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의 영향

1. 고구려에 미친 영향

고구려는 중국대륙의 통일제국인 수(隋)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서 침공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고·수 전 쟁에서 군사강국인 수의 침공야욕을 좌절시키고 국권을 수호함으 로써 국제적으로 그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을 통하여 수십만 내지 수백만 병 력 규모의 침공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 강화에 전 국력을 집중 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국력이 고갈되어 피폐일로를 걷게 되 었다. 그후 고구려는 이 전쟁을 계기로 군사력이 급격히 팽창하여 동 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였다고는 하나, 막대한 군비의 지출 로 국민경제가 크게 악화되어 전반적인 국력의 약화현상을 가속화 기켰다. 수 많은 장정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전선에 배치되어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으므로 대부분의 경작지(耕作地)는 방치되다시피 하여 농업생산력이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민의 생 활수준도 매우 저하되어 극도의 내핍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 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에서 수 제국이 멸망하고 당이 출범하 자 고구려의 영류왕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은 중국과의 전쟁 재 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수·당 의 교체라는 정세변화를 국력회복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 하여 고구려는 당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대당 사절 의 교류를 확대하고 불교와 도교의 유학승을 파견하는 등, 당과의 문화 교류를 긴밀히 하여양국의 선린우호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 다. 그러나 고구려 내부에서는 십수 년간에 걸친 고·수 전쟁을 통 하여 세력을 길러온 강경세력 집단이 영류왕을 중심으로 한 온건 파들의 대당 외교노선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온건론자들의 대당정책을 고구려의 국가적 체면을 손상시키는 굴 욕적인 외교노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부대인 연개소 문(淵蓋蘇文)을 중심으로 한 강경세력 집단은 마침내 정변을 일으 켜 온건파를 타도하고 대외정책 노선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자 하 였다. 642년 10월, 정변을 일으킨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그 측근 세력 들을 제거하고, 새로이 보장왕을 세워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강경세력이 집권한 것을 계기로 하여 고구려의 대당 정책과 대백 제·신라 정책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후, 고구려는 대당 평화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익에 직 접적으로 관련되는 남진정책에 있어서는 강경 일변도의 노선을 추 진해 나갔다. 특히 대신라 정책에 있어서는 과거에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당의 군사·외교적 압력까지도 과감히 배격하면 서 적극적인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은연중에 신라를 비호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저지 하려는 당과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어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증대되 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당에 무력침공의 명분을 줌으 로써 고·당 전쟁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두 차례에 걸친 당과의 전쟁(제1차 고·당 전쟁, 제2 차 고·당 전쟁)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인 당에 맞서서 국가와 민족 의 생존권을 걸고 민과 군이 단결하여 투쟁한 결과, 가까스로 그 들의 침공을 저지하였으나, 국력은 크게 피폐되었다. 더욱이 고구 려는 앞서의 고·수 전쟁과 천리장성의 축조 등으로 말미암아 국 민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러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므로, 고·당 전쟁에서는 더욱 고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고·수 전쟁 이래 대중국 전쟁에 있어서 난 공불락의 요새로 손꼽혀 오던 요동성을 당군에게 빼앗기고, 10만 명이 넘는 인적자원을 포괄하는 태자하(太子河) 이북 요동지역의 영토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국력이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당군은 제2차 침공 이후로 대고구려 전술을 소모전으로 전환하여 남북 변 경지역에 대한 교란작전을 전개함으로써 고구려의 국력 소모를 가 속화시키려고 하였다. 고구려는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민 과 군을 총동원하여 대비태세를 갖추었고, 그 결과 당초에 당군이 기도한 계략에 빠지게 되어, 농사의 시기를 놓치고 극심한 식량난 에 허덕이는 등, 전반적인 국력의 쇠퇴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2개의 국가적 총력전인 고·수, 고·당 전 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국민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국위를 선양시 키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제2차 고·당 전쟁에 종식된 지 20여 년이 지난 668년에 나·당(羅唐) 연합군의 침공을 물리치지 못하고 끝내 패 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수·당에 미친 영향

