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고·당 전쟁의 배경

1. 일반정세

1) 당의 건국

614년에 수가 고구려에 대한 제4차 침공을 단행하던 무렵부터 중국의 내전상황이 심화되어 수의 정국은 극도의 혼란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혼란한 중국 내부의 정세를 틈타 북방 변경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 : 당 고조)이 수에 대신하여 천하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617년에 진양(晉陽 : 山西 太原)에서 기병하였다. 수 양제와 이종사촌(姨從四寸)간인 이연은 그 부친인 이호(李虎)의 뒤를 이어 수 왕실에서 수여한 당 국공(唐國公)이라는 작위를 세습하였으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요직에서는 소외되어 있었다. 당국공 이연은 기병한 직후에 가장 먼저 동돌궐(東突厥)에 사자 를 보내어 자신의 기병 사실을 통보하고, 그들과의 선린관계를 유 지하기 위한 동맹을 체결하여 배후로부터의 위협소지를 해소하였 다. 그런 다음, 이연은 617년 7월에 장자 이건성(李建成)과 차자 이세민(李世民)을 대동하고 3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관중지역 (關中地域)으로 진출하였다. 수의 군사적 중심지인 관중지역을 장 악한 이연군은 수군의 완강한 저항속에서도 순조롭게 세력 확장을 거듭하여, 그해 10월에 수도 대흥(大興 : 長安)에 이르렀을 때는 군세의 규모가 20만에 달하였다. 617년 11월, 이연은 20만 대군으로 대흥을 공격하여 쉽사리 이 를 점령하고, 양제의 손자인 대왕(代王) 양유(楊侑)를 괴뢰 황제 로 추대한 다음, 자신은 대승상(大丞相)이 되어 당왕(唐王)의 작 위를 받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당시에 수 양제는 양자강 하구 연안의 강도(江都 : 揚州)에 머 물면서, 정국의 혼란을 외면한 채 강도 대안의 양자강 남안에 있 는 단양(丹陽 : 南京)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 러나 그를 호위하는 친위부대의 군사들은 대부분이 북방 관중지역 출신의 부병으로서 오랫동안 고향을 더나 양제를 수행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양제가 북방의 관중으로 귀환하지 않고 강남지방에 장기적으로 체류하려는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언제라도 기회만 오 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 되고 있는 가운데, 618년 3월에 우문술(宇文述)의 아들 우문화급 (宇文化及)과 우문지급(宇文智及) 등은 양제의 장기적인 강남 체 류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을 선동하여 강도에서 정변(政變)을 일으 켜 양제를 살해한 다음, 양제의 조카인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명목상의 황제인 공제(恭帝)로 추대하고, 우문화급이 대승상(大丞 相)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였다. 수 양제의 피살소식은 그해 4월에 당왕 이연이 점령하고 있던 수도 대흥(大興)에 전달되었다. 그러자, 이연은 대왕 양유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하여 당 왕조(唐王朝)를 건국하니, 이가 바로 당(唐)의 고조(高祖 : 618∼626)이다. 당은 수 왕조의 군사적 중심지인 관중지방을 포함하는 산서(山 西)·섬서(陝西)지방의 중남부 지역과 사천(四川)지방 일대를 중 심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군웅세력들을 차례로 제압하는 통 일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당 고조는 차자인 진왕(秦王) 이 세민(李世民)의 조력을 받아 동정서벌(東征西伐)의 정복사업을 계 속하여 10여 년 동안의 재위기간을 통하여 양호를 비롯한 반란세 력의 대부분을 평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626년, 고조의 뒤를 이 어 이세민이 제위(帝位)에 오르니 그가 태종(太宗 : 627∼649)이 다. 그는 628년에 이르러 반란세력들을 완전히 진압하고 수 왕조 를 계승하여 새로운 한족(漢族)의 통일왕조를 수립하게 되었던 것 이다.

