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고·당 전쟁

1. 고·당 전쟁의 원인

1) 당의 대제국 건설 야망

수제국 말기의 동란을 틈타서 군사를 일으킨 당 고조(高祖) 이 연(李淵)은 동돌궐과 '군신관계(君臣關係)'를 전제로 한 동맹을 체결하여 돌궐의 추장을 군왕(君王)으로 섬기면서 그들의 협력을 받아 세력을 신장시키려 하였다. 그후, 618년에 이연이 당왕조를 건국하자, 돌궐은 동맹국이었던 당에 대하여 빈번하게 무력침공을 거듭하였다. 이는, 신흥 한족 왕조인 당이 안정 세력을 구축하기 전에 무력으로 제압하여 한족(漢族)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위를 차 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619년, 동돌궐은 당의 수도 서경(西京 : 장안)을 향하여 진격하 였으나, 도중의 태원(太原)에서 그 추장인 시필가한(始畢可汗)이 사망하자 기수를 돌려 철군하였다. 당은 왕조 개창 이래로 국력을 기울여 각지의 군웅 세력을 제압 하기 위한 통일전쟁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당은 변방지역의 정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동돌궐은 중국 대륙의 북쪽 변경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과거 수 (隋)에 빼앗겼던 지역의 대부분을 회복한 다음, 중원으로 진출할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이때 당은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도중이었으므로 가능한 한 이민족과의 무력대결을 지양하고, 외교적 노력으로 대돌궐 관 계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양대세력간의 이해가 일치되어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소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후, 당에서는 626년에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에 의하여 고조의 차자인 이세민(李世民)이 장자인 황태자(皇太子) 이건성(李建成) 일파를 제거하고, 고조 이연으로부터 제위를 물려 받아 태종(太宗)으로 즉위하는 등, 정국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따 라서, 당은 국내의 제반 여건이 호전될 때까지 북방지역 최대의 위협 세력인 동돌궐과의 무력충돌을 자제하면서 유화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627년에 동돌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당 태종 은 이를 북방으로 세력을 뻗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극비리에 반군세력을 지원하였다. 그 결과, 돌궐은 치열한 내란이 계속된 나머지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기진맥진한 상황에 이르렀 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당은, 630년 초에 행군총관 이정(李靖)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으로 동돌궐 지역을 침공하였다. 이정은 돌궐 지역 내륙으로 진군하여 추장 힐리가한( 利可汗)을 생포하고, 이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북방지역 최대의 위협 요소인 동돌 궐을 복속시켰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고조 이연이 돌궐과 맺었던 군신관계라는 불명예를 씻고, 이를 계기로 이민족과의 전쟁에 더욱 자신감을 가 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은 동돌궐을 제압한 후 또다시 서돌궐과 경계를 접하게 됨으 로써 새로운 강적과 자웅을 겨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 태종 은 638년에 서돌궐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동·서 양부로 분열되 자, 이를 기화로 하여 639년부터 무력으로 압박하였다. 이같이 무 력충돌을 유발한 결과, 642년에는 당의 변경지역으로 쳐들어온 서 돌궐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이 하여, 당은 건국한 지 10여 년 만에 국내의 군웅세력 들과 동돌궐을 완전히 제압하고, 그로부터 다시 10여 년이 경과한 640년에는 서역(西域)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킨 데에 이어서 서돌궐마저 제압하게 되자, 강력한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 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당은 동돌궐과 서돌궐을 제압하는 과정에 서 서돌궐이 장악하고 있던 서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 다. 그리하여 이와 비슷한 시기인 639년 12월에 신강(新疆) 중동 부 지역의 소국(小國)들을 차례로 공격하여 굴복시킴으로써 서역 경영(西域經營)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당이 북방 및 서북방의 동·서 돌궐 세력과 무력대결을 벌이던 무렵에 당의 서쪽 변경에 위치하고 있던 토번(吐蕃)은 그 들과 당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토욕혼(吐谷渾)을 복속시키고 당 과 접경하게 되면서부터 당의 변경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638년 7월, 토번이 당의 서쪽 변경을 침공하자 당은 이부상서 후군집(候 君集)을 당미도(當彌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송주 (松州)에서 접전을 벌였다. 당은 이 전투에서 토번 세력을 격파하고 토번과 혼인관계를 맺 음으로써 당에 복속시켜, 서쪽 변경지방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로써 당의 세력은 서쪽으로 토번지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당의 동북지역에는 유목생활을 위주로 하는 해인(奚人) 과 거란인(契丹人) 집단이 변경을 접하고 있었다. 이들 세력은 태 종 즉위 초부터 스스로 당에 투항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은 태종이 즉위한 후 로 10여 년이 경과한 7세기 중반무렵에 이르러서는 북방 및 서북 방으로 동·서 돌궐, 해, 거란 지역을 지배하고, 서방으로는 토욕 혼, 토번 지역을 세력권하에 두는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 다. 당은 수(隋)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지 불과 20여 년 만에 수가 장악하고 있던 영역을 모두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북쪽과 서쪽 지역의 이민족을 제압하여 이들을 속국으로 거느리는 강성함 을 대내외에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 동북 지역의 최대 강국인 고구려와는 해와 거란 지역을 완충지대로 하 여 대치하는 형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해와 거란의 복속에 이어 곧바로 고구려를 침 공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당이 건국된 이래로 고구려는 적극 적인 외교 활동으로 당에 대하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네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고·수 전쟁 에서 이미 국력이 극도로 피폐한 상황이었으므로 당과의 우호관계 를 강화하여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피전책(避戰策)을 채택하 고 있었다. 당은 고구려의 이와 같은 태도에 만족한 나머지 고구려를 그들 의 속국(屬國)으로 간주하여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였다. 그 결과, 당 태종은 고구려를 무력으로 침공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고구려는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백제와 신라의 변경 을 자주 침공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대당 외교 활동을 강화하면서 당에 고구려의 군사행동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따라서 당은 그들의 속국으로 간주하고 있던 고구려에 대하여 백제와 신라를 더 이상 침공하지 말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가 대당 외교를 강화하여 당의 군 사적 개입을 종용한 사실을 알게 되자, 당의 요청을 일거에 묵살 한 채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고구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킴으로써, 고·수 전쟁으로 말미암아 실추된 한족(漢族)의 권위를 회복하고, 고구려 영토를 장악하여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노출시키게 되었다.

2) 수의 멸망에 대한 보복

당 고조는 수의 고구려 침공 실패의 선례를 거울로 삼아, 고구 려와의 무력충돌을 자제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 하였다. 그러면서도 당 고조는 한족 왕조인 수의 정통을 계승하였 다는 인식을 가지고 622년에 고구려에 사진을 보내어 고·수 전쟁 당시에 발생한 양측의 포로 및 망명자 송환 문제를 제기하면서 고 구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당은 631년에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고·수 전쟁 때 전사한 수군(隋軍) 전몰 장병 들의 유골(遺骨)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위령제(慰靈祭)를 지낸 다 음, 고구려가 세운 승전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 버렸다. 이 경관은 고구려가 고·수 전쟁에서 거둔 그들의 승리를 기념하고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세운 전승 기념물이었다. 당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경과한 640년에 서역의 고창국(高昌 國)을 멸망시킨 후로 이민족 침략 전쟁에 더 한층 확고한 자신감 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당 제국 내부에서는 한족 자존의식 을 바탕으로 한 고구려 침공 욕구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수 제국과 대결하여 수를 멸망하게 한 이민족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화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돌궐·토번·고창 국 등 여러 이민족을 정복하여 대제국 건설 야망의 발로에 따른 단계적 영토확장 계획을 차질없이 추진한 당은, 마침내 고구려를 정복하여 고·수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출시켰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641년에 직방낭중(職方朗中) 진대덕(陳大 德)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고구려 내부의 각종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였다. 진대덕은 각 지방의 지도(地圖)와 성곽(城廓)·군영(軍 營)·봉수(烽燧) 등 군사시설에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는 주요 관 리로서, 628년 영류왕이 보내온 바 있는 고구려 봉역도(封域圖 : 지도)를 근거로 하여 내정(內政)을 은밀히 정탐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고구려에 입국한 진대덕은 '나는 본래 산수(山水)를 좋아하니 귀국의 경치 좋은 곳을 보고 싶다'는 핑계로 고구려 산천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천 지형의 험이도(險易度)를 상세히 파악하였다. 아 울러 고·수 전쟁때 낙오하여 고구려에 잔류한 중국인들을 만나 이들을 위무하면서 그들을 통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 와 같이 고구려의 내부 사정을 면밀히 정탐한 후에 귀국한 진대덕 은 그 결과를 당 태종에게 상세히 보고하였다.

진대덕 : 고구려는 고창국이 당군에 의해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사신 접대를 보통 때보다 융숭하게 하였습 니다.

당태종 : 고구려 영토는 본래 한사군(漢四郡)의 땅이다. 내가 군사 수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반드 시 온 국력을 기울여 이를 구원하려고 할 것이다. 그때 수 로군(水路軍)을 동래(東萊)에서 해로로 평양(平壤)에 이르 게 한다음 육로군(陸路軍)과 합세하여 공격한다면 쉽사리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산동지방이 피폐하여 아직 회 복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그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이와 같이 당 태종은 산동지방의 열악한 경제적 여건으로 말미 암아 전쟁준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곧바로 전쟁 준비 태세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 태종의 고구려 정복 야욕은 더욱 노골화하여 충돌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3) 신라의 대당 원조 요청

신라는 6세기 중엽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 을 탈취한 후,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이 지역 일대를 독점적 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의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획득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하여 중국 대륙의 제국(諸國)과 직접 통교할 수 있는 해상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서해안의 남양만(南陽灣)에 당항성(黨項城)을 쌓아 이를 요새화하고, 대당 교통의 중심 거점으로 삼아 남조(南朝)의 진 (陳)과 북조(北朝)의 북제(北齊)에 사긴을 파견함으로써 이들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유역 독점을 계기로 하여 120여 년간 계속 되어 오던 백제와의 동맹관계가 깨어지자, 그로부터 백제의 부단 한 침공 위협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강 유역을 상실한 고구려도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신라에 대한 무력침공을 강 화하였으므로, 신라는 백제·고구려 양국으로부터 군사적 압력을 동시에 받으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隋)가 중원의 패자로 등장하자, 신라는 적극적인 대수외교(對隋外交)를 전개하였다. 당 시 백제도 고구려의 남침공격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신 라가 한강 유역을 독점한 이후로 백제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 어 있었으므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다시 동맹을 체결할 수 가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신라와 백제는 경쟁적으로 수 제국과의 외교관계를 강 화함으로써 고구려의 침공을 저지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때 백제는 대중국 선린외교를 지속하면서 동시에 고구 려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실리적 양면외교(兩面外交)를 전개하 였다. 그러나 신라는 대중국 외교에 주안을 두고 수와의 관계를 강화 하는 데에 외교적 역량을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제1차 고·수 전 쟁 이후로 10여 년이 경과한 608년에는 고구려 침공을 위하여 수 에 원병을 요청한 데에 이어 611년(진평왕 33)에 또다시 수군(隋 軍)의 출병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냄으로써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 야욕을 자극하여 이듬해(612)에 제2차 고·수 전쟁이 발발하게 되 었다. 이와 같이 수군의 고구려 침공을 유도하여 고구려의 남침기도를 저지하려는 전략은 백제에 의해서도 신라와 동일하게 추진되었다. 백제는 607년(무왕 8) 3월에 좌평(佐平) 왕효린(王孝隣)을 수에 파견하여 수군의 고구려 출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이 같 은 공작이 고구려에 알려짐에 따라 오히려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 과를 가져와 고구려의 남침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 다.

신라는 수가 멸망하고 당(唐)이 건국된 후에도 종래와 마찬가지 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대당외교(對唐外交)를 강 화하였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642년부터 신라에 대한 군사 적 압박을 강화하여 이를 고립무원의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해(642) 7월 이후, 신라는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협공을 받아 대당 교통로의 인후부(咽喉部)에 해당하는 요지는 당항성(黨項城) 이 함락 직전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며, 낙동강 방면의 주요 거 점인 대야성(大耶城 : 합천)이 함락되어 서북지역의 방어선이 경 산(慶山)지방으로까지 대폭 축소되지 않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신라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그해 11월에 왕족(王族)인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보 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동맹과 지원을 요청하였다.

김춘추 : 지금 백제가 무도하게 우리 강역(彊域)을 침범하고 있어, 우리 임금께서 대국(고구려)의 원병을 빌어 이를 설욕하려 고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그 뜻을 대왕(大王)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보장왕 :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땅이다. 너희가 죽령 서북의 땅을 우리에게 반환한다면 원병을 보내 주겠다.

김춘추 : 신이 왕명을 받들어 원병을 빌리러 왔거늘, 대왕께서는 환 란을 구해 줄 생각은 않으시고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달라 하시니 신은 이제 죽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원병 요청을 거절당하자, 이때 부터 대당(對唐) 일변도의 외교정책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643년 9월, 신라는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다음과 같이 삼국의 정세를 설명하고, 당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수십 개 성(城)이 공격을 받았다. 양국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기필코 우 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하여 오는 9월에 대병(大兵)을 일으킬 것으 로 보이는 바, 그러하면 우리나라는 보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에 사신을 보내니, 귀국이 원병을 보내어 구원해 주기 바란다."

신라측 사자의 설명을 통하여 신라가 어려움에 처한 사실을 알 게 된 당 태종은, 사신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으로 신라의 의중을 타진하려고 하였다.

당태종 : 나는 그대의 나라가 양국(고구려·백제)의 침해를 받는 것 을 실로 애처롭게 여긴다. 그래서 자주 사신을 보내어 세 나라의 화합을 주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백제가 곧 이를 번복하고 그대의 나라를 멸망시켜 분할 점령하려는 데에 뜻을 두고 있으니 그대의 나라는 여떠한 묘책(妙策)으 로 멸망의 화를 면하려고 하는가?