1) 수의 멸망

수 제국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과중한 군역(軍役)과 요역( 役)을 부과하였다. 그리하여 수 많은 장정들 이 징집되어 전장(戰場)으로 나아가거나, 전선(戰船)·수레 등과 같은 각종 군수품들을 제작 운반하는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 인원 규모는 적을 경우에는 수십만 명, 많은 경우에는 1∼2백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로 말미암아 농촌의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여 경작의 시기를 놓치게 됨으로써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따라 서, 농촌 경제가 피폐하게 되어 급기야는 수 제국 전체의 경제적 파탄으로까지 그 여파가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농촌의 황폐화 현상은 산동(山東)·하북(河北) 지역 이 극심하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설상가상으로 홍수·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빈발하여 대규모의 농민 봉기가 일어나는 직접적인 원 인이 되기도 하였다. 농민 반란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자, 수 양 제는 제4차 고구려 침공을 단행한 이듬해인 615년부터 군현(郡縣) 지역에 위치한 여러 성곽을 보수하여 이들 성안으로 농민을 이주 시키고, 견벽청야전술(堅壁淸野戰術)을 구사하여 반란세력을 진압 하려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고 거기에 동원되었던 정예부대들을 반란세력 진압작전에 투입하여 일시적으로 다소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반군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하 였다. 수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반란세력들은 한때 많은 타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반복하면서 또 다른 세력 집단을 형성함으로써 강력한 집단으로 발전해 갔다. 더욱이 양현 감(楊玄感)의 반란에 가담하였단 관롱군사귀족(關 軍事貴族) 집 단의 일원인 이밀(李密)이 616년에 이들 반란군에 가세한 이후, 반란군 세력은 그 형세가 급성장하여 수군(隋軍)을 압도함으로써 수 제국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리하여 617년 무렵에는 이미 하 북지역의 대부분이 반란세력의 수중에 들어가 중앙정부의 통치력 이 미치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은 반란세력을 진압한 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모집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천하 를 제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반란세력의 형세가 점차 강성해 지자, 이연은 일찍이 수 양제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하여 파견한 두 명의 부유수(副留守)를 살해한 다음, 617년 여름에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태원에서 남하하여 황하(黃河)를 건너 관중(關中)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관중지역의 지주(地主)계층이 이연을 전폭 적으로 지지하자 이로부터 이연 군단은 세력이 급성장하여 손쉽게 서도(西都) 장안(長安)을 함락시키고 위수(渭水) 유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 제국은 전국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일어난 대소 규모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 며, 급기야는 수 양제와 그의 호위군인 금군(禁軍)이 강도(江都 : 양주)에서 동·서·북 3면으로 반란세력에 포위를 당하는 위기상 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618년에 수 양제가 금군의 우둔위장군(右屯 衛將軍)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됨으로써 수 제국은 3대 40여 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수 제국은 전후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을 통하여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소모함으로써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통치력이 이완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전국 각지에서 반란 세력이 봉기하여 급기야는 왕조의 멸망을 자초하게 되었다.

