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수 전쟁의 배경

1. 일반정세

1) 동아시아의 정세

(1) 중국 대륙의 정세

중국 대륙에서는 5세기 초, 화북(華北)의 북위(北魏)와 강남(江南)의 송(宋)이 대립하 면서 150여 년간에 걸치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개막되었다. 이로부터 남조(南朝 )에서는 송(宋 : 420∼479)의 뒤를 이어 제(齊 : 479∼501)·양(梁 : 502∼556)·진( 陳 : 557∼589) 등의 제왕조(諸王朝)가 흥망을 거듭하였다. 420년에 건국된 송은 60여 년간 존속하였으나, 제의 건국과 함께 멸망하였다. 제 왕조 도 불과 20여 년만에 멸망하고 양 왕조가 출연하여 50여 년간 존속하였다. 양 왕조는 중원문화(中原文化)를 남방에 이식하여 한때 남조문화(南朝文化)의 극성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에 이르러 사치스럽고 퇴폐적인 풍조가 만연하여 마침내는 진 왕조로 교체되고 말았다. 그 후, 진 왕조도 불과 30여 년 만에 수(隋) 왕조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 170여 년간 지속되어 오던 남조의 역사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남조에서는 송·제·양·진 등 4대 왕조가 빈번히 교체를 거듭하는 동안, 북조(北朝) 에서는 북위(北魏 : 398∼533)의 뒤를 이어 동위(東魏 : 534∼549)·서위(西魏 : 535 ∼556)·북제(北齊 : 550∼577)·북주(北周 : 557∼580) 등의 선비족(鮮卑族) 제왕조 가 흥망을 거듭하였다. 북위는 건국 초기부터 유목적(遊牧的)인 선비족의 유풍(遺風)을 청산하고 중원문화를 수용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북위 왕조 지배계층 내부에 한족(漢族)의 전통문화와 신분질서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 러나 이와 같이 적극적인 한화정책의 추진은 선비족 출신 귀족집단의 극렬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즉, 유연족(柔然族)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방에 설치하였던 군진(軍鎭)의 병사들이 중앙정부의 한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저하된 신분상의 불이익과 경제적 몰락 에 불만을 품고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군진의 반란이 도화선이 되어 대대적인 민중봉기로까지 확대되자 그 혼란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서위는 북주로 교체되었으나 양국간의 대립관계는 종 전과 같이 계속되었다. 북제는 건국 초기 이래로 화북지방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으리만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북지방의 강적인 돌궐과의 군사적 대결로 말미암아 국력 이 크게 쇠퇴한 나머지 577년에 경쟁 대상국인 북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의 패자가 된 북주는 또다시 남조의 진(陳)을 공격하여 영토 를 확장하고 남북조의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기초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6세기 말부터 북주에서는 왕권의 약화로 말미암아 외척 세력이 발호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정국은 혼미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는 반란이 빈발하 였다. 이와 같은 반란은 당시에 이미 북주 내부에서의 정치 및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 고 있던 한인 귀족집단(漢人貴族集團)의 조직적인 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단기간내에 모두 평정되고 말았다. 이러한 격변을 계기로 하여 한인 귀족집단은 무기력한 선비 귀 족집단(鮮卑貴族集團)을 통치권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새로운 한족 왕조를 탄생시킬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한인 귀족출신인 양견(楊堅 : 수 문 제)이 북주의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여 581년에 북주를 멸망시키고 한족 왕조인 수(隋)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북중국을 장악한 수는 남조의 진(陳)이 혼란한 정국에 처해 있는 틈을 타 대대적인 무 력 공세를 가하여 589년에 이를 멸망시키고 강남지방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대륙에서는 4세기 초 이래로 6세기 말에 이르는 3백여 년간의 분열과 혼란의 시대 인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르렀다.