2) 고·당의 초기 관계

당이 건국되던 무렵인 618년 9월, 고구려의 영양왕( 陽王 : 590∼617)이 사망하고 그 아우인 고건무(高建武)가 왕위를 계승하 니, 이가 바로 영류왕(榮留王 : 618∼641)이다. 영류왕은 선왕(先 王)인 영양왕 때에 네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던 고·수 전쟁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영류왕은 고구려가 당면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과의 전쟁을 회피하여 시간적으로 여유를 얻은 다음에, 경제적·군사적으로 피폐한 고구려의 국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책략의 일환으 로서 적극적인 대당 평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619년 2월, 고구려는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의 건국과 고조의 즉위를 축하함과 동시에 고구려에 새로운 국왕이 즉위한 사실을 통보함으로써 이것을 고·당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될 수 있는 계 기로 삼고자 하였다. 한편, 신흥국가인 당 제국도 불안정한 국내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는 당분간 고구려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 아래 고구려의 평화적 접근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당 양국 상호간의 국가적 이해가 일치되자 두 나 라는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교환하면서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당측에서는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612 년의 제2차 고·수 전쟁 이래 수많은 중국인들이 고구려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거나 망명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당측에서는 고·수 전쟁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실추된 중 국인의 명예 회복을 위하여 그 동안 고구려에 억류되어 있던 포로 와 망명자들의 송환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따라 서, 당은 622년에 고·수 전쟁 당시에 발생한 포로 및 망명자들을 상호 교환하는 문제를 고구려에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 고조는 고구려의 영류왕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國書)를 보내어 중국인 포로 송환에 대한 고구려의 협조를 정식으로 요청 하였다.

"내가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천(天)·지(地)·인(人) 삼 령(三靈)의 뜻에 순응하여 만국(萬國)을 회유하니 온 세상을 고르 게 어루만져 일월(日月)이 비치는 곳을 두루 편안케 하노라. 고구 려왕이 요수(遼水) 이동지역을 통치하여 대대로 중국과 우호관계 유지에 노력하니 내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는 바이라. 이제 온 천하가 편안하고 태평하여 사신의 왕래가 자유롭기 이를 데 없도 다. 바야흐로 두 나라의 관계가 화목하여 우의를 돈독히 하고, 각 기 영토를 보전하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다만 수 나라 말 기의 빈번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싸움터에서 각기 그 백성들을 잃 게 되어, 마침내는 가족과 친지가 서로 이산하여 여러 해 동안 이 별의 아픔을 풀지 못하고 있도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 어 의리상으로도 전혀 이상할 바가 없을 것인즉, 이곳(중국)에 있 는 고구려인들을 모두 모아서 곧바로 돌려 보내려 하노라. 바라건 데 왕(王 : 영류왕)은 그곳(고구려)에 있는 중국인들을 송환하여 인자한 사랑의 도리를 다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고구려측에서는 이와 같은 당 고조의 요청에 따라 612년 제2차 고·수 전쟁 이래 고구려 국내에 잔류하고 있던 중국인 수십만 가 운데에서 우선 송환이 가능한 1만여 명을 당으로 돌려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하여 고·당 양국의 우의는 더욱 돈독해지 게 되었다. 당 고조는 624년(영류왕 7, 고조 7) 2월, 고구려에 도교(道敎) 의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 : 신선상)과 도법(道法)을 전 하고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강설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으로 하여금 영류왕에게 '상주 국요동군공 고구려국왕(上柱國遼東郡公 高句麗國王)'이라는 칭호 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백제와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 무왕(武王)에게는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 百濟王)', 신 라 진평왕(眞平王)에게는 '주국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 新 羅王)'의 칭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는, 당이 고구려와의 외교적 접촉과 동시에 문화적인 교류를 통하여 고구려의 환심을 얻음으로써 고구려에 잔류하고 있는 다수 의 중국인들을 추가로 송환하도록 하기 위한 당 고조의 배려에 기 인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정립(鼎立)을 공식화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625)에 고구려는 불교(佛敎)와 도교의 승려들을 당에 파견하여 교법(敎法)을 배우게 하는 등, 양국간의 우호적 분 위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와 같은 대당 평화 외교노선과는 달리 백제 와 신라에 대해서는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양국의 교통로를 봉쇄하였다. 이에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 579∼631)과 백제의 무 왕(武王 : 600∼640)은 626년(진평왕 48, 무왕 27, 영류왕 9)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그들의 대당 교통로를 차단하여 사 신 왕래를 방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경지역을 자주 침범하여 불안을 조성하고 있음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당 고조는 이 해에 산기시랑(散騎侍郞) 주자사(朱子 奢)를 고구려·백제·신라에 보내어 3국이 서로 화해할 것을 종용 하였다. 이에 고구려의 영류왕은 서신으로 백제 및 신라와 화평하 겠다는 뜻을 당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629년 8월에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 여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더 이상 화평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당에서는 626년에 고조가 그의 차자인 이세민(李世民)에 게 선위(禪位)함으로써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불리는 태종의 치세(治世)가 시작되었다. 당 태종이 즉위한 뒤인 628년(영류왕 11) 9월에 고구려의 영류 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어 봉역도(封域圖 : 고구려 지도)를 전달하 는 등, 당과의 선린우호를 위해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대당 평화 외교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런데 당 태종은 631년에 고구려에 사절을 파견하여 고·수 전 쟁에서 죽은 수나라 전몰장병의 위령제(慰靈祭)를 지내고, 고구려 가 세운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을 헐어 버렸다. 따라서, 당의 사절단이 일방적으로 이 경관을 헐어버린 사건은 고구려와 당의 관계를 급속도로 악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는 당의 저의를 의심하게 되었고, 미구에 그들이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단행할 것으로 예상 하고 서둘러 그 대책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631년(영류왕 14) 2월부터 동쪽의 부여성(夫餘城 : 農安)에서 서 남쪽의 요동반도 남단 비사성(卑沙城)까지 1천여 리에 달하는 천 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당은 이 무렵에 서역지방(西域地方)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 었으므로, 그들이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던 640년 무 렵에 이르기까지는 대고구려 정책을 더 이상 강화할 수 있는 여력 이 없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영류왕이 640년 2월 세자(世子) 고 환권(高桓權)을 당에 보내어 태종에게 예물을 바치자, 태종이 세 자 일행을 환대하고 답례로 후한 폐백(幣帛)을 고구려에 보내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천리장성 축성작업이 추진되고 있던 10여 년동안 고· 당 양국간에는 무력충돌이 야기되지 않고 표면상 평화관계가 유지 될 수 있었다.