사 신 : 우리 국왕께서는 사세(事勢)가 곤궁하고 뚜렷한 계책이 없 어서 오직 위급한 상황을 귀국에 알려서 그 도움을 받아 나 라를 보존하려고 할 따름입니다.

당태종 : 내가 잠시 변경지방의 소규모 군대를 출동시켜 거란과 말 갈의 군대를 이끌고 곧바로 요동(遼東)으로 쳐들어가도록 하면 그대의 나라는 저절로 적의 공격에서 풀리어 1년 동안 은 적의 포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로 군대 가 계속해서 파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리어 더 욱 제멋대로 침략을 자행하여 4개 국이 모두 다 소란해질 것이니 그대들에게 미안한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내가 또 그대에게 수천 개의 중국의 군복과 군기 를 주어 양국의 군대가 쳐들어올 때에 이것을 세워 벌여 놓 으면 저들이 중국군인 줄 알고 반드시 달아날 것이다. 이것 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요(險要)만 맏어서 병기를 수선하지 않고 남녀가 뒤섞이어 놀기만 즐겨하니, 내가 수십 내지 수백척의 선박에 군사를 싣고 은밀하 바다 를 건너 곧바로 백제를 기습하고 싶다. 그러나 그대 나라가 여왕(女王)을 군주로 세워서 이웃나라의 멸시를 받으니, 이 는 주인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므로 해마다 편할 날 이 없는 것이다. 내가 친족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국왕으로 삼게 하고 군대도 함께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나라 가 안정되면 그대들의 자수(自守)에 맡기려는 것이다. 이것 이 세 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이 세 가지 계책중에 어느 쪽 을 택할 것인가 잘 생각해보라.

이와 같이 신라가 대당외교에 주력한 결과, 당은 644년에 사농 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신라에 대한 침공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대막리지인 연 개소문의 반대에 의하여 당의 이러한 요청은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에 당 태종은 3국의 화해 국면을 모색하기 위한 자신의 중재 노 력을 일방적으로 묵살해버린 고구려의 완강한 태도에 분개하고 고 구려에 대한 무력침공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신라가 집요 하게 대당 외교활동을 전개한 결과로서,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야욕을 촉발시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 고·당 전쟁의 경과

1) 제1차 고·당 전쟁

(1) 당군의 침공계획

644년 1월, 고구려로부터 귀환한 당의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 (相里玄奬)은 당 태종에게 고구려의 내정 탐지 결과를 보고하였 다. 상리현장으로부터 고구려측의 강경한 태도를 전해들은 당 태 종은 크게 분개한 나머지 고구려를 응징할 방도를 마련하는 데 부 심하였다. 이어서, 고구려에 파견된 당사(唐使) 장엄(蔣儼)이 연 개소문에 의하여 감금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할 결심을 굳히고 중신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당의 대다수 중신들은 전조(前朝)인 수(隋)가 무리하게 고구려와 의 무력대결을 계속하다가 급기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 사실을 상기하고, 태종에게 고구려 침공 결정을 철회할 것을 건의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 遂良)은 다음과 같이 고구려 원정을 반대하였다.

"폐하께서 깃발을 흔드시면 중국이 평안하고, 눈을 크게 뜨시면 사방의 오랑캐들이 굴복하니 위망(威望)이 매우 큽니다. 이제 바 다를 건너 작은 오랑캐 나라를 정벌하시니, 만약 단기전(短期戰) 으로 승리를 거두면 다행입니다만, 만에 하나 차질이 생기면 폐하 의 위망에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더구나 감정을 앞세워 군사를 일으키면 그 안위(安危)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장(武將)인 태자첨사 좌위솔(太子詹事 左衛率) 이세적 (李世勣)은 다음과 같이 고구려 정벌을 찬성하는 발언을 하였다.

"지난번에 설연타(薛延陀)가 쳐들어왔을 때 폐하께서 이를 추격 하시어 완전히 섬멸하여 하시었으나, 위징(魏徵)의 건의로 중지하 여, 오늘날 그것이 큰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번에 폐 하의 계책대로 토벌을 추진하였으면 북쪽 지방이 편안해졌을 것입 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에 대한 찬반 양론을 수렴한 후에 다음과 같이 이세적의 주전론에 동의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렇다. 그 일은 진실로 위징의 실수였다. 나도 설연타를 섬멸 시키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였으나 이를 나타내지 않았던 것은, 좋은 건의를 막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를 우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저수량은 여러 대신들가 함께 재차 반전론을 주장하면서, 특히 태종의 친정(親征)을 만류하여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저수량 : 천하는 마치 사람의 몸과 같아서 서도(西都)와 동도(東都) 는 심복(心腹)이요, 주현(州縣)은 사지(四肢)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방의 오랑캐는 신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고구려의 죄가 커서 진실로 정벌해야 마땅하지만, 2∼3명의 맹장(猛 將)으로 하여금 4∼5만의 군대를 이끌고 폐하의 위엄을 빌 려 공격하도록 한다면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태자를 새로 책봉하고 그 나이도 어린데 번병(藩屛) 마저 튼튼하지 못함은 폐하께서도 잘 아시는 바입니다. 하 루 아침에 이 안전한 곳을 버리고 요해(要害)의 험(險)을 넘어 천자께서 경솔하게 머나먼 원정길에 나서는 것은 모든 신하들이 매우 우려하는 바입니다.

당태종 : 요(堯)임금이 8명이고 순(舜)임금이 9명이라도 겨울에 씨 앗을 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농사꾼이나 어린아이라도 봄 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나는 것이니, 이는 시기(時機)를 잘 택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대저 하늘에는 시기가 있고, 사람 에게는 공(功)을 세울 기회가 있다. 연개소문은 국왕을 능 멸하고 백성에게 잔학한 정치를 하여 백성들이 목을 빼어 구원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가 멸망할 시 기인 것이다. 반대론자들의 의견이 분분(紛紛)한 것은, 단 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서이다.

당 태종은 이와 같이 대신들의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친정(親 征)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644년 7월 23일에 장작대장(將作大 匠) 염립덕(閻立德) 등에게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로 내려가 4백 척의 선박을 건조하여 군량을 수송할 것을 명령하 고, 이어서 7월 26일에는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으로 하여금 유주(幽州) 및 영주(營州)에 소속된 군사와 거란(契丹)· 해(奚)·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요동지방을 공격하도 록 하였다. 그리고 태상경(太常卿) 위정(韋挺)을 궤운사(饋運使)로, 민부시 랑(民部侍郞) 최인사(崔仁師)를 궤운부사(饋運副使)로 삼아 하북 (河北)지방의 모든 고을을 지휘하여 군량 조달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태복소경(太僕少卿) 소예(蕭銳)에게는 하남(河南)지 방의 여러 고을에 저장해 둔 군량을 해로(海路)로 운반하도록 명 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는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금(白金)을 예물로 바치면서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고 있는 당의 내부상황을 정탐하려 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의 저수량은 고구려가 보내는 예물을 접수하지 말 것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고구려 막리지(연개소문)는 자기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모든 고구려인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면서 그가 바치는 백금을 받는다면, 이것은 마치 뇌 물을 받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당 태종은 저수량의 이와 같은 건읠를 받아들여 고구려가 보내 는 예물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고구려의 사신은 '연개소문이 관 원 50명을 당에 파견하여 태종을 숙위(宿衛)하려 한다'는 뜻을 전 달하면서 재차 태종의 반응을 살피려고 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크게 노하여 다음과 같이 고구려 사신을 질책하 였다.

"너희들은 모두 죽은 고무(高武 : 영류왕)를 섬겨 벼슬을 받았 거늘, 막리지가 임금을 시해해도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이제 도리어 그를 변호하여 우리나라를 기만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 단 말이냐."

이어서 당 태종은 당의 군사적 움직임이 고구려측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고구려 사신 일행을 모두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그해(644) 10월 중순에 태자태부(太子太傅) 방현령(房玄 齡)을 수도 방위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여 도성 방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한 후, 자신은 장안(長安)을 떠나 낙양(洛陽)으로 거동 하였다. 11월 초, 낙양에 도착한 당 태종은 일찍이 우무후장군(右武候將 軍)으로서 수 양제를 따라 고구려 원정에 참전한 바 있었던 전 의 주자사(宜州刺史) 정원숙(鄭元璹)을 소환하여 고구려 원정에 대한 방책을 물었다. 정원숙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요동까지는 길이 멀어 군량 수송이 곤란하며, 고구려인들은 수 성전술(守城戰術)이 뛰어나므로 공격하더라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 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지금 우리의 국력은 전조(前朝)인 수와는 비 교가 안 된다. 그대는 나를 따르기만 하라'고 정원숙의 의견을 일 축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7월 하순 무렵에 선발대로 요동으로 향발한 영주도독 장 검(張儉)은 그로부터 2개월이 경과한 10월에 이르러서도 요동지역 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기에 범람한 요하(遼河)의 강물이 줄어들지 않아서 도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므로, 요서지방에 주 둔하면서 소규모 정찰부대를 요동지방에 파견하여 작전지역의 지 형(地形)·기상(氣象) 등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 주력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장검은 이 기간 동안에 요동지방 지형 의 험이도(險易度)와 군사들이 이용할 식수, 군마(軍馬)가 먹을 풀 등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단순히 장검이 나약하기 때문에 전투를 기피하여 부대가 2개월 동안이나 요서지 방에 지체하고 있는 것이라고 속단하고, 11월에 그를 낙양으로 소 환하여 그 동안의 경위를 추궁하였다. 장검이 2개월 간이나 작전 이 지연된 경위와 함께 요동지역에 대한 정찰 결과를 상세히 보고 하자 당 태종은 크게 만족하여 장검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그를 본 임무에 복귀시켰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그해(644) 11월 하순에 다음과 같이 고구려 원정의 부서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은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 大總管)이 되어, 양자강·회하(淮河)·영(嶺 : 영남·영북)·협 (  : 기주·협주·귀주)지방 소속의 군사 4만 명과 장안(長安) 및 낙양(洛陽)에서 모집한 군사 3천명, 전함 5백척을 거느리고 내 주( 州)로부터 해로를 항해하여 평양으로 항진한다.

태자첨사 좌위솔(太子詹事 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은 요동도 행군 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管)이 되어, 보병 및 기병 6만 명과 난주 (蘭州 : 감숙 난주)·하주(河州 : 감숙 임하) 지역에서 항복해 온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육로로 이동하여 요동으로 나아가되, 수군 과 보조를 함께하여 고구려로 진공한다.

그리고 평양으로 항진하는 장량군의 휘하에는 좌영군(左領軍) 상하(常何)와 노주도독(瀘州都督) 좌난당(左難當)을 행군총관(行 軍總管)으로 배치하고, 다시 그 예하에 장금수(張金樹)·정명진 (程名振)을 총관에 임명하여 수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또한, 요 동지방을 통과하여 육로로 진군하는 이세적군의 휘하에는 예부상 서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을 행군총관으로 배치하여 부대 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644년 12월 초순, 원정군이 유주(幽州 : 북경)에 집결을 완료하 자, 당 태종은 행군총관 강행본(姜行本)과 소부소감(少府少監) 구 행엄(丘行淹)을 파견하여 운제(雲梯)·충차(衝車) 등 각종 공성기 구의 제작사업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이때 당군 진영에는 각 지방 에서 응모해 오는 용사(勇士)들이 줄을 이었으며, 새로이 개발한 각종 공성기구들을 헌납하는 자들도 매우 많았다. 태종인 이들 기 구를 몸소 점검하여, 실전에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뛰어난 성능 의 장비들을 받아들여 원정군 각 부대에 보급하였다. 이와 같이 원정군이 유주에 집결한 가운데에, 원정에 필요한 만 반의 준비를 갖춘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서를 반포하 여 고구려 침공의 당위성과 확고한 승전 결의를 내외에 천명하였 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 간의 도리상 이러한 자를 어찌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있겠는가. 이 제 나는 유주(幽州)·계주( 州) 지방으로 행차하여 고구려의 죄 악을 추궁하려고 한다. 내가 지나가다가 유숙하는 곳에서는 함부 로 백성을 동원하거나 장비를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옛날 수 양제는 백성들을 잔학하게 부린 반면, 고구려 왕은 자 기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수 양제는 혼란한 군대로 단결된 고구려 군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필승의 조건이 있다.

첫 째 : 강대한 국력으로 약소한 나라를 치는 것이다.
둘 째 : 순리(順利)로써 역리(逆理)를 친다는 명분이 있다.
셋 째 : 잘 통제된 군대로 적의 혼란한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다.
넷 째 : 편안한 군대로서 피로한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섯째 : 백성 모두에게 호응을 받는 입장에서, 백성의 원망을 받고 있는 적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가지고서도 이기지 못할 염려가 어디 있겠는가? 이 뜻을 백성들에게 공표하노니, 그 누구도 승리에 대한 의구심을 품 지 않도록 하라.

당 태종은 이 같은 내용의 조서를 반포한 직후, 자신의 영둔처 (營屯處 : 행궁)에 소요되는 각종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도록 함으 로써 전쟁에 임하는 자신의 결의를 나타내었다. 그해(644) 12월 14일, 당 태종은 출정군의 전 부대와 신라·백 제·해·거란에 명령을 내려서 각각의 진군로를 나누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듬해(645) 정월 28일에는 군량 수송 실태를 점검한 결과, 그 실적이 부진하자 감독 태만의 책임을 물어 궤운사 위정(韋挺)을 해임하고, 장작소감(將作少監) 이도유(李道裕)로 하여금 그 임무 를 대신하게 하였다. 당 태종은 이어서 2월 12일 소우(蕭瑀)를 낙양유수(洛陽留守)로 삼아 낙양의 경비 태세를 강화한 후,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떠나 정주(定州 : 하북 정현)로 향했다. 태종은 낙양에서 정주로 이동하던 도중인 17일에 조서를 내려 자신이 정주를 떠난 이후부 터 태자가 국정을 장악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자, 이 에 대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역임한 울지경덕(尉遲敬 德)은 다음과 같이 건의하면서 태종의 고구려 친정(親征)을 만류 하였다.