(2) 돌궐의 정세

수대(隋代)에 중국대륙의 서북방에 웅거하여 주변민족에 위협세력이 되고 있던 돌궐( 突厥)은 6세기 중엽에 유연(柔然)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부터 급속도로 강성해지기 시 작하였다. 이 무렵, 중국 북방에서는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양분되어 내전이 심화되고 있었으므로, 돌궐은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내실을 기하여 그 형세를 신장시킬 수 가 있었다. 그리하여 돌궐은 유연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유연의 변 경지방을 공격 점령하여 그 세력기반을 강화한 다음, 사방으로 활발한 영토 확장사업 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돌궐은 동으로 발해(渤海)의 북부인 요동만(遼東灣), 서로 오어하(烏許河 : Oxus河), 남으로 내몽고 사막지역,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는 광대 한 지역을 그 판도 안에 넣고 중국과 접경한 북방민족 가운데에서 최강의 실력을 갖춘 종족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는 동위와 서위에 대신하여 북제(北齊)와 북주(北洲)가 건국되자 , 이들 두 나라는 북방의 강대 세력으로 등 장한 돌궐과 동맹을 맺어 상대국을 제압하려고 외교적인 경쟁을 벌였다. 돌궐은 이와 같은 양국의 대립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경 제적인 실리를 추구함으로써 국력을 증진시켜 나아갔다. 그 후, 돌궐은 한때 북주와 동맹하여 북제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양국간의 친선관계 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당시 돌궐은 북주 및 북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정상적인 국교관계를 유지하는 양 면정책(兩面政策)을 시도하고 있었다. 돌궐은 동맹국인 북제와 북주를 멸망시킨 뒤로는 오히려 북제의 잔존세력을 지원함으 로써 한때 북주로부터 무력침공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주가 내부사정으로 인하여 돌궐에 대한 침공계획을 중단하자, 점차로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그리하 여 마침내 양국의 종실 사이에 혼인관계가 성립하였고, 이로부터 친선관계가 지속되었 다. 그 후 수가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패자로 등장하자 돌궐과의 관계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통일왕조인 수는 종전의 북주·북제 왕조와는 달리 적극적인 대 돌궐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돌궐은 중앙집권적 통치구조를 확보하지 못하고 수 개의 독자적인 세력집단으로 분산되어 있는 정도의 정치 수준에 머물고 있 었다. 따라서, 수는 돌궐의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유력한 세력집단 상호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이간정책(離間政策)을 추진하였다. 수의 이와 같은 이간정책이 주효하여 돌궐은 마침내 583년부터 동돌궐(東突厥)과 서돌 궐(西突厥)의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동돌궐과 서돌궐이 수 차례의 전쟁 을 통하여 국력이 극도로 쇠진한 상태에 이르자 수는 585년에 동돌궐을 무력으로 정복 하여 속국으로 삼고, 서돌궐에 대한 적극적 공세를 가함으로써 서북방 제민족에 대하 여 그들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3) 거란의 정세

요하(遼河) 상류 시라무렌강(Shira-Muren江) 유역 일대에서 농경과 유목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거란족(契丹族)은 6세기 후반 무렵에는 중국대륙의 동북지역 일대에 자리잡 고 동쪽으로 고구려(高句麗)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거란족은 서쪽으로 돌궐의 위협을 받으면서 남으로 접한 수와, 동으로 연접한 고구려 와의 틈바구니에서 형세가 크게 위축되어 거족적인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란족은 이와 같이 거주지역이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특수성 때 문에 강대 민족들 사이에 벌어지는 쟁패의 추이에 따라 새로운 강자를 선택하여 예속 하지 않은 상태에서 584년에 돌궐의 공격을 받게 되자, 일단 수에 항복하여 속국으로 서의 예를 올리고 그 힘을 빌려 돌궐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때마침 돌궐은 이 무렵부터 그 내부적 분열이 심화되어 동돌궐과 서돌궐로 양분된 채 격력한 대립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거란의 외부 세력의 압박이 배제된 상황 아래에서 자유롭게 내부 발전을 이룩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란은 58 4년에 돌궐의 침공을 계기로 수의 속국이 된 이래 불과 20여 년이 경과한 시점인 605 년에는 수와 군사적으로 대결을 할 수 있으리만큼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란은 수와의 관계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수의 전방 전략기지인 요서지방(遼西 地方)에 선제공격을 가하였지만 군사적으로 수의 적수가 되지는 못하였다. 수는 신속 하게 그들 지배하에 있던 돌궐 기병 2만여 기를 동원하여 거란군을 손쉽게 제압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부터 거란은 주변의 여러 세력집단과의 충돌을 자제하면서 내부적 실력 배양에 주 력한 결과, 중국과는 오랫동안 평화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수의 정세