3) 고·당 관계의 악화

영류왕(榮留王 : 618∼641)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지도층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대제국으로 부상한 당나라와 가능한 한 평화 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642년(영류왕 25, 보장왕 즉위년) 초에 천리장성 축조공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동부대인(東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그해 10월에 정변(政 變)을 일으켜 영류왕과 1백여 명의 중신들을 살해한 뒤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寶藏)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 支 : 일명 태대대로)가 되어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대막리지가 된 연개소문은 그 이듬해인 643년(보장왕 2) 3월에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3교(三敎 : 유·불·도)는 솥(鼎)의 발과 같아 그 하나라도 없 어서는 아니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융성하지만 도교는 그렇지 못하니,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 다. 청컨데 사신을 당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국인(國人)을 가르 치게 하소서."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서(國書)를 당에 보냈 는 바, 당 태종은 이를 받아들여 도사(道士)인 숙달(叔達) 등 8명 과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고구려에 보내주었다. 이와 같이 연개소문 집권 초기에 고·당 양국의 외교정책은 매 우 우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같은 표면상의 조치와 는 달리 고구려 국내의 정변을 틈타 이 기회에 고구려를 정벌하려 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당 태종은 도사 숙달 등을 고구려 로 보낸 직후인 윤 6월에 근신(近臣)인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다 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품고 있던 고구려 침공야욕의 일단을 드러내었다.

당 태종 : 연개소문은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오로지하니 진실 로(그 소행을) 용서할 수 없다. 곧바로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정벌할 수도 있으나, 우리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장손무기 : 연개소문은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대국(大國 : 당)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하고 있습니 다. 폐하께서 좀 더 참고 계시면 그는 스스로 안심한 나 머지 반드시 교만해지고 경계태세가 해이되어 더욱 포악 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할 것인바, 그때에 가서 이를 정 벌해도 때는 늦지 않을 것입니다.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이와 같은 건의를 받아들여 일단 고구려 침공을 보류한 채 전과 다름없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보장왕 에게 '상주국요동군공 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 高句麗王)'의 칭 호를 내리는 등, 고구려를 안심시키기 위한 외교적 조치를 취하였 다.