"폐하와 태자께서 요동지역과 정주에 각각 머무르시면 심복(心 腹) 지역인 장안(長安)과 낙양에 공백이 생겨 양현감(楊玄感)의 반란과 같은 변란이 발생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변방의 하찮은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에는 만승(萬乘) 천자께서 몸소 거동하시지 않고 장수들만 보내어 정벌하여도 짧은 기간 내에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울지경덕의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좌1마군총관(左一馬軍總管)에 임명하여 원정에 참가 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요동도 행군대총관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의 육로군은 2월 상순에 낙양을 출발하여 약 1개월간의 행군 끝에 그달 말경에 유 주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전열을 정비하면서 요하 유역으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3월 9일에 정주에 도착한 당 태종은 그달 19일의 중신회 의 석상에서 고구려 원정에 나서는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피 력하였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영토이다. 수 제국이 네 차례나 군사를 일 으켜 원정을 하였음에도 수중에 넣지 못한 곳이다. 내가 지금 고 구려 정벌에 나선 목적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子弟)들의 원수 를 갚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신하에게 죽음을 당한 왕의 치욕을 씻어 주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천하가 모두 평 정되었으나 오직 이곳만은 아직도 평정되지 않았다. 이에 내가 더 늙기 전에 사대부(士大夫)들의 힘을 빌려 이곳을 공취(攻取)하려 는 것이다. 내가 낙양을 떠난 이후로 오직 고기와 밥만을 먹으면 서도 봄나물을 밥상에 올리지 않도록 한 것은 민폐(民弊)를 끼칠 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당 태종은 그달(3월) 24일에 정주를 떠나면서 손수 활과 화살통을 허리에 차고 우의(雨衣)를 말 안장 뒤에 매달아, 전쟁에 임하는 원정군 장병들에게 모범을 보이었다.

(2) 신성·개모성 공방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管) 이세적(李世勣)이 지휘 하는 당의 육로군은 645년 3월에 영주(營州)의 치소(治所)인 유성 (柳城)을 출발한 후, 표면상으로는 회원진(懷遠鎭)으로 진격할 것 처럼 허장성세하면서 은밀히 진로를 북으로 돌려 용도(甬道)를 이 용하여 고구려군측이 예상하지 못한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당군은 의무려산(醫巫閭山) 서측방을 따라 동북진하여 통정진(通 定鎭)으로 향하였으므로 고구려군측에서는 이를 탐지하지 못하였 다. 뿐만 아니라, 당군은 과거에 수의 육로군이 전통적인 침공로 로 이용하였던 통로상의 요지인 회원진을 경유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군을 기만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 645년 4월 1일, 이세적의 육로군은 통정진으로부터 요하를 도하 한 후, 동진(東進)하여 무순(撫順)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곳은 고구려의 현도군(玄 郡)이 위치하였던 지역으로, 평탄한 개활지 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으므로 원거리에서 군사들이 이동하는 상황도 관측이 가능하여,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요동도 행군총관(遼東道 行軍總管) 이도종(李道宗)은 수천 명으 로 편성된 선두부대를 이끌고 통정진에서 동진하여 무순 근교의 신성(新城)으로 진출하였다. 이 신성은 훈하(渾河) 중류 지역에 설치된 개모주(蓋牟州)의 중심 거점으로 구릉 지대에 축조된 평지 성(平地城)이었다. 따라서, 대부대에 의한 포위공격에는 매우 취 약하여, 부근에 위치한 목저성(木底城) 등과 적극적인 협조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기도 하였다. 제3차 고·수 전쟁이 벌어진 614년 5월에는 수의 좌광록 대부 왕인공(王仁恭)이 지휘하는 별군(別軍)의 공격을 받은 바도 있었 다. 이때 신성의 고구려군은 출성(出城)하여 평지에서 왕인공군과 대치하다가 한 차례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강력한 기 병부대를 앞세워 선제공격을 감행한 왕인공군에 밀려 성안으로 퇴 각하였다. 그후 고구려군은 성안에서 농성작전(籠城作戰)에 들어 가, 7월 초순에 왕인공군이 철군할 때까지 약 1개월 동안 거점을 지탱함으로써 수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러한 전력(戰歷)을 지닌 신성은 왕인공군의 침략을 받은 이래 30여년이 경과한 645년에 이르러 또 다시 이도종군의 침공을 받 고, 이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은 신성의 서측방으로부터 접근하는 이도종군의 강성한 군세를 보고, 일단 피전책을 택하여 농성작전에 들어갔다. 과거 고·수 전쟁 당시 왕인공군과 평지에 서 접전하다가 기병부대의 공격을 받고 패퇴함으로써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던 경험을 거울삼아 처음부터 접전을 회피하고 곧바로 농성작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당의 이도종군은 4월 초순부터 신성 외곽의 주요 도로를 차단하 여 포위태세를 강화하고, 고구려군의 출성공격을 유도하기로 하였 다. 그리하여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曺三良)이 기병 10여 기 를 이끌고 성문에 접근하여 고구려군을 유인하였다. 그러나 신성의 고구려군 수뇌부는 당군이 유인전술로 고구려군 을 성 밖에 끌어내어 평지전(平地戰)으로 제압하려는 기도를 간파 하였다. 그리하여 성 내의 고구려군은 당군과 평지에서 접전할 경 우, 중과부적으로 승산이 희박하여 신성을 빼앗길 경우에는 전국 (戰局)의 대세를 그르칠 염려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당군의 도발 을 아예 외면하고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구려군이 당군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지 않고 굳건한 수성태세 를 견지하자, 양군 사이에는 대치상황만 계속되었다.

그러자, 당의 이도종군은 일부 병력을 신성 남쪽지역에 중점 배 치한 후, 나머지 병력은 4월 15일에 남진을 개시하여 개모성(蓋牟 城)으로 진출하였다. 개모성은 신성과 요동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신성 공략을 포기하고 요동성으로 진로를 돌리던 이도 종군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수의 육로군 주력인 이세적군은 이도종군이 신성을 공략 하는 동안 통정진에서 요하를 건너 개모성을 지향하여 동남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모성의 고구려군은 신성 및 요동성과의 연락이 차단된 가운데 수의 육로군 주력인 이세적군과 신성에서 남진한 이도종군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개모서의 고구려군은 당군의 예기를 둔화시키기 위하여 처음부 터 접전을 회피한 채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에 들어갔다. 전력이 우세한 당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들은 일치단결 하여 당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10여 일간에 걸쳐 수 차례나 전 개된 공방전으로 양군 모두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개모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당군에게 포위되어 후방지원마저 차단된 상황이었으므로 전력의 복구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4월 26일에는 개모성이 당군에게 함락되고, 성 안에서 항전중이던 2만여 명의 고구려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 고 성안에 보관중이던 10여만 섬의 곡식도 당군의 수중에 들어가, 그들의 군량 부족현상을 완화시켜 주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공격을 개시한 지 10여 일 만에 개모성을 함락시킨 요동도 행군 대총관 이세적은 개모성과 그 관할하에 있는 소성(小城)들을 포함 한 부근 일대를 당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개주(蓋州)'라고 명 명하고, 고구려군으로부터 노획한 각종 전리품들을 수습한 다음, 또다시 서남진하여 요동성으로 진출하였다.

(3) 요동성 부근의 전투

645년 4월 말경, 당의 요동도 행군대총관 이세적과 행군총관 이 도종이 지휘하는 6만여 명의 당군은 개모성을 공격한 후, 서남진 하여 요동성 동북쪽 교외에 이르자 요동성에 대한 공격 준비 태세 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이세적의 당군은 앞서 그들이 함 락시킨 개모성의 고구려군보다는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요동지방 제일의 요새인 요동성에 비해서는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독자적으로 요동성을 공격할 전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던 이세적군은 당 태종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인 5월 3일, 당 태종과 원정군 주력부대는 요하 하류지 역의 광범위한 소택지대(沼澤地帶)인 '요택(遼澤)'을 통과하여 곧 바로 요동지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당군이 2백여 리에 달하는 저습지대인 요택을 고구려 침공 경로로 택한 데에는 행군거리를 크게 단축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인마(人馬)와 각종 전투장비를 수레로 운반해야 하는 대규모 부대 로서는 이 요택을 통과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 문에 과거 고·수 전쟁 당시에 수군(隋軍)은 우기(雨期)가 닥치기 전에 서둘러서 요택을 우회 통과하여 요동지역으로 진출하곤 하였 던 것이다. 그러나 당 태종은 곧바로 이 요택을 가로질러 요동지역으로 진 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장작대장(將作大匠) 염립덕(閻立 德)에게 군사와 장비가 통과할 수 있는 가교(假橋)를 건설하도록 지시하였다. 염립덕은 군사들을 지휘하여 늪을 흙으로 메꾸고, 교 량을 가설함으로써 비교적 양호한 이동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당 태종과 원정군 본대가 요택의 지리적 악조건 을 극복하고 지체없이 이 소택지역을 통과하여 요동성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고구려의 보장왕은 요동성에 증원부대를 급파하여 그 위급을 구하고자 하였다. 5월 8일, 국내성(國內城) 등지에서 출발한 보기(步騎) 4만여 명 의 증원군은 이달 중순 무렵에 기병부대를 선두로 요동성 서쪽 교 외에 도착하여 요동성 외곽지역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강화하기 시 작하였다. 한편, 신성(新城)을 공략한 후 서남진(西南進)하여 요동성 서북 방에 주둔하고 있던 행군대총관 이세적은 행군총관 강하왕 이도종 의 건의에 따라 자체 전력만으로 요동성 서쪽 교외에 주둔하고 있 는 고구려군 증원부대를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도종은 신성의 고구려군을 쉽사리 고립시키고,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래로 고구려군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장거리를 행군해 온 고구 려군 증원부대를 간단히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이도종은 불과 4천여 기에 불과한 기병으로 고구려군을 기 습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진중의 막료들은 이와 같은 이도종의 무모한 작전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다.

막 료 : 아군의 병력 수가 적에 비하여 현저하게 적으니, 참호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수비만 하면서, 황제의 행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도종 : 적은 군사의 수효가 많은 것만을 믿고 아군을 가벼히 여기 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며, 장거리를 강행군해 왔으므로 군 사들이 피로해 있는 상태이다. 또 우리가 전군(前軍)에 소 속되어 있으면서 마땅히 적을 격파하여 앞길을 말끔이 소탕 한 다음에 폐하의 행차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거늘, 목 전에 적을 남겨 두어 폐하께 수고를 끼쳐서야 되겠는가.

이에 행군대총관 이세적은 이도종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다고 판 단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도종은 4천여 기의 정예 기 병 부대를 이끌고 요동성 외곽에 주둔한 고구려군 증원부대를 향 하여 공세를 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구려군 증원부대의 진영에서도 그들의 측후방에 위치한 요동성에세 공방전을 벌이기에 앞서 일단 적의 전력을 탐색하고, 그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세적의 당군과 정면대결로 승부를 가름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당 양국군은 각각 정 예 기병부대를 출전시켜 요동성 교외에서 최초의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군의 선봉인 과의도위(果毅都尉) 마문거(馬文擧)는 '강적(强 敵)을 만나지 아니하고서야 어떻게 용사(勇士)임을 과시해 보이겠 는가'라고 호령하면서 군사들을 진두 지휘하여 고구려군 진영으로 짓쳐들어갔다. 고구려군은 당군의 무모한 공격을 이용하여 당군을 유리한 지역 까지 유인해들인 다음에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기로 계획을 세웠 다. 최초로 평탄한 야지(野地)에서 접전이 개시되자, 고구려군은 당군의 저돌적인 공격에 밀리어 잠시 고전하는 듯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군은 당초에 막료들이 우려하였던 바와는 달리 오히려 사기가 충천하여 고구려군 진영 내부로 깊숙히 돌진 하였다. 고구려군은 당군이 그들 진영 내부로 진입하자, 갑자기 공세로 전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당의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 부대가 고결군의 역습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하자, 고구려군은 패주하는 당군 대열의 후미를 추격하여 당군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당군은 장군예 부대가 고구려군의 반격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무 너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하자,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고 퇴각 명령 을 내렸다. 당군이 일거에 물러나자, 고구려군도 일단 추격을 중 지하고 전열을 수습하면서 그들 진영으로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고·당 양국군이 요동성 교외에서 벌인 최초의 접전에 서는 당군이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함으로써 일단 고구려군이 승리하였다. 한편, 당군의 행군총관 이도종은 고구려군과의 초전에서 패퇴한 군사들이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에 막료들을 대동하고 고구려군의 상황에 대한 정찰을 실시하였다. 이도종은 고구려군의 진영이 내 려다보이는 고지에 올라가 적정을 살피던 중, 고구려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경계를 소홀이 한 채 전열 정비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서둘 러 반격을 가하면 쉽사리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 다. 이에 이도종은 효기휘(驍騎衛) 소속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고구 려군 진영을 급습하였다. 그리하여 고·당 양군 사이에는 또 다시 두 번째 전투가 벌어져 혼전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행 군대총관 이세적이 일단의 기병부대를 이끌고 이도종군에 가세하 여 고구려군의 측면을 엄습하자, 고구려군의 진영을 걷잡을 수 없 는 혼란에 휘말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전사자 1 천여 명이라는 막대한 전력의 손실을 입은 채 서둘러 요동성 동남 쪽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정비하면서 형세를 관망하기에 이르렀다.