2) 당의 정치적 변혁

수 제국 말기의 혼란을 틈타 위수(渭水)지역을 장악한 당국공 (唐國公) 이연(李淵)은 618년에 양제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들리 자, 자신이 옹립한 공제(恭帝)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당조(唐朝) 를 개창하였다. 고조(高祖) 이연은 10여 년에 걸친 재위기간 동안에 국내의 통 일을 완료하였다. 그후 626년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즉 위하면서부터 당은 안정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20 여 년이 경과한 645년에는 제1차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여 요동성 을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안시성 공략에 실패함으로써 고구 려를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철군하고 말았다. 당은 그로부터 2년 후인 647년에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재개하 여 고구려 남북 변경지역의 몇몇 성곽을 점령하였으나, 649년에 태종이 사망함에 따라, 그의 유언(遺言)에 의하여 일단 고구려 침 공 기도를 포기하였다. 따라서, 당 태종도 두 차례에 걸친 고·당 전쟁을 통하여 끝내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심대한 인 적·물적 손실만 당하게 됨으로써 대고구려 전쟁은 일단 실패로 끝이 났다. 당은 두 차례에 걸친 대고구려 전쟁에서 과거의 수 제국과는 달 리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거나 무모한 토목사업을 일으키지는 않 았다. 그러나 당도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심 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이민족 국가인 고구려와의 전쟁에 당 태종 이 친정(親征)하여 실패한 선례를 남기게 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당 제국의 권위가 실추되는 손상을 입기도 하였다. 당은 고구려 침공작전의 실패와 태종의 사망으로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당 왕조 건국 이후부터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귀족집단으 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관롱군사집단(關 軍事集團)은 고·당 전쟁기간 동안에는 안정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였으나, 고·당 전 쟁이 일단 막을 내리게 되자 전쟁의 실패에 따르는 정치·군사적 부담을 안게 되어 점차로 그 세력이 위축되어 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당 제국 내부에서는 전국적으로 중소 지주 (地主)들이 대거 출현하여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 하였으며, 이들은 이미 당 왕조 건국 초기부터 농촌 사회에 빈부 의 격차가 심화되기 시작한 후로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가면서 성 장해 온 사회계층으로서 관롱군사집단이 고·당 전쟁에서의 실패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의 지배층으로 군림하면서 정권을 독점하 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강력한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그들도 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지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중소 지주층은 태종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한 후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무황후(武皇后)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력 집단과 제휴하게 되었다. 무황후는 이들 중소 지주층의 지지를 확보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관롱군사집단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후(戰後) 10여 년이 경과하지 않은 655년부터 무 후정권(武后政權)은 장손무기(長孫無忌)·저수량( 遂良) 등과 같 은 태종대의 중신들을 차례로 제거함으로써 관롱군사집단을 통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었다. 이와 같이 당 제국 내부에서는 고·당 전쟁 이후로 군사귀족인 관롱군사집단이 기존의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고 점차로 권력의 핵 심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고종대(高宗代)의 정치·군사적 혼란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3. 주변 제국에 미친 영향