수(隋)는 북주 왕실의 외척인 양견(楊堅)이 개창한 한족왕조(漢族王朝)로서 581년에 건국되었으나 그로부터 8년만인 589년에 비로소 남조의 진(陳)을 무너뜨리고, 3백여 년간에 걸친 분열의 시대인 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통일왕조를 수립 하게 되었다. 통일을 성취한 수는 비록 북주의 정권을 계승한 왕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의 북제, 또는 남조의 양(梁)·진(陳)이 실시하던 제도와 문물을 대폭 수행하였다. 특히 양·진 이 유지해 오던 남조의 문물은 한족 고유의 전통적 문화유산으로서 수 왕조의 정치· 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만, 예외적으로 군제 (軍制)에 있어서는 선비족 고유의 군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북주의 것을 그대로 수용하 는 특징을 보이기도 하였다. 수는 중앙관제로서 최고통치기구인 3성(三省 : 尙書省·中書省·門下省)·6부(六部 : 吏部·禮部·兵部·刑部·度支部·工部)를 두어 행정의 실권을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에는 주(州)와 군(郡)을 설치하여 주로 하여금 군을 통솔하도록 하 였으며, 여러 주 가운데에서도 주요 지역에 소재한 주에는 다시 총관부(總管府)를 설 치, 해당 주의 자사(刺史)가 그 장관인 총관(總管)을 겸임하게 하여 인근의 여러 주를 통솔하도록 하였다. 수는 이와 같은 중앙 및 지방의 통치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중앙정부의 명령과 지시를 차질없이 지방으로 전달할 수가 있었다. 이로써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강화되 었고, 수가 강력한 통일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는 이 밖에도 북주대에 시행되었던 조세(租稅)와 부역(負役)의 과중한 부담을 격감 시키고, 잔혹한 형벌을 폐지하거나 개선하는 한편, 소금과 술의 자유로운 판매를 허용 하여 국민 경제를 부흥시킴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특히, 수 문제는 그 자신이 백성들에게 근검절약의 생활기풍을 솔선수범하여 정치기강 을 쇄신한 결과, 수의 국가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문제는 대규모적인 호구조사(戶口調査)를 실시하여 종래까지 면세의 혜택을 누려오던 160여만 호의 인구 를 파악, 이를 과세대상으로 편성하여 국가의 세수(稅收)를 크게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 그리하여 수는 관창(官倉)과 의창(義倉)에 수천만 석의 양곡을 비축하여 국고를 확충 함으로써 국가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같 은 경제발전에 힘입어 인구도 크게 증가하였던 바, 6세기 말 경에는 460여만 호에 인 구가 2천4백여만 명에 이르렀다. 수가 이와 같이 단기간내에 국가의 재정을 충실히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운하의 개 통에 의한 강남·강북 양대 지역간의 수송수단의 획기적인 발전이 중대한 요인이 되었 다. 당시 수도인 장안(長安 : 대흥)의 경제적 배경이 되고 있던 관중(關中)지역에서는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서는 중앙정부의 소요재정을 전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관동(關東)지역의 생산물을 관중지역으로 수송하여 부족 한 중앙정부의 재정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홍수·한발 등 자연재해가 극 심할 경우에는 관동지역의 생산물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 문제는 위수(渭水)의 물을 끌어들여 수도인 장안에서 동쪽으로 동관(潼關)까지 3백여 리를 관통하는 운하를 개통하였다. 광통거( 廣通渠)라고 불리는 이 운하는, 동관에서 곧바로 황하(黃河)로 연결되어 각종 생산물 을 대량으로 신속히 수송하는 데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종래에 관중지방과 관동지방간에 육로 수송수단에 의존하던 교통의 불편이 해소되고, 수도 장안으로의 물자 수송문제가 해결되어 국고의 충실화를 이룩할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 594년에 일어난 한발로 말미암아 혹심한 기근이 관중지방을 휩쓸었다. 그 러나 수 왕조는 관창과 의창에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풀 어서 빈민들을 구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졌 으며, 수는 통일된 한족 왕조로서의 신망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수 왕조는 학문의 장려, 인재 양성 등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문화적 시책 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정치를 담당할 고급인력을 양성하 기 위한 교육을 등한시하였으므로 광대한 통일제국을 경영해 나갈 수 있는 우수한 직 업 관료집단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조정 내부에서는 오로지 황제인 문제의 뜻에 영합하여 일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기회주의적인 관료들만이 득세하게 되었고, 이 것이 마침내는 수 왕조 내부의 정치기강을 급속도로 혼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3) 고구려의 정세