(4) 요동성 공방전

요동성은 고구려군이 고·수 전쟁 당시에 수군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수성작전(守城作戰)을 성공적으로 전개하여 침공기도를 모두 좌절시킨 바 있는 고구려 제1의 요새였다. 이 요동성은 고구려 영 내에 산재해 있는 60여 개 대성(大城) 중에서도 대륙 방면의 침공 군이 고구려의 수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때마다 이곳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곤 하였다. 요동성은 장방형(長方形)의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분 되어, 각각 1개씩의 외부로 통하는 성문과 내외성을 연결하는 1개 의 성문을 합하여 모두 3개의 성문이 있었다. 따라서, 외부로 통 하는 2개의 성문을 차단하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서 손색 이 없었다. 더욱이 이 성에는 다량의 무기와 50만 석의 군량이 비 축되어 있었으므로, 독자적으로도 장기간의 농성작전을 전개할 수 도 있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제2차 고·수 전쟁(612)과 제3차 고·수 전쟁 (613)을 통하여 수군 대부대의 공성작전(攻城作戰)을 끝까지 무산 시켜 그들의 침공 기도를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성전투(守城戰鬪)에 있어서의 이러한 전통을 지닌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그들이 613년에 수의 제3차 침공을 물리친 이래 30여 년이 경과한 645년에 당군이 침공해 오자, 다시금 결사 항전 의 결의를 가다듬고 결전 태세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의 방어군은 30여 년 동안이나 대규모 전투를 치 루어 본 경험이 없는 군사들로 주력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 서, 수 제국을 멸망시킨 신흥국가인 당의 군대와 공방전을 전개하 는 것에 대해여서는 민(民)과 군(軍)이 모두 적지 않은 부담을 느 끼고 있었다. 한편, 당 태종이 이끄는 원정군 본대는 5월 3일부터 요택의 도 하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7일만인 5월 10일에 도하 를 완료하였다. 당 태종은 전군이 요하를 건너는 데 성공하자, 도 하작전에 사용되었단 각종 장비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불퇴전 (不退轉)의 결의를 나타낸 다음에 부대를 요동지역으로 전개시켰 다. 요동지역에 진입한 당 태종의 원정군 본대는 요동성 교외의 마 수산(馬首山) 일대에 이르러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킨 후, 그간에 전개된 상황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 요동성 근교에서 벌어진 고구려 증원군과의 전투에 따른 논공행상(論功行 賞)을 실시하여 행군총관 강하왕 이도종을 표창하고, 선두에서 용 맹을 떨친 과의도위 마문거를 중랑장(中郞將)으로 승진시켜 공로 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행군총관 장군에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참 형에 처하였다. 이와 같이 상벌(賞罰)의 조치를 마친 당 태종은 전군에 공격준 비 명령을 하달하고, 고구려군이 요동성 주변에 파놓은 참호를 메 꾸고, 각종 장애물들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군사 들이 작업에 동원되었다. 당 태종도 근위기병(近衛騎兵)의 호위를 받으며 요동성 외곽의 작업 현장에 나아가 시종관(侍從官)들과 함 께 몸소 흙을 운반함으로써 군사들의 참호 매몰작업을 독려하였 다. 그리고 조공부대(助攻部隊)로 하여금 요동성 동남쪽 외곽지역 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 증원부대를 고착시켜 차후에 전개될 요동성 공방전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하는 차단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의 주공부대(主攻部隊)는 각종 장애물을 제거하는 지형 평탄 작업을 완료하고, 공성장비(攻城裝備)들을 요동성의 성 벽 바로 앞까지 근접시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당군의 공세에 맞서서 요통성의 고구려 군민들이 완강한 수성전 (守城戰)을 전개함에 따라 고·당 양군 사이에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요동도 행군대총관 이세적의 부대가 공격군의 최선두에서 공격 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요동성으로부터 2백 보(步) 정도의 근거리 까지 접근하여 석포(石咆)·충차(衝車) 등 공성장비들을 대거 동 원하여 주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군의 석포는 돌멩이를 날려보내는 발석기(發石器)로서 최대사 거리가 3백 보에 이르렀다. 당군은 이 석포로 요동성의 성벽 위와 성안의 고구려 군민들을 향하여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석포 공격으로 타격을 입어 저항력이 약화된 지역으로는 충차를 근접히켜 성문과 성벽을 파괴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성벽이 파괴된 곳에는 나무를 높이 세워 누대(樓臺)를 만들고, 거기에 단단한 밧줄을 엮 어서 만든 그물을 매달아 적의 침투를 막았다. 고구려군은 성벽 요소요소에 이러한 차단망(遮斷網)을 장치하였으나, 2백 내지 3백 보 이상이나 비산(飛散)하여 떨어지는 석포 공격의 위력을 당해내 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하여 고구려 군민들을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으며, 당군 은 차단망이 붕괴되어 저항이 약화된 지역에 대하여 충차 공격을 집중하였다. 당 태종은 호위병들의 경호를 받으며 몸소 전투에 가 담하여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당군의 충차 공격이 집중되자, 궁시 (弓矢) 사격으로 이에 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무너져 내린 차단망 을 보수하여 파괴된 성곽의 틈을 메꾸었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 면서 요동성에서는 고구려 군민들의 사상자가 속출하여, 점차로 전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동성 동남쪽 외곽지 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 증원부대는 요동성의 위급한 상황을 구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당군 당군의 완강한 반격으로 말미암아 큰 타격을 입고 지리멸렬 상태에 빠져 있었으므로 요동성의 구원 을 포기한 채 오직 자체 방호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요동성 공방전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게 됨에 따라, 당 태종은 석포와 충차 공격에만 의존하는 공성작전으로서는 단기간에 요동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속전속결을 위한 새로운 전법을 구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 태종은 화공작전(火攻作戰) 으로 요동성에 장치된 다수의 차단망과 각종 방어장비들을 소각시 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5월 하순, 때마침 요동성 쪽으로 남풍(南風)이 거세게 휘몰아치자 이 틈을 타 화공을 가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날쌔고 담력이 있는 정예 군사들이 충차에 곧추세워 놓은 기둥을 타고 올라가 요 동성 서남쪽의 성루(城樓)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남풍을 타고 요 동성의 각종 방어 시설물들을 태우면서 삽시간에 성안으로 번져 들어갔다. 그러자,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전투를 거의 중지하다시피 하고 우선 진화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성내의 모든 군민이 총동 원되어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불길을 잡으려 하였으나, 거센 바 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당군의 석포 공격이 계속되어 제대로 진화 작업을 벌일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성안 깊숙히 불길이 번져 혼 란은 가중되었다. 이와 같이 요동성의 고구려 군민들이 당군에 대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화마(火魔)와 싸우느라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당군의 공성부대가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때 당 태종은 요동 성 성벽 바로 앞까지 접근하여 군사들의 공성전을 독려하였다. 당 군이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진입하자, 화염이 충천하는 가운데 양 군 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 군민들은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당군에 대항하여 혈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시각이 흐를수록 사상자가 늘어나는 가운데에 성의 대부분은 당군이 점령 하였다. 요동성 고구려 군민들은 외부의 지원마저 차단된 고립무원의 상 황에서 고군분투하였으나 당군의 침입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리 하여 고구려 최대의 전략적 요새인 요동성은 당군의 수중에 떨어 지고, 생존한 고구려 군민들은 모두 당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요동성 부근에서의 전투와 요동성 공방전을 통하여 1만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1만여 명의 군사와 남녀 주민 4만여 명 이 당군의 포로가 되었다. 또한, 요동성에 보관중이던 50만 섬의 군량이 당군의 수중에 들어가 그들의 군량난 해소에 크게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고·수 전쟁 이래고 고구려 침공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 되 어 왔던 요동성을 점령한 당 태종은, 고구려 군민들을 위무하고 전향시키기 위하여 군사들에게 포고령을 내렸다. 이는 당군이 고 구려 군민들을 살상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행위를 엄금함으로써 요동성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조치였다. 그리고 요동성을 치소(治 所)로 하는 그 관할지역 일대를 당의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고 요주 (遼州)라고 명명하였다. 한편, 이 무렵에 요동성으로부터 동북쪽으로 1백여 리 떨어진 백암성(白巖城)의 성주(城主)인 손벌음(孫伐音)이 당군 진영에 사 자를 보내어 항복 의사를 통고하여 왔다. 그리하여 당군은 난공불 락의 요동성을 점령한 데에 이어 백암성에서도 자진하여 항복할 뜻을 표명해 오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사기가 충천한 가운데 백암 성으로의 이동을 개시하였다.

(5) 비사성 공방전

645년 2월 말경, 당의 수로군(水路軍)은 육로군(陸路軍)과 함께 유주(幽州 : 북경)에 집결하여 출전 태세를 가다듬었다. 당의 수로군은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평양도 행군대총관에 임 명된 장량(張亮)이 지휘하였다. 그리고 행군총관에는 좌영군(左領 軍) 상하(常何)와 노주도독(瀘州都督) 좌난당(左難當)이 임명되었 으며, 다시 그 예하의 총관(總管)으로는 장금수(張金樹)·정명진 (程名振)이 임명되어, 수로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후, 3월 초순에 유주를 출발한 수로군은 동남진하여 백하(白河) 하구에서 선단을 구성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 북단의 내주항( 州港 : 동래)으로 집결하였다. 그러하여 내주항에는 양자강(揚子江)·회하(淮河)· 영남(嶺南)·영북(嶺北)·기주(夔州)·협주( 州)·귀주(歸州) 지 방 소속의 군사 4만 명과, 장안(長安)·낙양(洛陽)에서 모집한 군 사 3천 명, 전함 5백 척이 집결하게 되었다. 5백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에 분승한 수로군 4만여 명은 3월 중 순에 내주항을 떠나 산동반도 북단 해상의 묘도열도(廟島列島)를 따라 동진하여 요동반도(遼東半島) 남단으로 항진하였다. 이 항로 는 수(隋)의 수로군이 제1차(598), 제2차(612), 제4차(614) 고· 수 전쟁 당시에 이용하였던 전통적인 해상 침공로였다. 그리하여 당의 수로군도 또 다시 이 항로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 었던 것이다. 당의 수로군이 최초의 공격목표로 선정한 비사성(卑沙城)은 요 동반도 남단의 대흑산(大黑山) 산록에 위치한 요새로서, 묘도열도 와 한반도의 서해안을 연결하는 연안 항로의 해상 관문이었다. 또 한, 요동반도의 내륙으로 진출하는 통로상에 위치한 해안 요새이 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의 수로군은 이 비사성을 공취한 다음, 육로군과 합 류하여 요동반도의 여러 요새를 석권하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수도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비사성의 고구려 군민들은 4월 말경에 당의 수로군 선단이 해안 으로 접근하자, 민·군이 총동원되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들 은 비사성이 서문(西門)을 제외한 3면 모두 절벽으로 이루어져 공 격부대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서문 방어에 주력 하였다. 따라서, 당의 수로군 공격부대도 서문을 집중적으로 공격 하여 이를 장악하는 것을 제1단계의 목표로 삼았다. 5월 2일, 평양도 행군대총관 장량은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정 명진(程名振)에게 야음을 이용하여 비사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 다. 정명진은 공격에 앞서서 철저한 주간 정찰을 실시하고, 부총 관(副總管) 왕대도(王大度)에게 선봉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왕대 도는 정예병을 앞장세워 비사성 서문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하였 다. 이때 비사성 서문을 지키던 고구려군은 지형의 이점만을 믿고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다가 야간에 의외의 기습공격을 당하자 제 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서문을 빼앗기고 성안으로 패주하였 다. 뒤이어 당군의 후속부대가 서문으로 밀려들어오자 채 날이 밝 기도 전에 성 전체가 당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당군 대부 대가 성안으로 밀려들어오자, 퇴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저항하 던 고구려인 생존자 8천여 명은 당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군의 평양도 행군대총관 장량은 비사성을 함락하여 요동지역 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자 총관 구효충에게 병력을 나누어 주고, 압록강 어귀로 항진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고구 려군의 대응 태세를 탐지하도록 지시하였다.