1) 백제에 미친 영향

고구려가 제1차 고·수 전쟁(598)을 치른 직후인 600년, 백제에 서는 무왕(武王 : 600∼640)이 즉위하여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 하였다. 백제의 군사적 위협을 받아 궁지에 빠진 신라는 수에 지 원을 요청하였으나, 수는 대고구려 전쟁에 여념이 없었으므로 백 제와 신라의 분쟁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백제는 고구 려나 수의 간섭이 배제된 상황에서 안심하고 신라를 공략할 수 있 었으나, 신라에 대한 일련의 군사적 압박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 두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제1차 고·수 전쟁이 끝난 후 10여 년이 경과한 시점 에 이르도록 수와의 전쟁이 재발할 조짐이 보이지 않자, 일단 수 의 침공위기가 해소되었다는 판단하에 백제·신라에 대한 외교 노 선을 강경 정책으로 전환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양면외교 (兩面外交) 활동을 전개하여, 607년에 간솔( 率 : 5품) 연문진 (淵文進)을 수에 보내어 조공(朝貢)한 데 이어, 좌평(佐平 : 1품) 왕효린(王孝隣)을 파견하여 수에 고구려를 침공할 것을 건의하였 다. 그러자, 수의 양제는 이를 수락하고, 백제에 고구려의 동정을 살펴서 그 내용을 통보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백제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탐지함에 따라, 백 제의 수에 대한 책동은 오히려 고구려의 침략을 가속화시키는 요 인이 되어 607년 5월, 고구려는 백제의 송산성(松山城)과 석두성 (石頭城)을 점령하고 남녀 4천여 명을 고구려 영내로 이주시켰다. 그러자, 백제는 고구려의 이와 같은 무력침공이 재개될 것을 우 려한 나머지 그 이듬해(608) 3월에 또 다시 수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수 관계를 더 한층 강화하였다. 그후 611년에 수 양제가 제2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할 것을 결의하자, 백제 무왕은 국지모(國智 牟)를 수에 파견하여 수의 원정군이 출병할 시기에 대하여 논의하 면서, 백제도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대하여 수에서도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 에 파견하여 수군의 고구려 출병에 따르는 백제의 내응 전략을 구 체적으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는 미구에 고구려가 수의 침공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해지자 일단 고구려의 남침 위협이 해소되었다고 확신하고 그 해(611) 10월부터 신라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612년에 제2차 고·수 전쟁이 발발하자, 백제는 당초에 수와 약속한 바와는 달리 수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 지 않고, 신라에 대한 군사행동도 자제하면서 사태를 관망하였다. 백제의 이 같은 태도는 제3차 고·수 전쟁(613)과 제4차 고·수 전쟁(614) 기간에 이어서 수 제국 말기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수 제국 내부의 혼란이 심화되자 백제는 이 틈을 타서 다시 대신라 공세를 강화하여 신라의 모산성(母山城 : 운봉)을 침 공하였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세는 당이 건국될 무렵을 전후하여 더욱 치열해졌다. 이 당시 고구려의 영류왕은 대당 온건노선을 추구하 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한 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백제에 대한 무력행사를 자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위협 이 현저히 감소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이 오히려 활기를 띠게 되었다. 백제는 623년 가을부터 대신라 공격을 개시하여 이듬해(624) 10 월에 신라의 여섯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으며, 626년에는 왕재성(王在城)을 점령하고 그 이듬해(627)에는 신라 서쪽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켜, 남녀 주민 3백여 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남침 위협이 배제된 상황에서 백제는 안심 하고 신라 침공에 주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무 왕은 과거에 그들이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일거에 회복한다는 계 획을 세우고,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웅진(熊津 : 공주)에 대부대 를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러한 백제의 기도를 탐지하고 당에 구원을 요 청하자 당 태종이 백제에 국서(國書)를 보내어 신라를 침공하지 말 것을 종용함으로써 백제는 일단 신라에 대한 대규모 무력 침공 을 중지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백제의 신라에 대한 대규모 군사 행동은 일단 중지되었으나, 소규모의 국지전은 그대로 계속되었 다. 628년 2월과 632년 7월, 백제군은 신라의 국경요새에 대한 침공 작전에서 패퇴하였으나, 그 이듬해(633) 8월에 또 다시 신라의 서 곡성(西谷城)을 13일동안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서 백제의 장 군 우소(于召)가 정예병 5백 명을 이끌고 신라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대패하자, 이를 계기로 하여 백제 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현저히 둔화되어 무왕 말년(640)까지 소강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무왕을 계승하여 의자왕(義慈王 : 641∼663)이 즉위하 자,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의자왕은 당시 고구 려가 천리장성 축조에 국력을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서 642년 7월 부터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城) 등 40여 성을 함락시킨 데 에 이어 8월에는 대야성(大耶城 :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백제 땅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신라를 크게 긴장시 켰다. 신라와의 무력 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 백제는 643년 11월 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여 대고구려 관계를 개 선하고,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함께 서해안의 당항성(黨項城 : 남 양)을 공격하여 신라의 유일한 대당 교통로를 봉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당에 지원부대의 파견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백제는 도중에 이 계획을 포기하였다. 가능한 한 당과의 충 돌을 회피하면서 신라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려는 의도에서 취해 진 조치였다. 645년 5월 의자왕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신라에 지 원부대의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탐지하고, 이 틈을 타서 신라 변 경지역의 매리포성(買利浦城) 등 일곱 성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후, 제2차 고·당 전쟁이 발발하자, 백제는 또 다시 이 기회 를 틈타 647년 10월에 신라 변경지역을 침공하였으나 김유신(金庾 信)군의 반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제2차 고·당 전쟁이 끝난 이듬해(648) 3월에도 백제는 신라에 대한 침공을 계속하여 국경지역의 요차성(腰車城) 등 십여 성을 점령하였다. 백제의 대신라 무력공세가 날로 강화되자, 신라의 대당 외교도 더 한층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신라의 외교적 노력으 로 당 고종(高宗 : 650∼683)은 신라의 처지를 동정하여 651년에 백제 의자왕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국서를 보내어 백제의 자제 를 요청하였다.