1) 고구려의 국내정세

고구려의 세력 신장 고구려(高句麗)는 소수림왕(小獸林王 : 371∼383) 때부터 정치적으로 율령(律令)을 제정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하고, 학문적으로는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설 립하여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장기적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 다. 그리고 중국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佛敎)를 받아들여 사상 적인 통일을 도모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국 대륙의 전진(前秦)이 동진(東晉)과 패권을 다투다 실패하고 그 영향으로 후진(後秦)에 의하여 전진이 멸망을 하자, 고구려는 우방국인 전 진을 상실하고 전연(前燕)의 일족인 모용수(慕容垂)가 화북(華北) 지방에 건국한 후연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후연 간에 는 4세기 말경부터 현도성(玄 城)과 요동성(遼東城)의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이 노골화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북으로 신흥강국 인 후연과 싸우면서 남으로 백제(百濟)를 침공하여 영토확장을 도 모하였다. 그러나 한때는 후연에 패하여 현도·요동성을 상실하 고, 배후로부터 백제의 공격이 거듭되자, 국세가 크게 위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경에 광개토왕(廣開土王 : 391∼412)이 즉위하 여 대외정책을 크게 강화하면서부터 고구려의 국력이 신장되기 시 작하였다. 고구려는 남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臨津江)과 한 강(漢江) 유역 일대의 58성(城)을 점령하고 계속해서 백제를 압박 하였다. 그러나 백제측이 위협을 느낀 나머지 관계개선을 요청해 오자 이를 받아들여 임진강 이북의 군사적 요충지역을 제외한 대 부분의 점령지역을 백제에 되돌려 주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신라측의 적극적인 대 고구려 외교로 말미암아 당초부터 양국이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 다. 4세기 말, 신라가 남쪽지역에 침입한 왜군(倭軍)을 물리치기 위하여 원군을 요청하였을 때, 고구려는 이를 받아들여 5만여 명 의 군사로 신라를 지원하였다. 고구려군은 왜군과 접전하여 대승 을 거두었으며, 5세기 초에도 신라의 요청으로 출병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개선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대 국으로 성장하여 백제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북으로는 중 국대륙과 북방 민족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왕대에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5세기 초엽부터 말기에 해당하는 장수왕(長壽王 : 413∼491)대에 이르러서는 전성 기를 누리게 되었다. 광개토왕의 뒤를 계승한 장수왕은 북조를 통 일한 북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남조의 동진(東晉 : 317∼ 419)·송(宋 : 420∼479)·제(齊 : 479∼501)와도 차례로 교류함 으로써 이른바 양면외교(兩面外交)를 전개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 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세력 기반을 조성한 고구려는 적극적인 서북방 개척을 추진하던 광개토왕대와는 달리 대륙과의 마찰을 회피하면서 한반도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가 장수왕대에 이르러 통구(通溝)에서 남진하여 대동강(大洞江) 부근의 평양 서북방 대성산(大城山) 지 역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 것은 남진정책을 추진할 교두보를 확 보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를 계기로 하여 전통적으로 통구지역에 뿌리 를 내리고 있던 토착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국 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배세력을 부식(扶植)시킴으로써 왕권 을 강화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왕권을 확립하고 각종 제도를 완비하여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475년에 3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의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하고 압박을 가한 결과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 : 공주)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고구려는 남양 만(南陽灣)으로부터 죽령(竹嶺)·조령(鳥嶺) 일대에 이르는 선까 지의 광범위한 지역을 새로운 영토로 편입시키기에 이르렀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왕(文咨王 : 492∼518)이 재위하던 6세 기 초까지 고구려는 태평과 번영을 구가하면서 의연히 남하정책을 추구하여 백제와 신라를 괴롭혔다. 고구려의 이러한 남하정책은 문자왕의 뒤를 이은 안장왕(安藏王 : 519∼530)의 치세(治世)에도 계속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백제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안장왕 사후에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안원왕(安原王 : 531∼544)대에 이르 러 고구려 조정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외척세력 집단간에 정쟁이 빈번히 거듭되고, 이에 따라 정국은 극심한 혼란 에 빠지게 되었다. 고구려가 통구의 국내성(國內城)에서 새 수도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토착 귀족세력인 5부족(五部族)은 붕 괴되었으나, 그 뒤를 이어 새 수도에서 정국을 주도할 귀족세력 집단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군소세력 집단 사이 에 정쟁이 빈발하게 되자, 그러한 가운데 수상인 대대로(大對盧) 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 무렵의 고구려는 광개토왕·장수왕대의 전성기와는 달리 중앙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크게 약화된데다 가, 장수왕 이래의 국가 목표인 남하정책도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국력 쇠퇴 현상은 안원왕의 뒤 를 이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양원왕(陽原王 : 545∼558)대 에도 계속되어 6세기 중엽이 이르러서는 한강 유역의 영토를 백제 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빼앗기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원왕(平原王 : 559∼589) 때부터 왕권이 확립되어 정 국이 안정을 되찾게 되자, 고구려는 국력 배양에 전력을 기울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에 이르렀다. 장수왕 이래 대성산성(大城山 城)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도성을 평양의 대동강변으로 옮겨서 새 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이를 도약의 전기로 삼아 발전을 거듭한 결과, 영양왕( 陽王 : 590∼617)대에 이르러서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대외적인 위세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중흥(中興)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고구려는 광개토왕 과 장수왕대의 번영을 회복할 수는 없었으나, 왕권의 확립과 정국 의 안정 회복을 계기로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었다. 그리하여 한반 도 내의 백제와 신라는 물론, 중국 대륙의 통일왕조까지도 고구려 의 이러한 형세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막강한 세력으 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2) 고구려의 북진정책