(6) 백암성 전투

당 태종이 지휘하는 당군 주력부대는 5월 17일에 요동성을 점령 한 후, 그곳에 수일간 주둔하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28일에는 백암 성(白巖城)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 조정은 요동성이 실함된 직후에 백암성에서 동남쪽으로 3백여 리 떨어진 오골성(烏骨城 : 봉성)에서 군사 1만 명을 긴급 출동시켜 백암성을 지원하도록 조치하였다. 난공불락 요새로 믿어 왔던 요동성이 당군에 함락당하자, 고구려군 진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백암성에서 당군의 진격을 저지한다 는 계획을 수립하고, 오골성의 군사로 이 성을 지원하게 한 것이 었다. 요동성이 당군에게 함락당할 무렵, 백암성의 성주인 손벌음(孫 伐音)은 당군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항복 의사를 표명한 바 있었 다. 그러나 실제로 당군이 백암성으로 진군하자, 백암성주 손벌음 은 당초의 약속을 즉시 이행하지 않고 항복의 시기를 지연시켰다. 따라서, 당군 주력부대는 28일부터 백암성 외곽에 속속 도착하 여 포위태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29일에는 소규모 선봉부대를 성 의 정면으로 접근시켜 성주 손벌음의 진의를 탐지하려 하였다. 이 때 고구려군은 손벌음의 약속과는 달리 성벽에 기치(旗幟)와 창검 (槍劍)을 높이 세우고 성세(城勢)를 과시하였다. 당의 우위대장군 (右衛大將軍) 이사마(李思摩)가 선두에서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성벽 바로 앞까지 접근하자, 고구려군은 궁시(弓矢)에 비하여 사 거리가 긴 강궁의 일종인 쇠뇌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여 이들의 기 선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고구려군의 수뇌가 빗발치는 가운데, 당의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쇠뇌의 살에 명중하여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당군은 혼 란에 빠져 그 대오를 잃은 채로 주장인 이사마를 보호하면서 허둥 지둥 퇴각하여 본진으로 돌아갔다. 이사마가 진두에서 군사를 지휘하다가 고구려군의 쇠뇌에 부상 을 당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당 태종은, 그를 문병하면서 친히 상 처에 입을 대고 쇠뇌의 독소를 빨아주기까지 하였다. 이 소식이 당군 진영에 전파되자, 당군 장병들은 태종의 행동에 크게 감동하 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한편, 오골성에서 백암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출동한 1만여 명의 고구려군은 백암성 동남쪽 2백여 리 지점 연산관(連山關) 일대의 험로에 배목하고 있던 설필하력(契苾何力)의 부대와 조우하였다. 당의 설필하력이 지휘하는 8백여 기의 정예기병이 연산관 일대의 통로를 봉쇄하고 있다가 이 지역을 통과하는 고구려 증원군 선두 부대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가하였으므로 양군 사이에는 치열한 접 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당 양군이 혼전을 벌이는 가운데에 고구려군은 적장인 설필 하력에게 집중공격을 가하여 창(槍)으로 그 옆구리에 부상을 입혀 말에서 떨어뜨려 생포하려 하였다. 주장인 설필하력이 위기에 빠 지자, 부장인 상연봉어(尙輦奉御) 설만비(薛萬備)는 단기(單騎)로 뛰어들어 설필하력을 구출하여 탈출함으로써 고구려군은 생포 직 전에 적장을 놓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초기 접전에서는 고구려군이 당군에 비하여 우세한 전력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당군의 매복부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반격을 개시하자 이번에 는 고구려군 대열의 인마(人馬)가 어지러이 뒤섞이어 혼란한 와중 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간신히 혈로를 뚫고 연산관 일대의 계곡을 빠져나와 당군과 대치하면서 상황의 추이를 관망하게 되었다. 이때 백암성 일대에서는 당 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주력부대가 성의 서북쪽 지근거리까지 접근하고, 이세적의 부대가 성 서남쪽 정면에 육박해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이에 당 태종은 성주 손벌음이 항복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사실에 크게 노하여 '백암성을 정벌하면 성 중의 백성과 재물을 모조리 전사(戰士)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군중(軍中)에 선언하 였다. 그러던 중, 백암성주 손벌음이 또 다시 당군 진영에 사자를 보 내어 항복을 청해 왔다. 당 태종이 백암성주의 항복을 받아들이려 하자, 행군대총관 이 세적은 갑사(甲士 : 무장한 군사) 수십 명을 이끌고 당 태종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장병들이 앞을 다투어 시석을 무릅쓰고 생명을 돌보지 않으며 않으며 용감히 싸우는 까닭은 전리품(戰利品)에 대한 기대 때문입 니다. 그런데 이제 성이 거의 함락되려는 판국에, 어찌해서 지난 번의 약속을 무시하고 저들의 항복을 받아들여서 우리 전사들의 기대를 저버리려 하십니까?"

이에 당 태종은 타고 있던 말에서 얼른 내려 자신이 약속을 번 복한 것에 대하여 깊이 사과하고 다음과 같이 이세적을 타일렀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풀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포로로 잡는 짓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장군 휘 하의 유공자에게는 내 창고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줄 터이니, 이 성 하나만은 용서해 주기 바란다."

이세적과 갑사들은 당 태종의 이 같은 해명을 듣고, 각기 소속 진영으로 물러났다. 이어서, 당 태종이 물가에 장막을 치고 절차에 따라 백암성의 항복을 받아들이자, 성안의 고구려인 1만여 명은 당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당군이 백암성을 무혈로 점령한 결과, 성 내의 생명과 재산은 온전하게 유지될 수가 있었으나, 당은 이 백암성을 치소(治所)로 하는 주변 일대를 암주(巖州)로 개칭하고, 성주 손 벌음을 암주자사(巖州刺史)로 임명하여 이 지역을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후 당군은 백암성에서 또 다시 요동성으로 이동하여 수일간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요동성 서남쪽에 위치한 안시성 (安市城)으로 진출할 태세를 갖추었다.

(7) 안시성 부근의 전투

당 태종이 지휘하는 당군 주력부대는 6월 11일에 요동성을 출발 하여 20일에 그 후미부대가 안시성(安市城) 교외에 도착함으로써 10일만에 이동을 완료하였다. 이 안시성은 안시주(安市州)의 치소(治所)로서 요동반도의 주맥 인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등지고 요동만(遼東灣) 어귀에 위치한 평지성이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요동반도 서남단부의 평야지대를 관할하는 전략적 요충에 해당되어 이곳에는 견고한 요새가 구축되 어 있었다. 6월 20일, 당 태종은 안시성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포위 태 세를 완료하자, 예하 각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그에 따 라 당군 주력부대의 안시성 공격작전이 개시되었고, 안시성의 고 구려 민·군들도 이에 대항하여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南部褥薩) 고혜진(高惠眞)은 당군이 안시성 공격작전을 개시한 다음날인 21일에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휘하의 고구려군과 말 갈병을 포함한 15만의 증원 병력을 이끌고 안시성 동남쪽 근교 일 대에 도착하여 전열을 정비하면서, 결전 태세를 가다듬었다. 그리하여 고·당 양군이 안시성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 에서 당 태종은 장차 고구려의 증원군이 취할 군사적 행동에 대하 여 다음과 같이 예상하였다.

"현재 고연수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 방책을 상정할 수 있다. 즉 병력을 이끌고 곧바로 전진하여 안시성 수비군과 연결하여 보루를 삼고, 고산(高山)의 험지를 점거하고서 성안의 양식을 먹으면서 말갈병을 풀어 아군의 소와 말을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군으로서는 적을 공격한다 해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며, 철수하려 해도 요택(遼澤)의 진흙벌에 길이 막혀 앉아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고연수에게 있어서는 제일의 상책(上 策)이다. 둘째로, 고연수가 성안에 있는 무리를 전부 데리고 야음 을 틈타 달아나는 것이니, 이것은 중책(中策)이 된다. 셋째로 고 연수가 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군에게 접근 해 와서 결전을 벌이는 것이니, 이것은 하책(下策)이 된다. 두고 보라, 저들은 틀림없이 제일 나쁜 하책을 채택할 것이다. 그러하니, 적장이 우리에게 사로잡히는 모습이 내 눈에 선히 보인 다." 한편, 고구려 증원군 대열에 참가한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 는 군중의 연장자로서 자신의 오랜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고 연수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략을 건의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국내에서는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나라 밖 으로는 여러 이민족을 굴복시킨 후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자이니, 이는 천하를 제패할 재능을 지닌 인물일 것이오. 이제 그 가 중국 천하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이곳에 왔으니, 우리는 직접 그들과 맞상대해 싸워서는 아니되오. 아군에 있어서 최선의 방략 은, 군사를 정돈시켜 놓고 접전을 피하면서 지구전(持久戰)을 벌 이는 한편, 기습부대를 나누어 내부내어 적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 하는 것이오. 그리하여 적의 군량이 바닥나게 되어 그들이 우리에 게 싸움을 걸어도 우리가 응전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철군하려 해도 퇴로가 차단되어 자연히 우리가 승리할 수 있게 될 것이오."

그러나 고연수는 고정의의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곧 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안시성으로부터 불과 60여 리 떨어진 지역 으로 진출하여 당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고구려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돌궐 기 병을 고구려군 진영으로 출격시켰다.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아 사나사이(阿史那社爾)는 돌궐 기병 1천기를 이끌고 고구려군 진영 전면으로 진출하여 고구려군과의 교전이 시작되자 고의로 접전과 퇴각을 반복하는 유인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고연수는 당군측의 돌궐 기병이 약세(弱勢)를 보이면서 퇴각을 거듭하자, '당군은 상대하기 쉬운 것들이다'라는 속단을 내리고 전군에게 총력을 기울여 추격전을 감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고구려군은 당군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안심 하고 당군을 추격한 결과, 마침내 안시성 동남방 10여 리 지점까 지 진출하여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서북사면을 의지하여 진지를 편성하고 당군과의 결전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21일 오후, 태종은 작전회의를 주재하면서 주요 지휘관들에게 고구려군을 격파할 수 있는 계책의 건의를 지시하였다. 이에 근신 (近臣)인 장손무기(長孫無忌)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적을 맞아 싸울 때에는 먼저 장병들 의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신이 아군의 진영 을 돌아다니면서 살펴보았는데, 장병들은 고구려군이 몰려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모두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쳐들고 나서면서 희색 이 만연하였습니다. 이는 필승할 군대입니다. 폐하께서는 청년시 절부터 몸소 싸움터에 나가시어 군사를 지휘해 오셨습니다. 그리 하여 장수들이 이제껏 전략을 세우고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모두 폐하께 훌륭한 방책을 여쭙고 그대로 받들어 실행에 옮긴 결과였 습니다. 그러하오니 오늘의 싸움도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여 주시 기 바랍니다."

이에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이 직접 작전 계획을 세우기로 하고, 장손무기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과 함께 기 병 수백 기를 거느리고 지형 정찰에 나섰다. 당 태종 일행은 고구 려군 증원부대의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고지로 올라가 군세(軍勢) 를 관측하고, 다시 지형을 둘러보며 군대를 매복시킬 지점을 비롯 하여, 유사시 진퇴에 적절한 지점들을 일일이 정찰하였다. 이때, 고구려병과 말갈병으로 혼성된 고구려군의 진영은 그 길 이가 무려 60여 리에 뻗쳐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도 한 당 태종은 고구려군의 웅장한 군세에 압도되어 두려운 기색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강하왕 이도종은 태종이 고구려군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태종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고구려는 국력을 온통 이곳에 기울여 우리와 대치하고 있으므 로, 평양의 수비는 반드시 허약할 것입니다. 저에게 정예병 5천 명만 주신다면, 저들의 근거지를 뒤엎어 버리겠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수십만의 대군이라 할지라도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 니다."

그러나 태종인 이도종의 이 같은 계책은 지나치게 무리하고 모 험적인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당 태종 은 위장 전술을 쓰기로 하고, 곧이어 고구려군 진영에 사자를 파 견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고연수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신(權臣)인 연개소문이 제 임금을 시해하 였기에 그 죄를 문책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교전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우리 군 사들이 고구려 땅에 들어왔는데도 말먹이와 군량을 공급해 주지 않기에 몇몇 성을 점령하였을 뿐이다. 고구려가 신하의 예를 다한 다면 우리가 점령한 성을 모두 돌려 주겠다."

당 태종의 이와 같은 서신을 접수한 고구려군 총사령관 북부욕 살 고연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이를 받아들인 나머지, 적정을 오판하여 경계태세를 소홀히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군의 경계태 세는 평소보다도 이완되어 있었다. 당 태종은 21일 밤에 제장들을 소집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할 대 책을 토의한 후,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을 하달하였다.

(1) 이세적은 보병과 기병 1만5천 명을 지휘하여 고구려군 진지 서 쪽 고개에 포진(布陣)한다.
(2)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은 정예병 1만5천 명으로 기습부대를 편성하여 산(△498)의 북쪽에서부터 협곡으로 진출, 고구려군의 후미를 엄습한다.
(3) 나는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은밀히 고구려군 진지 북 쪽의 산으로 올라간다.
(4) 각 군은 북과 나팔소리를 신호로 하여 일제히 나아가 적진을 공 격한다.

그리고 당 태종은 자신이 거처하는 행재소(行在所) 옆에 고구려 군의 항복을 접수할 장소인 수항막(受降幕)을 설치할 것을 담당관 에게 별도로 지시하였다. 22일, 고연수 이하 고구려군 장수들은 서쪽 고개에 포진한 이세 적의 병력이 소수인 것을 확인하고, 단숨에 이를 격멸시키기 위해 군사들을 이동시켰다. 이때 고구려군 진영 북쪽 고지에 올라와 정세를 관찰하고 있던 당 태종은, 고구려군의 후미로 은밀히 우회한 장손무기의 군진에 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북과 나팔을 울리고 깃발을 올리 라'는 신호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당군의 3개 군진에서는 사 전에 약속한 바에 따라 각자 정해진 방향으로 북소리와 함성을 울 리면서 고구려군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연수의 고구려군은 예기치 못한 두 방향에서 공격을 당하여 모두 3면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고연수는 즉각 병력 을 3개 부대로 나누어 당군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이 미처 행동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군진이 혼란에 빠져 부대 를 3개 대로 나누기조차 용이하지가 않았다. 이와 같이 혼란한 상 황에서 때마침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일어나자 고구려군의 전열 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되어 수습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당의 장수인 설인귀(薛仁貴)는 괴상한 복장을 착용하고 함성을 지르며 고구려 진중을 종횡무진하면서 닥치는 대 로 살육을 자행하였다. 당군이 이 틈을 타고 3면에서 포위망을 압 축하면서 고구려군에게 집중 공격을 가하자, 양군 사이에 혼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군의 대부대가 승세를 타고 거세게 밀어붙이 자 고구려군은 더 이상 전열을 지탱하지 못하고 2만여 명의 사상 자를 낸 뒤 패주하였다. 고구려군은 고연수의 지휘하에 안시성 동쪽으로 퇴각하여 산악 을 의지한 채 전열을 정비하면서 서둘러서 반격 태세를 갖추기 시 작하였다. 당 태종은 전군에 명령을 내려 고구려군을 포위 공격하도록 하 였다. 장손무기도 군사들을 이끌고 안시성 동쪽 강에 설치된 교량 을 모조리 철거하여 고구려 증원군의 퇴로를 차단한 다음, 포위 공격에 가담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지자, 23일만에 3만 6천8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당군 진영에 투항하고 말았다. 당 태종은 이들의 항복을 접수하고 고연수·고혜진 이하 3천5백 명의 벼슬아치들에게 무관직을 제수하여 이들을 중국 내륙으로 이동시 키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 다. 그러나 말갈병 포로 3천3백 명은 모조리 구덩이에 생매장하여 처형하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수일간에 걸쳐 전장을 수습한 후, 자신이 부대를 지 휘하면서 머물렀던 육산(六山)을 '황제의 행차가 머물렀던 곳'이 라 하여 주필산(駐 山)으로 개명하고, 3일 동안 잔치를 베풀어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이어서 7월 5일에는 안시성 동쪽 고 개로 군영을 이동시켜 안시성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였 다.