"해동(海東)에서 삼국이 개국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강계 (疆界)를 나란히 하여 땅이 견아(犬牙)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근래에 서로 사이가 나빠져 전쟁이 빈발하니 편안할 해가 없고, 삼국의 백성은 마치 목숨을 칼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위태로 와졌으며,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무기를 가지고 분발(憤發) 하여 잠시도 쉴 사이가 없다… 바라건데 국왕(의자왕)은 신라의 성을 모두 본국에 돌려주고, 신라도 또한 백제의 포로를 돌려보내 어 양국이 환란과 분규를 풀고 무기를 거두어들인다면 백성은 쉬 고 싶은 소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며, 삼국은 전쟁의 괴로움이 없게 될 것이오… 국왕이 만일 우리의 중재에 따르지 않는다면 신 라가 백제를 공격하여도 방관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의 협조를 얻 어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고구려가 만일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곧바로 거란(契丹)으로 하여금 요하를 건너 공격하도록 할 것인바,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생각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그러나 백제는 제2차 고·당 전쟁에서 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 한 당의 실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당의 이 같은 경고를 받아들이 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신라에 대한 공세 를 강화하였다. 655년(의자왕 15, 무열왕 2) 8월, 백제는 당이 무황후(武皇后) 일파와 관롱귀족집단(關 貴族集團) 사이의 정쟁(政爭)으로 말미 암아 내분 상황에 처해 있음을 간파하고 이 틈을 타서 고구려·말 갈과 연합하여 신라 변경의 30여 성을 점령하였다. 신라는 즉각적 으로 당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당은 내부 분열에 의하여 극심한 혼란의 와중에서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미처 신라를 지원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제 의자왕은 당의 경고를 무시한 채 신라 침 공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이 백제는 고·수 전쟁과 고·당 전쟁의 영향으로 말미 암아 전쟁 당사국인 고구려와 당의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관심 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신라에 대해 빈번히 무력침공을 감행하였 다. 그리하여 백제는 무왕·의자왕 대에 신라와의 국경지역에 위 치한 크고 작은 여러 성들을 점령하는 국지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부단한 침략전쟁으로 과도하게 군비를 소모시킨 결과, 백 제는 국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끝내는 왕조의 멸망을 자초하고 말 았다.