당시, 신라는 백제의 무력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642년(선덕 여왕 11, 의자왕 2) 7월에 백제의 공격으로 서쪽 국경지역의 40여 개 성을 빼앗기고, 이어 8월에는 대야성(大耶城 : 합천)을 점령당 하여 도독 품석(品釋 : 김춘추의 사위) 장군 내외가 전사하는 등, 백제와의 무력대결에서 열세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에 왕족인 이찬(伊 )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오히려 김춘추를 감금하고, 신라가 점유한 한강유역의 옛 고구려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 곤경에 처한 김춘추는 거짓으로 고구려의 요구를 수락하기로 약속하고,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후 신라는 이 약속을 이행 하지 않았던 바, 그로 인하여 고구려의 침공위협에 시달리게 되었 다. 이에 산라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양면협공을 받아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643년(선덕여왕 12)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당 태종은 644년(보장왕 3) 초에 사농승(司農丞) 상리 현장(相理玄奬)을 고구려에 보내어 다음과 같이 위협하였다.

"신라는 우리나라에 귀의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는 나라이니,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신라에 대한 침공을 중지하라. 만일 또 신 라를 공격한다면 명년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너희 나라를 정벌하겠 다."

이에 고구려의 정치 실권자인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은 상리현장과 회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통하여 고구려가 취하 고 있는 대신라 강경정책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당의 신라 침공중 지 요구를 수락하지 않았다.

연개소문 : 우리가 신라와 틈이 벌어진 지는 이미 오래전부터이다. 지난 번 수(隋)가 (우리 고구려에) 침공해 왔을 때 신라 는 그 틈을 타서 우리 영토 5백여 리를 점령하고 그에 따르는 여러 성읍(城邑)을 모조리 차지해 버렸다. (신라 가) 그 땅을 모두 돌려주지 않는 한 절대로 싸움을 중지 할 수 없다.

상리현장 : 이왕에 지나간 일들을 새삼스럽게 거론해 무엇하랴. 오 늘날 요동의 여러 성(城)들도 원래는 중국의 군현(郡縣) 이었으나 중국은 이를 거론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어찌 고구려만은 옛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가.

사절(使節)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되돌아간 상리 현장은 태종에게 연개소문의 강경한 태도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에 태종은 다음과 같이 그의 견해를 표명하여, 드디어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대신(大臣)들을 해쳤으며, 그 백 성들을 괴롭히고 또 나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으니, 정벌하지 않 을 수 없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그해(644) 7월에 전선 4백 척을 건조하게 하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탐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북(河北) 지방과 하남(河南) 지방의 양곡을 운반하게 하는 등, 본격적인 고구려 정벌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장엄(莊嚴)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연개 소문을 회유하면서 최후 통첩을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당의 전쟁 준비 소식과 최후 통첩을 받은 연개소문은 당과의 무 력충돌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해(644) 9월에 당 태종에게 백금(白 金 : 은)을 예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 조정에서는 '막리 지는 그 임금을 죽이고 9이(九夷 : 동이)에 용납되지 못하므로 이 제 우리가 응징하려 하는데, 그 금을 받아들인다면 마치 곡정(梏 鼎)의 뇌물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결론내리고 백금의 접 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고구려 사신이 다시 '막리지가 관원(官員) 50명을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려고 한다.'고 하여 태종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 다. 그러나 태종은 '너희 무리는 모두 고무(高武 : 영류왕)를 섬 기어 관작까지 얻고도 막리지가 시역(弑逆)하되 (이를) 복수하지 못하고, 이제 또 그를 위하여 이곳까지 와서 말로 대국을 기만하 니 그 죄가 크지 아니한가'라고 꾸짖은 다음 고구려 사신 일행을 모두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당시 고구려에 머무르고 있 던 당의 사신 장엄을 토굴속에 가두고, 대당 강경 정책을 표면화 하기에 이르렀다. 당 태종은 표면적으로는, 그 국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 기 위하여 정벌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명분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연개소문이 당 제국의 황제인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 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를 무력으로 응징하기 위하여 군사력 을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신라가 대당외교의 강화를 통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기미를 보이자, 한반도의 삼국과 중국대륙의 당과 의 관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당이 신라와 제휴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할 태세를 갖추어 가고 있는 가운데, 백제는 고구려와의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나·당(羅唐) 연합세력의 기도를 저지하려 하였다. 따라서, 7세기 중엽의 동아시아 정세는 나·당 세력과 여·제(麗濟) 세력의 대립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나당·여제의 양대 세력 집단으로 재편된 국제적 상 황하에서 양자의 주장격인 고구려(高句麗)와 당(唐)은 특히 첨예 한 대립의 양상을 보이게 됨으로써, 고·당 양국간에는 시시각각 으로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2. 군사적 환경

