 고·수 전쟁 때에 곡사정(斛斯政)을 수군 진영에 압송하는 조건으로 담판을 벌인 결과 침공군을 물러가게 한 것은, 외교적 책략으로 적을 물리친 대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수 양제는 국내 정세를 도외시한 채 무리한 출병을 강행하여 제4차 고·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수 제국 내부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혼란이 심화되자, 수의 고구려 침공군 은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고구려 군 수뇌부에서는 수군측에 적절한 명분만 제공해 주면 수군은 공격 을 중지하고 철병을 단행할 것으로 전망하고 외교적 교섭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따라 고구려측에서는 613년의 제3차 고·수 전쟁 당시 고구 려에 투항하여 수군의 전략 수행에 결정적인 차질을 초래하게 하였 던 병부시랑 곡사정을 수군 진영으로 압송하여 일단 그들의 체면을 세워준 다음. 철군을 종용하였다. 수군측에서도 적절한 명분을 찾지 못하여 철군을 망설이고 있던 차에 고구려측이 곡사정의 송환과 함 께 철군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제4차 고·수 전쟁이 종식 되었던 것이다.

셋째, 수·당 양 제국은 모두 공통적으로 내외 정세가 불안정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탈피하지 못한 가운데에서 무리하게 고구려 침공 을 단행하였다.

수 제국은 건국된 후 불과 20여 년도 경과하지 못한 598년에 제1 차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였다. 그로부터 겨우 10여 년이 경과한 612 년, 613년, 614년에는 해를 이어서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당시 의 수는 신흥 통일왕조의 새로운 통치체제를 정착시켜 나가는 과도 기적 단계를 걷고 있었으므로, 이와 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대규 모적인 외정은 자연히 제국 그 자체의 존망을 위협할 정도의 심대한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 제국도 건국 후 불과 30여 년 만에 고구려 침공을 개시함으로 써 수 제국과 마찬가지로 과도기적 상황 아래에서 대규모의 외정이 라는 모험을 감행한 셈이었다. 고·당 전쟁은 당 고조의 재위 10여 년에 이어서 태종이 즉위한 지 20여 년이 경과한 시점이 발생한 것 이었으므로 당의 국내 정국은 고·수 전쟁 당시에 비하여 다소 안정 되어 있었으나, 불안정한 상황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수·당 양 제국은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의 취약성을 간과한 채 무 리한 외정을 거듭하다가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쳐 번번히 패 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수·당 제국의 이와 같은 무모한 대 고구 려 작전의 반복은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고구려의 민(民)은 군(軍)과 다름없이 투철한 투쟁정신으로 이민족의 침략 위협에 대항하였다.

고구려인들은 험준한 산악이나 고원지대를 주요 생활 무대로 삼고 있었으므로 생활력이 매우 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렵 활동이 생 활의 주요 수단이 되었으므로 말타기·활쏘기 등과 같은 기술에 숙 달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 사회 전반에는 상무적 기풍(尙武的 氣風)이 팽배 해 있었으며, 유사시에는 남녀노소, 귀천의 구분 없이 전국민이 요 새화된 성곽에 집결하여 싸울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국민적 기상과 단결력은 무형의 전력(戰力) 으로서 수·당 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요인 이 되었던 것이다.