(8) 안시성 공방전

당 태종은 백암성을 점령한 직후인 6월 초순에 행군대총관 이세 적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화를 통하여 안시성 공략 문제를 논의 하였다.

당태종 :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안시성은 지형이 험하고, 성주는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서 연개소문이 정변(政 變)을 일으켰을 때에도 성을 굳게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다 고 한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그를 공격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여 그대로 성을 그에게 주고 말았다고 한다. 반대로, 건안성은 병력이 약하고 군량도 적다 하니, 불의에 기습을 가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먼저 건안 성을 공격하라. 그 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안시성이 바로 병법에 이른바 '공격 하지 않아야 할 성이 있다'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세적 :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아군의 군량은 모두 요동에 비축해 놓고 수송해 옵니다. 그런데 이 제 안시성을 뒤에 두고 건안성에 공격을 집중하다가 만약 고구려군이 아군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한다면 어찌하시겠습 니까? 차라리 안시성을 먼저 공략하는 것만 못할 것 같습니 다. 안시성이 함락될 경우, 아군은 북을 올리며 진군하기만 하면 건안성은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태종 : 그대를 장수로 삼았는데, 내 어찌 그대의 방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쪼록 우리의 과업을 그르치지 말도 록 하라.

이세적의 건의에 따라 안시성을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한 당군은 고연수·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군 증원부대와의 전투가 끝난 후 인 7월 5일에 안시성 동쪽으로 진영을 이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안시성을 공략할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8월 10일에 주력부대의 진영을 다시 안시성 남 쪽으로 옮기고 태종의 총지휘하에서 안시성을 공략할 준비를 갖추 는 데에 주력하였다. 안시성의 고구려군 수뇌부에서는 고연수와 고혜진의 증원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그들만의 독자적인 힘으로서 당군과 정면으로 대 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장기적인 농 성을 통한 지연작전을 전개하면서 적시적절하게 심리전을 구사하 여 당군의 예기를 완화시킨다는 작전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 군민들은 당 태종이 황제로서의 위엄을 과시 하기 위하여 화려한 기치를 앞세운 채 일산(日傘)을 받쳐들고 모 습을 나타낼 때마다 일제히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울리면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다. 당 태종은 안시성 고구려인들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하여 그때마다 크게 노하여 공격을 명하였으나, 난공불 락의 안시성을 쉽사리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행군대 총관 이세적은 '안시성을 점령하는 날에는 성안의 남자들을 모조 리 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호언하여, 당 태종을 위로하곤 하였 다. 안시성의 고구려인들은 당군측이 성을 함락할 경우에 잔인한 보 복을 자행하리라는 소문을 전해듣고 항전 결의를 더욱 새롭게 가 다듬어 당군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수 차례나 계속된 당군의 대 규모 공격을 모두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가 있었다. 안시성 공략작전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당군 진영에서는 고연수 와 고혜진의 건의에 따라 '오골성(烏骨城)을 먼저 공격하여 함락 시키면 평양까지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당 태종도 중론에 따라 난공불락의 안시성 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홀로 이 같은 의견에 반대하면서 태종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천자(天子)의 친정(親征)은 여러 장수들이 나아가 싸우는 것과 는 경우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모험적 요소가 뒤따르는 작전을 채 택하여 요행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재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적의 수효는 아직 10만이나 되는데, 아군이 만약 오골성으로 진군할 경우, 적은 필경 아군의 배후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므 로 먼저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탈취한 다음에 승승장구하여 진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만전을 기할 수 있는 방략입니 다."

결국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이 건의를 받아들여, 오골성을 공격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당초의 계획대로 안시성 공략을 관철시키 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더욱 적극적으로 안시성 공격 작전을 독려하게 되었으나, 안시성의 고구려인들은 당군의 집요한 공격을 번번히 물리쳤다. 그러던 어느날, 안시성에서는 평소와 달리 닭과 돼지들이 우짖 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성밖에까지 울려 퍼졌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당 태종은 행군대총관 이세적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우리가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안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날 로 적어지는 형편인데, 이제 닭과 돼지의 우짖는 소리가 요란하 니, 이는 필시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 놓고 야간에 아군을 기습하 기 위해서일 것이다. 각 부대에 엄명을 내려 경계 태세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

고구려군은 당군이 이와 같이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있는 사실 을 알지 못한 채로 이날밤에 수백 명의 습격조를 편성하여 밧줄을 타고 성벽 아래로 내려와 당군 진영에 야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사전에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당군의 요격을 받아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남겨둔 채 허둥지둥 성안으로 퇴각하고 말았 다. 이후로 고구려군은 일체의 공격행위를 중지하고 오직 성의 방 어에만 전념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안시성의 성곽 높이와 비슷한 규모의 토산(土 山)을 쌓은 다음, 점차로 토산의 흙을 밀어 성벽에 접근시켜서 군 사들이 일거에 성벽을 넘어 들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새로운 공성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토산을 축조할 임무를 맡게 된 강하 왕 이도종(李道宗)은 주야로 성토작업을 계속하여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성안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토산을 쌓았 다. 그러자, 안시성의 고구려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토산과 같은 높 이로 성벽을 증축함으로써 당군이 성안을 감제(瞰制)하는 것을 방 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양군은 경쟁적으로 토산과 성벽을 자 꾸만 높여 나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매일 6·7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 졌다. 당군은 그 부대를 다수의 제대로 나누어 교대로 출격하여 충차(衝車)와 석포(石咆) 공격으로 안시성의 성루(城樓)와 성첩 ((城堞)을 파괴하였다. 그때마다 고구려인들은 성의 파손된 부분 에 신속하게 목책(木柵)을 세워 당군의 등성(登城)을 저지하였다. 결국 당군은 안시성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토산에 의 지하는 것뿐이라고 판단하여 60여 일간 밤낮을 쉬지 않고 연인원 50여만 명을 동원하여 9월 중순경에 거대한 토산을 완성하였다. 이 토산은 안시성의 동남쪽 성벽보다 두어 길 남짓이나 더 높아, 정상에 올라서면 성 안은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공사 책임자인 이도종은 부장인 과의(果毅) 부복애(傅伏 愛)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정상에 진을 치고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면서 안시성의 동남쪽 성벽 을 덮쳐 성벽이 함께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자 고구려군 수백 명 은 일제히 무너진 성벽 틈으로 쏟아져 나와 토산을 지키고 있던 당군을 격멸하고 순식간에 토산을 점령해 버렸다. 고구려군은 토산을 점령하자 그 정상에 참호·목책 등 방호시설 을 설치하여 이를 수비진지의 일부로 만들었다. 따라서, 당군이 막대한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여 구축한 토산은 오히려 당군의 움 직임을 감시하는 고구려군의 망루(望樓)가 되어버린 셈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노한 당 태종은 토산이 붕괴될 때 사사로운 일로 진지를 이탈했던 부복애를 참형에 처하여 수급 (首級)을 진중에 효시하는 한편, 즉각 총공격을 개시하여 토산을 탈환할 것을 엄명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전력을 기울여 3일간이 나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이에 맞서 선전분투한 결과, 당군은 막대한 인원과 장비만을 손실한 채로 끝내 토산을 탈환하지 못하고 말았다. 당 태종은 더 이상 안시성에서 불리한 전투를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9월 18일에 전군에 철군명령을 하달하였다. 요동지 방에는 유난히 겨울이 일찍 닥쳐와 마초(馬草)가 시들고 결빙이 되면 군사와 군마를 더 이상 주둔시킬 수 없었으며, 군량마저 고 갈되어 가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당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서둘러서 철군명령을 하달하였던 것이다. 당군은 철수를 개시하기에 앞서 우선 요동성과 개모성(蓋牟城) 에 소속된 주민 7만여 명을 요서(遼西)지방으로 이주시킨 후, 이 도종이 지휘하는 정예기병 4만 명으로 하여금 부대의 후미를 엄호 하게 하면서 전군이 철군길을 서둘렀다. 이와 같이 당군의 대부대가 철수를 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 시성의 고구려군은 일체 동요하지 않고 오로지 수성(守城)에만 주 력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안시성 성주(城主)가 성루 위에 올라서 서 떠나가는 당 태종에게 송별의 뜻을 표하였다. 당 태종도, 안시 성의 고구려인들이 성주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성을 끝까지 잘 지켜내었음을 치하하는 글과 함께 성주에게 비단 1백 필을 선물하 여 그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 소문에게는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활과 화살을 선물하기도 하였 다. 그리하여 9월 20일에 요하 동안에 당도한 당군 선두부대는 이튿 날(21일)부터 요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당군의 대부대가 요하의 늪지대에 이르자 장손무기가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풀을 베어 다가 바닥에 깔고, 가교를 설치함으로써 인마가 장시간에 걸쳐서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10월 초순, 당군이 요하 지류인 발착수 (渤錯水)를 건널 때에는 눈보라가 몰아쳐서 많은 병사들이 동사하 기도 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것을 애석해하면서 다음 과 같이 탄식하였다.

"만약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이번 출정길에 나서 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 군민이 거둔 이와 같은 승리에 대하여, 고려시대의 역사가인 김부식(金富軾)은 그가 편찬한「삼국사기(三 國史記)」에서 안시성 전투와 성주(城主)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당 태종은 불세출의 명군이었다. 그가 난리를 평정한 공적은 탕(湯)·무(武) 두 왕의 위업과 비교할 수 있고, 나라를 잘 다스 린 업적은 주(周)나라 성왕(成王)·강왕(康旺)의 선정에 비교할 만하다. 용병술로 말하자면, 전략이 무궁하여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 정벌에 있어서는 안시성 전투에서 패 배하고 돌아갔으니, 안시성 성주야말로 비상한 호걸이라 하겠다. 그런데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으니, 이는 마치 양자(楊 子)가 말한 바의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공훈 있는 대신의 이름이 역사에 누락되었다'고 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매우 애석 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2) 제2차 고·당 전쟁

(1) 당군의 침공계획

당군이 제1차 고·당 전쟁에서 실패하고 물러간 이듬해인 646년 5월, 고구려 보장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전년의 무력충돌에 대 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고, 양국간의 관계 개선을 제의하였다. 그 러나 당 태종은 보장왕이 보낸 고구려의 국서(國書) 내용이 무례 하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워 예물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 라, 당 태종은 앞으로 고구려 사신의 입국을 금지하라는 강경한 지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어서 당 태종은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결정하고, 647년 2 월에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다각적으로 토의하도록 하였 다. 이 자리에서 조정의 대신들은 태종에게 다음과 같이 대고구려 전략을 건의하였다.

"고구려는 대부분의 성을 산악지대에 쌓아 놓고 있으므로 단시 일에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폐하께서 친정(親征)을 하셨기 때문에 고구려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겨를이 없었던 데에 이어서 가뭄으로 한재(旱災)까지 겹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일부 의 군대로 번갈아 가면서 자주 고구려를 침공토록 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백성들을 국가 부역에 동원하여 지치게 만든다면, 수 년 안에 민심(民心)이 저절로 이반(離叛)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지방은 싸우지도 않고서도 저절로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당 태종은 647년(보장왕 6, 정관 21)과 648년에 걸 쳐 소규모 정예부대를 수륙 양로로 이동시켜 고구려의 변경지역에 대한 불안을 조성한 후, 그 이듬해(649)에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고구려 전토를 석권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이 고구려 원정군의 부서를 편성 하고 임무를 부여하였다.

청구도 행군대총관(靑丘道 行軍大總管) 좌무위 대장군(左武衛 大 將軍) 우진달(牛進達), 청구도 행군총관(靑丘道 行軍總管) 우무후 장군(右武候 將軍) 이해안(李海岸)… 병력 1만 명을 거느리고 누 선(樓船)을 이용하여 내주(萊州)로부터 해로(海路)를 통하여 요동 반도 남단으로 진출한다.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管)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 적(李世勣), 요동도 행군총관(遼東道 行軍總管) 우무위 장군(右武 衛 將軍) 손이랑… 병력 3천 명에 영주 도독부(營州 都督府) 소속 병력을 합류시켜서 신성도(新城道)를 따라 육로(陸路)를 이용하여 요하 상류지역으로 진출한다.

수로군(水路軍)과 육로군(陸路軍) 모두 수전(水戰)에 익숙한 자를 배치하여 지세(地勢)의 변화에 수시로 대응하도록 한다.