1) 당의 군사적 능력

(1) 병역제도(부병제의 확립)

당이 건국될 무렵인 7세기 초엽, 중국에서는 군웅(群雄)이 할거 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은 아직 완전한 통일제국을 이룩하지 못하고, 군웅을 제압하기 위한 통일전쟁에 주력하였다. 건국 초기의 당은 수(隋)의 군사적 요충지인 관중(關中)지방을 포함한 산서(山西)·섬서(陝西) 양성 을 근거로 하여 강력한 세력을 갖춘 군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였 다. 그러므로 당은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군웅들과의 대결을 거 치지 않고서는 통일을 성취할 수 없어서 결국 국가의 최우선 과제 를 군사력 강화에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은 건국한 지 10여 년 만에 전국의 군웅들을 모두 제압하고, 태종 2년인 628년에 이르러서는 중원을 통일할 수가 있 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계속된 통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인구가 격 감하고 경제도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전국의 호구수는 수대 (隋代)의 전성기에 비하여 ⅔나 감소되어 3백여만 호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더욱이, 태종 원년인 627년부터 629년에 이르기까지 3 년 동안이나 계속된 흉년으로 국력은 극도로 피폐하게 되었다. 태종을 비롯한 정부의 행정관료들은 이와 같은 난국을 타개하여 수 대의 번영을 재현시키고자 민생 안정에 주력하였다. 이같은 정 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630년에 전국적으로 풍년이 들자, 당의 경제는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것이 전반적인 국정의 안정으로 연결되어 당의 국세는 회복의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하 였던 것이다. 태종의 선정으로 정치·경제 등 제반분야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당은 수의 군제를 계승하여 이를 단계적으로 발전시킨 이른바 부병제(府兵制)를 태종대(627∼649)에 이르러 완비하였다. 부병제는 20세부터 60세에 이르는 장정들을 구성요소로 하였는데, 매 3년마다 거주지역의 절충부(折衝府)에 속하여 병역의무를 담당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사제도인 부병제를 유지한다 는 방침에 따라 농한기(農閒期)에 군사훈련을 받은 군사들에게 수 도 경비와 국경 방어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부병은 자 신의 소속 절충부가 수도 경비 임무를 담당할 차례가 되면 순차에 의해서 수도에 가서 근무하게 될 부대에 편성되어 일정기간 동안 현역에 복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수도 경비 부대는 1개월에 1개 제대가 상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1∼2개월씩 번상(番上)하도 록 하였으나, 부대의 소재지와 수도 사이의 거리가 멀고 가까움에 따라 번상의 횟수에 차이를 두었다. 이 경우, 5백 리를 기본단위 로 하여 수도로부터 5백 리 이내의 지역에 위치한 부대는 5개 제 대를 편성하여 매월 1개 제대씩 번상하도록 하였으므로 결과적으 로는 1년에 2회 이상 번상하는 셈이 되었다. 따라서, 2천리가 넘 는 지역에 위치한 부대의 부병은 12개 제대로 편성하여 매월 1개 제대씩 번상하도록 하였으므로 1년에 1회의 번상을 실시하면 되었 던 것이다. 이 밖에도 부병은 국경 수비라는 또 하나의 주요 임무를 띄고 있었다. 당의 장정은 20세로부터 60세에 이르기까지 40년 기간동 은 1회에 한하여 변방의 요새인 진(鎭)이나 수(戍)에 파견되어 3 년간 국경 수비 근무를 해야 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당은 국경지방에 파견되는 부병의 군비(軍費)와 그 가족의 생계 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방인(防人)이라는 조직을 활용하였 다. 이는 3명의 부병을 1개 조로 1명씩 교대로 국경지방에 파견하 여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되, 국경에 파견되는 1명을 제외한 나머지 두 장정은 노동력을 제공하여 변방에 파견된 부병과 그 가 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한다는 법적인 보장책이었다. 이 밖에도 국 가는 변경에 파견된 부병의 입역(入役)에 대한 대가로서 조(租)· 용(庸)·조(調) 등의 조세 납부 및 부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등 의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부병 상호간 의무 부담의 형평을 유지하 고자 하였다. 당의 부병제는 병적(兵籍)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평상시에는 인력을 최대한으로 농경에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따라, 당은 대규모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에 투입되어야 할 막대한 군사비를 절감할 수가 있었으며, 생산력 을 극대화하여 국가 경제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부병은 평상시에는 절충도위(折衝都尉)를 비롯한 절충부 장령들 의 지휘를 받아서 수도 경비 및 국경 방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 으며, 유사시에는 행군총관(行軍總管)의 지휘·통제를 받아 전투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 부병은 당군 전투부대의 주 력으로서 비교적 우수한 체력을 갖춘 장정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수도에 번상하여 경비임무를 수행하는 위사(衛士)의 경우, 1∼2 개월에 1회씩 교대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일정한 기준 에 의해 선발된 병사들이 위사의 임무를 전담하여 그에 따르는 각 종의 혜택을 누렸다. 당시의 위사 선발 기준은 재산이 많은 자와 신체 조건이 좋은 자를 우선으로 하였으나, 동일한 조건일 경우에 는 정남(丁男)이 많은 호(戶)에서 선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 다. 따라서, 위사는 그 대부분이 비교적 부유한 농민층과 중소지 주층 출신의 장정들 가운데에서 선발되었다.