2) 신라에 미친 영향

제1차 고·수 전쟁 직후인 602년(진평왕 24, 무왕 3) 8월, 신라 는 아막산성(阿莫山城 : 운봉)에서 백제군과 공방전을 전개하여 이를 물리친 데 이어, 변경지역에 새로 축조한 네 성으로 쳐들어 온 백제군 4만 명의 침공을 물리쳤다. 7세기 초부터 시작된 백제 군의 신라에 대한 침공은, 제1차 고·수 전쟁 직후인 600년에 백 제에서 무왕(武王)이 즉위한 이후부터 빈번히 이루어졌다. 고구려 가 고·수 전쟁의 영향으로 인하여 백제와 신라에 대한 무력침공 과 정치적 간섭을 자제하는 상황에서 백제의 신라에 대한 보복적 인 무력침공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제2차 고·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611년 10월에도 백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가잠성(假岑城)을 빼앗겼다. 이는 백 제가 그해 2월에 수에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수 양제가 고구려 침 공을 서두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남 침이 우려되지 않는다는 판단하에 단행한 침공이었다. 한편, 신라도 백제와 마찬가지로 611년에 수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신라에 대한 남침을 중지하도록 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수의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압력 은 백제가 고구려의 남침 위협이 배제된 상황하에서 자유로이 신 라에 대한 공세를 가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줌으로써 오히려 신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그해(611) 10월에 신라 는 백제로부터 가잠성을 공격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제2차 고·수 전쟁(612), 제3차 고·수 전쟁(613), 그리고 제4차 고·수 전쟁(614)이 진행되던 기관과 수 제국 말기 의 혼란이 계속되는 기간 동안 백제가 군사행동을 자제하면서 형 세를 관망하고 있었으므로 나·제 양국의 관계도 잠정적 소강상태 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강상태는 수가 멸망하고 당이 출범하던 618년에 신라 가 백제를 선제공격함으로써 깨어지고 말았다. 이 공격을 통하여 신라군은 611년에 빼앗겼던 가잠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즉각적으로 반격을 개시하여 신라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이는 고 구려가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제반의 군사활동을 자제함에 따라, 고구려의 남침 우려가 없다고 판단한 백제의 대신 라 전략변화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624년 10월에 서쪽 변경지역의 여섯 성을 백제 군에 빼앗긴데 이어서, 626년 8월과 이듬해 7월에 세 성과 주민 3 백여 명을 빼앗겼다. 그후 628년에 가잠성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물리치고 이듬해(629)에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군사력의 열세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에 빈번히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 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신라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당이 적극적으 로 개입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후 신라는 628년(선덕여왕 7)에 북쪽 변경지역의 칠중성(七重城 : 적성)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일 진일퇴를 거듭하는 공방전을 벌였으나, 이후로는 한동안 소강상태 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신라는 백제 의자왕이 대신라 공세를 강화하자 642년 7월에 백제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지역의 40여 성을 빼앗기고, 8월에는 유일한 대당 교통로인 서해안의 당항성(黨項城 : 남양)마저 고구려·백제 연합군에게 실함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 었다. 이에 신라는 당에 이러한 위기상황을 통보하고 이를 타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또한 신라는 같은해(642) 8월 에 백제군이 대야성(大耶城 : 합천)을 점령하자, 왕족 김춘추(金 春秋)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보장왕에게 지원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신라가 점령하고 있는 죽령(竹嶺) 서 북지역의 영토를 고구려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면서 신라의 출병 요청을 거부하였다. 고구려로부터 지원을 거절받은 신라는 이를 계기로 하여 643년 9월부터 대당 외교를 강화하여 당의 중재를 빌려 위기상황을 타개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당 태종이 이듬해 정월에 사농승 상리현상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도 록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이 이 를 거절함으로써 고구려·신라 양국 관계에 있어서 영향력을 행사 하려던 당의 기도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백제의 신라에 대한 침공은 계속되어 신라 국경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645년에 제1차 고·당 전쟁이 발 발하자 신라는 군사 3만 명을 고구려와의 국경지역에 전진 배치하 여 고구려의 배후를 위협함으로써 당군을 지원할 태세를 갖추었 다. 그러자, 이 틈을 타서 신라의 서쪽 국경지역으로 침공해 들어 온 백제군에게 신라군은 중과부적으로 일곱 개의 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이 빈번히 계속되는 상황하에서 설상가상으 로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 으며, 정국이 불안정한 틈을 타서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 등 이 주동이 되어 647년 정월에 선덕여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하 려는 반란사태가 발생하기까지 하였다. 제2차 고·당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648년 3월, 백제의 공세가 재개되자, 신라는 또 다시 요차성(腰車城 : 상주) 등 10여 성을 백제에 빼앗겼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당군의 출 병을 강력히 요청하는 한편으로 백제군에 대한 반격 태세를 갖추 었다. 그리하여 649년 8월에 백제군이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점령하자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은 10여 일 동안 의 분전 끝에 백제군을 격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는 이 전 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대백제 관계에 있어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650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당 고종(高宗)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등, 대당 외교를 크게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더 욱이 친당외교(親唐外交)에 박차를 가하여 그 실현을 눈 앞에 두 기에 이르렀다.