2. 고구려 대 수·당 전쟁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는 네 차례에 걸친 수 제국의 침공과 두 차례에 걸친 당 제 국의 침략을 요동지역에서 물리침으로써 국체(國體)를 보전하고, 동 북아시아 지역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고·수 전쟁에서 고구려에 패퇴한 수는 전쟁의 후유증을 수습하지 못하고 제국 그 자체가 붕괴되었다. 그후 고구려는 고·당 전쟁에서 당의 소모전에 말려들어 심대한 타격을 입고 국력은 피폐 일로를 걷 게 되었다. 당 제국도 고구려와의 대규모 전쟁을 통하여 막대한 인 적·물적 손실을 입고 스스로 침공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 라서, 고구려는 결과적으로 고·수, 고·당 양대 전쟁에서 모두 승 리를 거둔 셈이 되었다. 고구려의 민군들은 이민족인 한족(漢族)의 패권주의(覇權主義)가 요하를 건너 요동지역으로 밀려오자 민족의 자존을 지키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여 이에 맞서 싸웠다. 고구려인의 이와 같은 굳건한 항 전 태세는 수 제국의 패망을 초래하였으며, 당 제국이 정복 야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 려는 한족의 통일제국인 수·당의 도전을 물리친 동아시아 유일의 민족으로서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력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고구려는 한족왕조(漢族王朝)인 수·당 제국의 대규모 침공 을 성공적으로 물리침으로써 한민족 대외투쟁사(韓民族 對外鬪爭史) 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수·당 제국은 건국 직후부터 통일 전쟁을 전개하여 반군세력 집 단은 물론, 돌궐(突厥)과 같은 이민족 집단까지도 거의 예외 없이 그들의 말발굽 아래 굴복시켰다. 그러나 오직 고구려만은 조야(朝 野)의 단결된 힘과 불굴의 투쟁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 자존을 위한 항쟁을 전개한 결과, 침략 세력을 물리치고 최후의 승리를 거 두었던 것이다. 이는 민족의 자긍심을 고양시켜 준 대표적인 전쟁으 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대외투쟁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전쟁 사례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둘째, 고구려는 고·수 전쟁에서 수 제국을 번번히 패퇴시킴으로 써 수가 멸망하고 당이 중원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는 계기를 제공 하였다.

고구려는 수 제국과의 무력 대결에 승리한 결과, 그들의 침략 위 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나, 수 제국이 망하자 이를 계승한 당 제국과 또 다시 무력 대결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 제국 은 전조(前朝)인 수 제국에 비해 월등히 우세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 으나, 수와 같이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는 대규모 전쟁을 감행하지 않고 비교적 소규모의 정예군을 대 고구려 전선에 투입함으로써 전 쟁의 양상에 질적인 변화를가져왔다. 그리하여 이미 네 차례의 고· 수 전쟁을 치르면서 국력이 극도로 쇠진한 고구려는 도리어 고·수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강적이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줌으로 써 중국의 신생 통일국가인 당과 더욱 힘겨운 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셋째, 고구려는 수·당 제국과의 오랜 항쟁으로 국력이 쇠진하기 에 이르렀으나, 이와는 반대로 한반도 남부의 신라(新羅)에서는 오 히려 이것이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고구려는 제2차(612)·제3차(613)·제4차(614) 고·수 전쟁에서 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고·수 전쟁 기 간 동안의 빈번한 인력 동원으로 농업 생산력이 저하되어 국가 경제 는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당 제국의 침략 위협에 대비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천리장성을 축조 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주력함으로써, 경제 여건은 날이 갈수록 악 화되어만 갔다. 더욱이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집권한 이후 로 빈번히 신라의 변경지역에 대한 침공을 자행한 나머지 국력의 소 모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자초하였으나 신라에는 이것이 오히려 자 극제가 되어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공군을 물리치기 위한 대규모 전쟁에 국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백제가 신라에 대한 침공을 빈번히 하여 국력을 소모시키고 있을 때, 신라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고 내실을 굳게 다지면서 국력을 신장시킴으로써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주역으로 성장해 나갔다. 한편, 고구려는 수·당 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전쟁에서는 승리 를 거두었으나, 피폐해진 국력을 끝내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그로부 터 불과 20여 년 만에 신라에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 다. 그리하여 6세기 말과 7세기 초를 전후로 하여 형성되기 시작한 동서세력(東西勢力)인 당과 신라가 남북세력(南北勢力)인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당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서, 신라가 한반도의 통 일왕조로 등장하는 역사적 대변혁의 분수령이 이루어졌다.

고구려 대 수·당 전쟁은 고구려의 국가 위신을 선양시키고 국민 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으나, 그 후유증 으로 말미암아 전후(戰後) 20여 년 만에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羅 唐 聯合軍)에게 멸망당함으로써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지역의 신질 서 형성에 단초가 된 역사적 대사건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