부병은 수도에 번상하는 임무 외에도 입역(入役) 기간중 1회에 한하여 3년 동안 국경지방의 진(鎭)·수(戍)에 배치되어, 이른바 방인(防人)으로서 국경 수비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진과 수는 병력수의 다과에 따라 상·중·하로 각각 3분되었는데, 대개 상진(上鎭)은 5백명, 중진(中鎭)은 3백명, 하진(下鎭)은 3백 명 이하로 편성되었으며, 수는 진에 비하여 10분의 1정도의 병력 으로 편성되었다. 당 태종대의 진은 450여개, 수는 590여 개로서 전국에 도합 1천여 개의 진·수가 설치되어, 여기에 배치되는 총 병력 규모는 10만여 명 내지 15만여 명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부병은 수도 경비와 진·수의 방어임무 이외에도 해외 출정의 임무를 띄기도 하였다. 이 경우에도 부병은 원정군의 주력 부대가 되어 모병된 병력과 함께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그 주역을 담당하였다. 부병은 농한기에 절충도위의 지휘하에 군사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언제나 상당한 수준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규모 원정시에 급속히 모병된 군사들을 조직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전선지역의 상황이 긴급한 경우에는 기본적인 군사훈련조차도 받지 못한 채 서둘러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결 국 모병된 군사들은 정예부대인 부병을 보조하거나 지원하는 정도 의 제한된 역할을 담당하였다.