이에 따라, 당군은 647년 5월을 전후한 시기에 육로군이 요하 상류지역의 남소성(南蘇城)을 비롯한 주변 제성(諸城)에 대한 침 공을 단행하기로하고, 수로군은 해상으로 이동하여 7월에 요동반 도 남단의 석성(石城)을 공함한 다음에, 이듬해(648) 4월경에는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류지역의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그 준비작업을 진척시켜 나갔다. 한편, 당 태종은 강남(江南)지방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대 형 병선(兵船) 수백 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송주자사 (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이 선주(宣州)·윤주(潤州)·상주 (常州)·소주(蘇州)·호주(湖州)·항주(杭州)·월주(越州)·태주( 台州)·무주( 州)·괄주(括州)·목주(睦州)·홍주(洪州) 등 12주 의 장인(匠人)들을 총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에 사용될 전선들을 건 조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준비작업이 진행되었다.

(2) 변경지역의 전투

당 태종은 소규모의 수륙 양로군을 고구려의 변경지역에 빈번히 진출시켜 고구려 국내의 혼란을 조성한 다음, 그 뒤를 이어 대규 모의 원정군을 집중투입하여 일거에 고구려 전토를 석권한다는 작 전계획에 따라 고구려의 남북 변경지역으로 원정군을 이동하도록 하였다. 요동도 행군대총관 이세적의 육로군은 일찍이 고·수 전쟁 당시 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시되던 통정진(通定鎭)으로 이동한 다음, 이곳에서 요하를 건너 남소성(南蘇城) 지역으로 진출하였 다. 남소성은 신성(新城)이나 목저성(木底城)에서 북쪽으로 3백여 리 떨어진 평야지대에 위치한 요새로서 주변의 대소(大小) 성곽을 휘하에 두고 광범위한 지역을 관장하는 대 거점이었다. 이 성은 평야지대에 형성된 산악을 배경으로 하여 축조된 것이었으므로 고 구려 북부의 평야지대를 용이하게 관할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당군이 북쪽 변경으로 우회하여 이 남소성 지역을 공격 할 경우, 고구려로서는 군사력을 이 지역으로까지 분산시켜야 하 는 부담을 부담을 안게 되는 셈이었다. 이러한 파급 효과를 노린 이세적의 당군은 647년 5월부터 남소성을 비롯한 주변 제성(諸城) 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남소성 관할 구역 일대의 고구려 군민들은 종래에 그들이 상대 해 오던 북방민족의 소규모 부대가 아닌 당군의 대규모 정예부대 로 예상 외의 공격을 받게 되자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하여 성곽 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공방전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당군에 의해 서 함락되고 말았다. 남소성 지역의 대소 제성을 점령한 이세적의 당군은 이들 성곽 에 불을 질러 이 지역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그들 당군의 군 세를 과시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청구도 행군대총관 우진달이 이끄는 수로군은 5월경에 해 상으로의 이동을 개시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지역인 요동반도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우진달의 수로군은 이세적의 육로군이 북쪽 변경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할 무렵에 요동반도 남단해안에 상 륙하여 작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요동반도 남단은 압록강 하구와 연결되는 지근거리에 해당하 는 지역으로서 고구려군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고구려군은 당의 수로군이 이 지역을 통하여 내륙으로 진 출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당 양군은 1백여 차례의 접전을 치르면서 일진일퇴를 거듭하 였으나, 결국 고구려군이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여 석성(石城)에서 또 다시 당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석성은 요동반도 최남단의 비사성에서 압록강구에 이르는 해안 통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요새로서 해얀 유역 일대에 발달한 평 야 지대를 관장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상으로 이동하는 당 군이 건안성(建安城)과 안시성(安市城) 지역으로 진출한 경우 그 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당군으로서는 병력 및 보급품 지원 을 위해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요충이었다. 그리하여 고·당 양군 은 이미 요동반도 남단에서 1백여 차례의 대소 격전을 치른 후 647년 7월에 또 다시 석성에서 격돌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성의 고구려군은 이미 요동반도 남단에서 당군에게 심 대한 타격을 입고 석성으로 퇴각하였으므로, 증원부대가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당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립무원 의 궁지에 빠진 석성의 고구려군은 한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치 른 끝에 당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석성을 함락시킨 당군은 다시 동으로 진군하여 적리성(積利城) 부근까지 이동하던 도중, 석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서진(西進)하던 고구려 군과 적리성 서쪽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고구려 증원부대 1만여 명은 행군총관 이해안이 지휘하는 당군과 정면으로 격돌하 여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고·당 양군은 평지에서 접전을 벌인 결과, 고구려군이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이 전 투는 당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때 당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더 이상 고구려 내륙지방 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진로를 바꾸어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당은 당초에 그들이 계획한 바대로, 고구려의 변경지 역에 대한 교란작전(攪亂作戰)을 끝마치고 철군하였다.

(3) 박작성 공방전

648년 1월 25일, 당 태종은 고구려 변경지역을 교란시키기 위한 제2단계 작전으로서 해상을 통해 압록강구로 침공부대를 진출시키 려 하였다. 그리하여 청구도 행군대총관에 우무위장군(右武衛將 軍) 설만철(薛萬徹)을 임명하고 청구도 행군총관에 우위장군 배행 방(裵行方)을 임명하여 원정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설만철과 배 형방은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내주항(萊州港)에서 누선(樓船) 과 전함(戰艦)을 이용하여 요동반도 남단의 해안선을 따라 압록강 하구로 진출하였다. 당군은 압록강 하구를 따라 1백여 리 이상 거슬러 올라가다가 압록강 서안의 산악지대에 이르자 일단 항진을 멈추고 군영을 설 치한 다음, 이곳에 주둔하였다. 이 지역은 천산산맥(天山山脈)과 동남쪽으로 대각을 이루면서 형성된 산악의 하단부로서 고구려 박 작성(泊灼城)에서 남쪽으로 불과 6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따라 서, 당군이 이곳에서 60여 리만 북상하여 박작성을 제압하면 곧바 로 압록강을 도하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셈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천산산맥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압 록강으로 유입되는 오골강(烏骨江) 하구의 구릉지역에 강을 끼고 박작성을 축조하여 이를 요새화하였던 것이다. 박작성은 오골강과 압록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함으로써, 요동성-오골성-박작성으로 이 어지는 압록강 이서지역의 주요 통로와 그 이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 성을 거점 으로 전력(全力)을 다하여 압록강 도하를 기도하는 침공군을 도하 직전에 격멸시킨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박작성이 침공군에게 점령당할 경우, 압록강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어 고구려의 정국에 직접적인 영향 을 줄 수 있었다. 또한 당군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박작성을 공격 함으로써 고구려 국내에 미치게 될 파급 효과를 기대하고 648년 (보장왕 7, 정관 21) 4월에 박작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박작성의 성주(城主)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 고 박작성 밖으로 나와 저지선을 구축한 후, 당군의 공격에 맞섰 다. 청구도 행군대총관 설만철은 행군총관 배행방에게 소부손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박작성을 공함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고·당 양군 사이에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병력면에 서 열세에 몰린 고구려군이 성안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요새화된 박작성을 거점으로 장기적인 농성작전에 돌입하였다. 성주 소부손은 이미 당군과의 접전을 통하여 그들의 전력을 충분히 탐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된 박작성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있던 터였으 므로 당군의 입성기도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때 마침 고구 려의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성(烏骨城)·안지성(安地城 : 안시 성)을 비롯한 주변 여러 성으로부터 병력 3만여 명을 규합하여 박 작성을 지원하게 됨에 따라 이들과 당군은 또 한 차례의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고문은 3만여 명의 군사를 2개 부대로 양분하여 당군의 좌우에 서 협공을 개시할 태세를 취하였다. 당군도 이에 대항하여 부대를 좌우로 양분하여 고구려군과 일전을 결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 하여 고·당 양군은 각각 그 부대를 크게 2개 제대로 나누어 접전 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고문이 거느린 고구려군은 단시일내에 여러 성에서 차출 하여 편성한 혼성부대였으므로 효과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결함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황은 시각이 흐를수록 고구 려군에게 불리하게 기울어 급기야는 패퇴하고 말았다. 한편, 당군 도 그들이 당초에 궁극적인 공격의 목표로 삼았던 박작성을 함락 시키지는 못하였으나 압록강구에서 일단 그들의 군세를 과시한 것 만으로서도 고구려의 민심을 교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 하였다. 그리하여 당군은 박작성의 공략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철 수하였다.

(4) 당군의 재침계획

당 태종은 648년 6월에 청구도 행군대총관 설만철의 군대가 압 록강구에서 철군하여 돌아오자, 고구려 변경지역을 교란시킨다는 당초 계획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이에 대한 중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고구려가 이쯤 되면 피폐해졌을 터인즉, 내년에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이를 멸망시키겠다."

이에 대하여 중신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대안을 건의하였다.

"대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이 상을 지탱할 군량이 준비되어야 하는데, 이 막대한 양곡을 소나 말, 수레 따위로 수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군량은 선박을 이용하여 해상으로 수송해야 합니다. 수나라 말엽에 검남 (劍南 : 사천성) 지방만은 도적의 피해가 없었고, 지난번 요동 전 역(戰役)에서도 이곳은 전쟁에 동원되지 않아 백성들이 부유하니, 이곳에 수송 선박의 건조를 부담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그해(648) 7월에 우령좌우부장사(右領左右 府長史) 강위(强偉)를 검남지방에 파견하여 고구려 침공에 필요한 선박의 건조를 지휘하도록 하고, 내주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 裕)에게는 묘도열도(廟島列島) 상의 오호도(嗚胡島)에 군량과 각 종 병기를 비축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서, 그해 8월에는 월주도독부(越州都督府 : 절강 소홍) 및 무주( 州 : 절강 김화)·홍주(洪州 : 강서 남창) 등지의 조선소 (造船所)에서 해선(海船)·쌍방(雙舫) 등 거함 1천1백 척을 건조 하여, 병력 및 물자를 수송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준비가 계속되는 동안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에 대하여 반대한 여론도 없지 않았다. 태종을 보좌하여 당조(唐 朝)의 전성기인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륙하는 데에 크게 기 여한 중신(重臣) 방현령(房玄齡)은 648년 병석(病席)에서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건의서를 올렸다.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위명(威 名)과 공덕(功德)이 이미 족하다 할 것이요, 국토를 개척함도 역 시 멈출 만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또, 폐하께서 한 사람의 중죄 수를 처벌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다섯 번씩 거듭 아뢰게 하는 한 편, 소선(素膳 : 검소한 음식)을 바치게 하고, 음악을 그치게 하 신 것은 모두가 인명(人命)을 중히 여기신 때문에서였습니다. 그 런데 지금 무죄한 사졸(士卒)을 몰아다가 창칼 아래 맡기어 비참 하게 죽게 하는 것은 불쌍하지 아니한 일입니까? 만약 고구려가 신하의 도리를 어긴다면 죽어도 가할 것이며, 백성을 괴롭힌다면 멸하여도 가할 것이며, 미래에 중국의 근심이 된다 하면 제거하여 도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도 저촉되는 바가 없는데, 이제 부질없이 중국을 괴롭혀서 안으로 수(隋)의 치 욕을 씻고 밖으로 신라(新羅)의 원수를 값는다면, 이 어찌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은 크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데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할 것을 허락하여, 파도를 헤치고 나아갈 배를 불태우고, 징발한 군사들을 돌려 보내면, 고구려는 자연히 의지해 올 것이며, 먼곳이나 가까운 곳이 모두 고요하고 평안해질 것입니다."

방현령의 건의가 있은 다음해(649) 5월에 당 태종은 사망하였으 며, 죽기 전에 '고구려 침공을 중지하라'는 유언(遺言)을 남겼다. 이로써 당은 고구려를 재침할 준비를 진행하는 단계에서 모든 계 획을 취소함으로써 고·당 전쟁은 일단 결말을 보게 되었다. 당 태종의 제1차 고구려 침공에 대해서, 고려의 김부식(金富軾) 은 그의 저서「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이러한 대목이 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와 말갈병의 연합군 진영은 그 규모가 사방 60리나 되는 것이었다. 당 태종은 이를 바라보고 두려운 기 색을 보였다.'
또 이러한 대목도 있었다.
…당의 '6군(軍)이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자 대부분이 위세를 떨치 지 못하고 있는데, 척후병이 영공(領空 : 이세적)의 흑기부대(黑 旗部隊)가 포위당했다고 보고하자, 태종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당 태종은 스스로 위험에서 벗어나기는 하였으나, 그처럼 위급 한 상황에서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고 있었음에도, 「신당서(新唐 書)」·「구당서(舊唐書)」, 그리고 사마온공이 저술한「자치통감 (資治通鑑)」과 같은 역사책에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아마도 중국인의 수치라 하여 고의로 숨긴 것이 아니겠는 가?"

3, 고·당 전쟁의 결과

1) 당군의 패전

당 제국은 618년에 왕조를 창업한 이래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당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경과한 630년에 동 돌궐을 제압한 데에 이어서 640년에는 고창국·서돌궐 등을 복속 시키고 서역에까지 그 세력을 뻗치게 되자, 이민족과의 전쟁에 확 고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관계는 점차 새로 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은 동·서 돌궐을 장악함으로써 고조 (高祖) 이연(李淵)이 왕조를 창업할 당시에 돌궐에 칭신(稱臣)하 고 군신관계를 맺었던 치욕을 씻게 되자, 같은 민족 왕조인 수 (隋)가 고·수 전쟁에서 패배한 치욕을 씻기 위하여 대고구려 정 책을 강경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은 고구려 침공을 위한 예비작업으로서 641년에 직 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은밀히 고 구려의 내부 정세와 군사기밀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려에서는 그 이듬해인 642년에 동부대인 연개소문(淵 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대외 강경 노선을 추 구하자 고·당 양국의 관계가 더욱 냉각되어 갔다. 그러던 중, 644년에 고구려가 신라 침공을 중지라하는 당 태종의 요청을 거절 하자, 이후로부터 당의 고구려에 대한 침공 야욕은 더욱 노골화되 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 태종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에 친정하기 로 결심하고, 644년 12월에 원정군을 유주(幽州 : 북경)에 집결시 켜 각종 장비에 대한 점검을 마치자 곧바로 원정길에 올랐다.