3) 북방민족에 미친 영향

고·수 전쟁이 종식된 이후, 수 제국 내부에서 말기적인 혼란의 양상이 계속되자 다수의 한인(漢人)들은 동란을 피하여 대거 동돌 궐(東突厥)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혼란을 계기로 하여 동돌궐은 중국 동북부와 서북부의 청해성(靑海城)·신강성 (新疆城) 동부지역 일대를 그 영역으로 확보하고, 거란(契丹)·실 위(室韋)·토욕혼(吐谷渾)·고창(高昌) 등 다수의 이민족 집단을 그 영향권 안에 포괄하는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 여 수 제국에 대신하여 당 제국을 창업한 당 고조 이연(李淵)도 기병(起兵) 초기에는 스스로 동돌궐에 칭신(稱臣)하여 그 휘하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동돌궐은 고·수 전쟁 이후 수 제국이 대동란의 소용 돌이에 휘말려들게 되자, 유력한 다수의 군웅 세력을을 개별적으 로 지원하여 중국의 분화(分化)를 조정함으로써 수 말의 혼란을 자신들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는 호기로 삼고자 하 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618년에 당이 건국되어 국내의 통일전쟁 을 전개하자, 동돌궐은 이때부터 태도를 돌변하여 이연군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오히려 당 제국을 와해시키기 위한 침공을 감행 하였다. 그리하여 동돌궐은 620년부터 거의 매년 당에 대한 무력 침공을 거듭하여 당의 변경지역을 압박하였다. 그후, 동돌궐은 당 제국이 중국 대륙의 통일을 완성할 단계에 이르러서도 의연히 그 패자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동돌궐의 추장인 힐리가한(  利可汗)은 626년에 당에서 고조의 뒤를 이어 태종이 즉위하자. 당 의 적대세력인 군웅세력과 연합하여 대부대를 이끌고 당의 수도 장안의 서북 교외에 있는 위수(渭水)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동돌궐의 위세에 압도되어 위수의 동돌궐 진영 에 직접 나아가 힐리가한과 맹약(盟約)하고 예물(禮物)로 회유하 여 그들을 일단 물러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후로 동돌궐에서는 내 분이 발생하여 통치질서가 이완되고 철륵(鐵勒)을 비롯한 제부(諸 部)가 통치권(統治權)에서 이탈하면서부터 세력은 급격히 악화되 었다. 그리하여 동돌궐은 마침내 630년에 당군의 공격을 받아 추 장인 힐리가한이 생포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서돌궐은 당의 서북지역에 위치하여 당과의 중간지역에 동돌궐 이라는 완충세력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당과는 무력충돌을 벌일 기회가 적었으므로 이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대당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서돌궐도 한동안은 수 제국의 위세에 눌려 형세 가 위축되어 있었으나, 수 말의 대동란을 계기로 하여 그 세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당이 건국될 무렵에는 동돌궐과 마찬가지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서돌궐에서도 628년부터 내란이 발생하여 세력이 양분되 는 등, 분열현상이 심화되었다. 더욱이, 이들은 당의 대돌궐 분화 정책(分化政策)에 말려들어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그 세력이 더 욱 쇠약해져 마침내는 당의 지배권 안에 들어가 겨우 자치권을 행 사하는 정도의 약소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돌궐 북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철륵은 동돌궐의 휘하에 예 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돌궐이 내분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동돌 궐의 세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당이 고구려 침공에 전력을 기울이자 당의 서북방 방어 태세에 공백이 생긴 것을 틈타 645년(제1차 고·당 전쟁)에 당의 수도 장안의 북 방 하주(夏州 : 삭방)로 침공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고구려 원정 에 앞서, 이러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서북방 방어태세 를 강화한 바 있었으므로, 철륵의 침공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밖에도 거란(契丹)·해(奚)·말갈(靺鞨) 등은 당군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돌궐과 함께 군대를 파견하여 당을 지원함으로써 대당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한 부족들이었다. 당 제국의 변경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이들 군소 북방민족들은 당과 고구려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하지는 못하였 다. 따라서, 이들 북방민족들은 고·당 전쟁이 전개되고 있던 기 간은 물론, 그 이후로도 당 제국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따 라서, 돌궐과 같이 규모가 큰 북방민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 분의 국방 민족이 고·당 전쟁으로 야기된 정치·군사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당 제국의 기미적 통치(羈 的 統治)에 만족하면서 종족의 생존을 유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