(2) 군사조직

당은 건국 직후에 관중(關中)지방을 12도로 분할하고 각 부에 군부(軍府)를 설치하여 표기장군(驃騎將軍)과 거기장군(車騎將軍) 으로 하여금 이를 장악하도록 하였다. 그후 620년에는 12도(道)를 12군(軍)으로 개편하고 12군에 최고 지휘관인 장군(將軍) 1명씩을 배치하였다. 이어, 변방의 정세가 안정되고 중앙집권체제가 공고 해지자 623년에는 12군을 폐지하고 표기장군은 통군(統軍), 거기 장군은 별장(別將)으로 각각 그 명칭을 개정하였다. 그러나 북방 에서 돌궐족의 침공 위협이 가중되자, 625년에 12군을 복구하여 여기에 장군(將軍) 1명과 부장(副將) 1명을 배치하고 그 하위 부 대인 각 방(坊)에는 방주(坊主) 1명씩을 배치하였다. 이어서 636 년에는 통군을 절충도위(折衝都尉)로, 별장의 과의도위(果毅都尉) 로 개칭하고,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다수의 군부(軍府)를 총칭하 여 절충부(折衝府)라고 명명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 초기에는 전국에 총 639여 개의 상설 군부인 절충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260여 개의 절충부가 산 해관(山海關) 이남 지역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다. 당은 무려 630 여 개에 달하는 절충부를 다시 40내지 60개씩 묶어서 16개의 위 (衛)에 분속시키고, 여기에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장 군(將軍)·절충도위(折衝都尉) 등 각급 지휘관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16개의 위에는 다시 그 사령부격인 총부(總部)가 있었던 바, 이것은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총부는 중앙은 물론 지방 에 소재한 부병에 대해서도 모두 군령권(軍令權)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 중앙군(中央軍)과 지방군(地方軍)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 게 되었다. 중앙군은 절충부 병력 가운데에서 순차에 따라 상경한 번상병(番上兵), 즉 위사(衛士)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 방군은 번상하지 않는 부병을 주축으로 구성되었으며, 3년 동안 국경지방에 배치되어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있는 방인(防人) 도 포함하였다. 16개의 위에 분속되어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절충부는 소속 병력의 수에 따라 상부(上府)·중부(中府)·하부(下府)의 3개 등 급으로 구분되었는 바, 상부는 1천2백 명, 중부는 1천 명, 하부는 8백 명으로 편성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각 2백여 명씩 인원을 감소하여 편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개의 절충부 예하에는 병력 2백 명 규모의 하급부대인 단(團)이 소속되 어 있었다. 따라서, 상부의 예하에는 6개 단이 편성되에 있었으 며, 중부에는 5개 단, 하부에는 4개 단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 고 단 아래에는 다시 병력 규모 1백 명의 하급부대인 2개의 여 (旅)가 있었으며, 여 아래에는 다시 병력 50명의 대(隊)가 있었 다. 대 아래에는 10명을 단위로 하는 5개의 화(火)가 편성되어 있 었는데, 매 화마다 6필(匹)의 군수품 수송용 군마(軍馬)가 배치되 어 있었다. 절충부의 병사인 부병(府兵)은 20세에서 60세까지로 연령이 제 한되어 있었으며, 군역(軍役)에 종사하는 대가로 균전제(均田制) 에 의거, 17결(結)의 토지를 받을 수가 있었다. 신체가 건강하고 기사(騎射)에 능숙한 부병의 경우에는 기병인 월기(越騎)로 선발 될 수가 있었으나, 그 밖에는 모두 보병(步兵)·무기(武騎)·배찬 수(排 手)·보사(步射) 등으로 분류 편성되었으며, 구성원의 대 부분이 평상시에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절충부의 최고 지휘관인 절충도위는 농한기인 겨울철을 이용하여 부병을 소집,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유사시의 병력수요에 대비할 의무를 지 니고 있었다. 모든 절충부에는 최고 지휘관인 절충도위(折衝都尉) 1명을 두 고, 그 아래에 좌우과의도위(左右果毅都尉) 각 1명씩을 두어서 절 충도위를 보좌하도록 하였으며, 그 밖에 장사(長史)·병조(兵 曹)·별장(別將) 각 1명씩과 교위(校尉) 6명이 있었다. 그리고 각 단에는 교위, 각 여에는 여수(旅帥), 각 대에는 대정(隊正), 각 화에는 화장(火長)을 두어 휘하의 군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병력규모가 1천 명으로 되어 있는 절충부 중부는 절충도 위 1명, 교위 5명, 여수 10명, 대정 20명, 화장 1백 명으로 지휘 체계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 편성이었다. 한편, 당군은 기병을 중요시하여 부병 가운데에서 기마(騎馬)와 궁시(弓矢)사격에 능숙한 자들을 선발하여 기병인 월기로 편성하 였다. 기병을 위주로 편성된 북방민족과의 전투를 위하여 편성된 월기는 부병 중에서도 최정예부대로서 항상 공격대열의 선봉에 서 서 활약하였다. 북방민족이 기병 일변도의 공격전술을 구사한 반 면에, 이에 대응하는 당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혼성부대를 편성하 여 각각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제 압할 수가 있었다.