요동도 행군대총관 이세적이 거느리는 당의 육로군은 645년 4월 에 요하를 건너 무순지역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성의 고구려군이 유인작전에 말려들지 않고 농성작전 을 맞서자, 당군은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개모성(蓋牟城)으 로 진출하였다. 개모성의 고구려군은 당의 육로군 주력부대의 공 격을 받고 10여 일간의 항전 끝에 패전하여 성곽과 함께 10여만 섬의 군량을 당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후 당군은 5월 중순 무렵에 요동성 교외에서 고구려 증원군 4 만여 명과 접전을 벌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방지역으로 물 러났다. 이세적군은 당 태종이 지휘하는 본군과 합류하여 요동성 공략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양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 되었고, 그 결과 5월 하순에 남풍(南風)을 이용한 당군의 화공(火 攻)으로 말미암아 요동성을 실함하게 되었다.

한편, 평양도 행군대총관 장량(張亮)이 지휘하는 수로군 4만여 명은 해로를 이용하여 4월 하순에 요동반도의 남단에 이르러 5월 초부터 비사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군은 야간 기습공격으로 비사성을 점령한 후, 소규모 부대를 압록강 어귀로 파견하여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 무렵인 5월 29일부터 당의 육로군은 백암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우위대장군 이사마(李思摩)가 고구려군의 쇠뇌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고구려 증원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소규모 정예부대를 이끌고 매복하고 있던 설필하력(契苾何力)도 접전중에 고구려군의 창에 옆구리가 찔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와 같이, 당군은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한때 고전하 였으나, 백암성 성주 손벌음이 자진해서 성문을 열고 투항함으로 써 성이 당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군은 백암성에서 안시성(安市城)을 지향하여 6월 20일경에 안 시성 교외에 도착한 후, 고구려 증원군인 고연수(高延壽)·고혜진 (高惠眞) 부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항복을 받은 후 곧바로 안시성 을 공격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7월 5일에 안시성 근교로 군영을 옮기고 공 격 태세에 들어갔다. 당군 진영에서는 안시성 공격을 앞두고, 건 안성(建安城)을 먼저 공격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세적의 주장 에 따라 8월 10일게 주력군을 다시 안시성 남쪽에 집중시켜 공격 에 전력을 기울였다. 안시성 공략작전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당군 진영에서는 한때 안시성 공략을 포기하고 오골성(烏骨城)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 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손무기의 반대로 당군은 다시 안시성 공략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고·당 양군 사이에는 매일 6회 내지 7회의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당군의 토산(土 山) 축조작업과, 이에 대항하는 안시성의 증축작업이 주야를 가리 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당군은 60여 일 동안 연인원 50여만 명을 동원하여 9 월 중순경에는 안시성 성벽보다도 더 높은 토산을 구축하였다. 그 러나 토산이 붕괴되는 돌발사태가 일어나자, 고구려군은 재'빨리 이를 점령하여 감시소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당군은 오히려 이 토산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안전에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후 당군은 토산을 탈환하기 위하여 연 3일 동안 총력전을 벌였다. 그 러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탈환에 실패하자, 당 태종은 하는 수 없이 9월 18일에 전군에 철군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당군은 마치 7세기 초반에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 요동성 공략작전에서의 실패로 말미암아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안시성 공격의 실패를 통하여 막대한 병력과 장비를 손실하고 서둘러 고구려 영내에서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당군은 철군 도중인 10월 초순에 요하지류를 도 하하다가 기온의 급강하로 수많은 병사들이 동사하거나 동상에 걸 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끝에 가까스로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당 태종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지휘한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것 을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고 친정(親征)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그후 당 태종은 대고구려 전략의 방향을 대폭 수정하여 소규모 적이며 산발적인 무력도발에 의하여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키기 로 하였다. 이에 따라, 647년부터 수륙 양면으로 소규모 군대를 고구려 남북 변경지역에 침투시키고, 이 지역의 여러 성을 공격함 으로써 이들 지역에 대한 긴장을 고조시켰다. 당은 이어서 649년 에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거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고구려 원 정에 사용한 각종 선박과 전선의 건조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649년 5월에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게 되자, 당의 고구려 원정을 위한 모든 계 획의 추진은 중지되고 말았다.

당은 왕조를 창업한 이래, 국내의 대소 군웅세력을 평정하고 변 방의 여러 이민족을 모두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당은 동북방의 강적인 고구려만은 무력으 로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전 국력을 기울여서 전개한 고·당 전쟁을 통하여 당은 겨우 요동성을 비롯한 변방의 몇몇 성채를 공 함하는 정도의 보잘것없는 성과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이해득실(利害得失) 면에서 볼 때, 고·당 전쟁은 결국 당군의 패 전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던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2) 당의 내분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위한 논의를 제기하자, 당의 중신들은 대부분 고·수 전쟁의 실패를 이유로 내세워 고구려 원정 계획을 반대하였다. 특히,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楮遂良)은 당의 정 국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를 우려하면서, 태종의 친정에 의한 고구려 원정의 위험성을 강조하 였다. 그러나 무장인 태자첨사 좌위솔(太子詹事 左衛率) 이세적(李世 勣)은 일찍이 당이 북방의 설연타(薛延陀)와의 전쟁에서 이를 철 저히 섬멸하지 않았다가 후환을 남겼던 선례를 지적하면서 강력한 주전론(主戰論)을 제기하였다. 이데 대하여 당 태종도 이세적의 주장을 지지함으로써 644년 7 월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 원정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 제 국 내부에서는 더 이상 반전론(反戰論)이 대두되지는 않았다. 그 러나 이는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였으며, 반전론과 주전론의 대 립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반전론자들의 불만은 여전히 재연(再燃)될 소지를 남기고 있었다. 그후로 반전론자들은 고구려 원정 자체를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는 않았으나, 태종의 친정(親征)으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은 우려 한 나머지 친정을 만류하는 정도로 자신들의 주장을 피력하곤 하 였다. 반전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군이 제1차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돌아온 이후로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반전론자들의 '친정 불가론(親征 不可論)' 을 수용한 나머지, '친정'을 전제로 한 '대규모 원정'이라는 종래 의 대고구려 전략을 지양하고, 고구려의 남북 변경지역에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내부 불안을 조성하는 교란작전(攪亂作 戰)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당 제국 내부의 반전론자들은 그들의 주장에 의하여 당 태종의 친정이 억제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서 도 주전론자들의 일방적이 독주를 다소나마 견제할 수 있게 되었 다. 그후 648년에 당 태종이 또 다시 고구려를 '친정'할 뜻을 표명 하자, 반전론자들은 이를 반대하여 황제의 '친정'에 따르는 몇 가 지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나, 주전론 그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하지 는 않았다. 그러나 중신인 방현령(房玄齡)은 태종의 친정과 당군 의 고구려 원정을 맹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고구려 원정계획 을 전면적으로 중지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반전론을 주도해 나갔 다. 그러던 중, 649년 5월, 반전론자들은 임종 직전의 당 태종을 설 득하여 고구려 원정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는 유언을 남기도록 함 으로써 당의 고구려 원정계획은 전면 취소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당 태종의 재위기간 동안에 당 제국 내부에서 는 주전론과 반전론이 은연중에 대립되어 정치적 내분으로까지 비 화될 소지를 안고 있었으나, 적어도 당 태종이 사망할 때까지는 표면상으로 노출되지 않았다. 당 제국 초기에 개국(開國)에 참여하여 공로를 세운 바 있는 태 종대의 중신들은 대부분이 뿌리 깊은 세력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귀족집단으로서, 제국 내부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 라서, 당 왕조는 초기에 이들 귀족집단과의 연합정권적 성격에서 탈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착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귀족집단의 뿌리 깊은 세력 기반도 두 차례에 걸친 고·당 전쟁을 고비로 하여 크게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고·당 전 쟁에서의 실패로 말미암아 귀족집단은 그들의 사적 무력집단(私的 武力集團) 구성원인 예속민(隸屬民)을 상실함으로써 종래의 대토 지 경영에 의한 경제적 특권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655년(영휘 6) 10월에 무황후(武皇后)가 고종의 황후로 책봉된 이 후에는 무후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새로운 관료 세력 집단과 첨 예한 대립의 양상을 보여 귀족집단은 정치적으로도 그 세력이 급 격히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귀족집단과 신흥관료 세력간의 대립양상이 뚜렷이 노 출되기 시작하자, 당의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다. 태종의 사후, 불과 30여년이 경과한 7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 제국의 황족과 귀 족집단 및 관료들이 무후를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 집단의 탄압으 로 숙청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사(刺史)·낭장(郎將) 등 수많은 지방관과 수대(隋代) 이래 할거적(割據的)으로 군사력을 유지해 온 이른바 관롱군사귀족(關 軍事貴族)들도 이러한 타격의 여파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종대(太宗代)에 고·당 전쟁을 주도하였던 당의 귀 족집단은 고종대(高宗代)에 이르러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그 명 맥이 쇠퇴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당 제국은 보다 더 강력 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3) 고구려의 국력 약화

고구려는 당이 건국된 지 10여 년이 경과한 631(영류왕 14, 정 관 5)에 동북변경의 부여성(扶餘城 : 농안)으로부터 서남의 요동 만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 이 대고구려 정책을 강경 일변도로 급선회함에 따라 서북 국경지 역의 방위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고구려에서 취한 자구적인 조치 였다. 고구려는 중국 대륙의 군사 대국인 수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여 대항하였다. 따라서, 전후 4차에 걸친 고· 수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는 그 국력이 크게 소모될 수밖에 없었으 며, 그로부터 근 20년이 경과한 636년 무렵에 이르러서도 고구려 는 좀체로 그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고구려는 또 다시 막대한 국력을 기울인 천리장성 축조 공사를 시작하여 전후 16년에 걸쳐 이를 강행함으로써 국력의 피 폐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러던 중, 고구려는 천리장성이 완공될 무렵인 보장왕 4년 (645)에 다시 당군의 침공을 받게 됨으로써 국력을 축적할 여유를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고구려는 645년에 당군의 침공기도를 안시성에서 좌절시키고 이 들을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요동지역의 크고 작은 성곽들이 당군 의 공격으로 함락되는 등, 많은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다. 645년 4월 하순, 10여 일간의 항전 끝에 개모성(蓋牟城)이 함락 되자 2만 명의 고구려인이 포로가 되고, 10여만 석의 군량이 당군 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또한 당군이 개모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를 개주(蓋州)로 명명하여 당의 영토에 편입시킴으로써 고구려는 이 지역 일대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였다. 그 결과, 훈 하(渾河) 중류 이남지역과 태자하(太子河) 중류 이북지역의 영토 가 고구려의 판도에서 이탈되었다. 이어서, 그해(645) 5월에는 고구려가 요동성 공방전에 실패하고 난공불락의 요새인 요동성을 빼앗김으로써 태자하 중류 이남지역 의 영토마저 상실하였다. 당군의 육로군 침공로상에 위치한 강력 한 요새인 요동성의 실함은 고구려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일 찍이 제2차(612) 및 제3차 고·수 전쟁 당시에도 고구려는 수 차 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수군의 공격기도를 저지함으로써 수군에 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던 곳이었다. 고구려가 이러한 전력(前歷)을 지닌 요동성을 645년 5월에 당군 에 탈취당한 것인 비단 군사적 손실 뿐 아니라, 인적·물적으로도 그 손실이 막대한 것이었다. 요동성 전투에서 전사한 민·군은 1 만여 명에 달하였으며, 성이 함락된 후에는 군사 1만여 명과 주민 4만여 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성안에 보관 중이던 50 만 섬의 군량을 미처 소각시키지 못한 채로 당군의 수중에 넘겨줌 으로써 간접적으로 당군의 전력을 강화시켜 준 셈이 되고 말았다. 또한 당이 이 지역 일대에 요동성을 치소로 하는 요주(遼州)를 설 치함으로써 요동지역이 당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요동성 실함에 이어서 당군이 무혈로 점령한 백암성(白 巖城)의 경우에 있어서도, 민·군 1만여 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자 백암성 주변 일대에 암주(巖州)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그들의 영 토로 편입시켰다. 이와 같이, 개모성·요동성·백암성이 차례로 함락되고 그 지역 내의 인적·물적 자원이 당군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고구려는 태 자하의 지류인 소사하(小沙河) 상류 이북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제1차 고·당 전쟁을 통하여 요하의 지류인 태자하 중상류 부근 일대의 광범위한 영토와 이에 소속된 인적·물적 자원을 고스란히 당에 빼앗김으로써 막대한 국 력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그후, 고구려는 647년에 재개된 제2차 고·당 전쟁에서 당군의 화공(火攻)으로 말미암아 남소성(南蘇城)을 비롯한 북쪽 변경의 크고 작은 여러 성과 그 주변 일대가 초토화되는 피해를 입었으 며, 남쪽 변경지방의 여러 성도 당군과의 격렬한 공방전으로 말미 암아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고구려는 전후 두 차례에 걸친 고·당 전쟁에서 당군을 격퇴하 여 이들의 침공기도를 좌절시키는 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 전쟁을 통하여 당군에게 대성 및 소성 10여 개를 빼앗기고, 요 동·개모·백암 세 지역의 주민 7만여 명이 요서지역으로 강제 이 주 당함으로써 막대한 인력손실을 보게 되었다. 또한 전쟁 과정에 서 발생한 사상자를 포함하여 10여만 명이 넘는 요동지역의 인적 자원과 수십만 석의 곡식을 비롯한 각종 물적자원을 당군에게 빼 앗김으로써 국력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고·당 전쟁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쇠진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 고 마침내 668년에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