(3) 부병의 장비

부병은 활 1개, 화살 30개, 횡도(橫刀), 호록(胡祿), 여석(礪 石) 등의 장비와 맥반(麥飯) 9두(斗), 미(米) 2두를 모두 자비(自 費)로 마련하여 평상시에 지정된 무기고에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 다. 수도 경비를 위하여 번상할 때는 활·화살·횡도만을 휴대하 였으나, 출정시에는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장비를 모두 반 출하여 이것으로 무장을 하였다. 공유장비(公有裝備)로서는 10명 단위로 편성된 화(火)에는 오포 막(烏布幕)·철마우(鐵馬盂)·포조(布槽)·삽(揷)·곽( )·착(鑿 )·대( )·광(筐)·겸(鉗)·거(鋸) 각 1개와 갑상(甲狀)·겸(鎌) 각 2개씩이 있었으며, 50명을 단위로 한 대(隊)에는 화찬(火鑽)· 흉마승(兇馬繩) 각 1개와 수기(首羈)·족반(足絆) 각 3개씩이 확 보되어, 각 화에 6필씩 배치된 군마(軍馬)를 이용하여 이를 수송 하도록 하였다. 기타 공성장비와 같은 대형 무기류들은 대부분 전 투지역의 여건에 따라 현지에서 제작하여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는 데, 이는 수송상의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4) 동원능력

당은 이민족(異民族)을 상대로하는 대규모 전쟁을 계획할 경우, 총 병력 60여만인 부병 가운데에서 외정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최대한으로 30∼40여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는 수도를 경비하는 위사(衛士)와 국경지역 수비임무를 담당하는 방인(防人)을 포함한 20만 내지 30만 명의 병력을 제외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별도의 모병계획에 따라 필요한 병력을 추가로 징집하 여 부병의 수적 부족을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은 여기에서 소요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징집방법을 명목상으로 모병이라 하 였으나, 실제로 이것은 강제적 수단에 의한 장정 징발제도였다. 그 선발기준도 재산 소유 정도와 신체 조건등을 최우선적인 조건 으로 고려하였다. 이러한 여건하에서 당 제국이 7세기 중엽에 고구려 침공에 최대 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주로 하북지방의 군사들이었던바, 그 수는 1백여만 명에 이르렀다.

2) 고구려의 군사적 능력

고구려는 수 제국의 제2차 침공(영양왕 23, 양제 8) 이후로 제4 차 침공(영양왕 25, 양제 10)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 모두 양제가 진두 지휘한 수의 침공군을 물리쳤다. 그 결과, 수는 정치·경제 등 국정 전반의 파탄으로 전국이 내란에 휩쓸리면서 멸망하게 되 었고, 고구려는 군사강국 수의 침공을 모두 물리쳤다는 점에서 국 제적 지위의 향상과 함께 국민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당시 중국 대륙 4백여 년의 분열 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하여 마감하고, 대제국으로 성장한 수 제국과의 싸 움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수를 계승한 당 제국의 침공위협에 대해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의 마지막 침공(614)을 물리친 후로 16년이 경과한 631년(영류왕 14)에 당의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대수전쟁(對隋戰 爭)의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훼손하여 고·수 전쟁에 대한 당 제 국 감정의 일단을 노출시켜면서부터 고구려측의 군사적 대비책이 강구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 영류왕은 그해 2월부터 백성들을 동 원하여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공사에 착수하였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요하 이동 지역에 요하를 따라 축조되었는 데, 요동지역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요동성(遼東城)을 중심으로 하여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당군의 제1차 침입 직전인 644 년(보장왕 3)에는 13년이 경과하여 공사가 크게 진척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고·수 전쟁에서 뛰어난 수성전술(守城戰術) 로 수군(隋軍)을 물리쳤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위에, 거의 마 무리 단계에 들어간 천리장성이 새로운 방어시설로 등장하였으므 로 당의 군사적 위협에 대하여서도 확고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 다. 그리고 고구려는 고·수 전쟁 이전부터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던 2백여 개의 대성(大城)과 소성(小城)에 20만 내지 30만 명 수준의 상비군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10여만 명 이상을 기병으 로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병력은 주로 대성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지역방위를 담당하였다. 적의 침공을 받으면 민(民)과 군(軍)이 요새화된 대성에 집결하 여 굳게 성을 지키고, 주변의 다른 성의 지원을 받아 침공군의 측 면을 기습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당과 같이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침입해 오는 경우에는 독자적인 수 성전술로 고립방어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수도 평양을 중 심으로 한 후방지역에서 전방지역으로 지원할 수 있는 군사는 5만 내지 10만 명 수준이었다. 따라서, 당의 침공을 받던 7세기 중엽, 고구려의 군사력은 20만 내지 30만 명 수준의 상비군을 주력으로 하고, 30여 년 전 고·수 전쟁에서 얻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천리장성의 완성단계에 이르 러 더 한층 고조됨으로써, 고·수 전쟁때보다 향상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