고구려는 백제를 제압하여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신라에서 도 왜군을 격퇴시켜 그들의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자, 중국 대륙 에 대해서도 새로이 강경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위 축되었던 서북방으로의 진출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모색하게 되 었다.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서북 변경지역에서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는 후연(後燕)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402년에 요하(遼河)를 도하하여 후연의 숙군성(宿軍城 : 광영)을 공략하였다. 이때 후연 의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는 고구려군의 위력에 놀란 나머지 전의를 상실한 채 성을 버리고 패주하였다. 그후 고구려는 405년에 후연의 국왕인 모용희(慕容熙)가 직접 지휘하는 후연군의 침공을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 공방전에서 이들을 물리쳤다. 이듬해(406)에도 고구려군은 요하 상류지역의 목저성(木底城)으로 침공한 후연군을 물리쳐서 그들의 보복적인 침공기도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이어서 410년에 고구려는 한반도 동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동부여(東扶餘)를 침공하여 이를 그 속국으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한반도의 임진강 이북으로부터 만주의 요하 이 동지역 및 목단강(牧丹江) 중상류지역 이남 일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포괄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명실상부 한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3) 고구려의 남진정책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고구려는 4세기 말경에 광개토왕(廣開 土王)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무력 침공을 가함 으로써 백제를 굴복시켰다. 따라서, 백제는 이로부터 고구려의 영 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백제는 고구려의 관심이 약화된 틈을 타서 개로왕 (蓋鹵王 : 455∼474)대에 이르자 왕권을 강화하고 외척세력을 권 력의 핵심에서 배제하여 국왕 중심의 전제화된 세력 기반을 형성 하기에 이르렀다. 개로왕은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존엄을 대내외 적으로 과시하고,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각 종의 대규모적 토목공사를 벌였다. 이에 따라, 화려한 궁실과 누 각 등을 건축하고 역대 국왕의 왕릉도 웅장한 규모로 개수하여 왕 실의 권위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국가 재정 이 고갈되어 백성들에게 과중한 조세와 부역이 부과되어 민심이 악화되었으므로 백제는 전반적으로 국력이 약화되는 현상을 자초 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이끄는 고구 려군 3만여 명은 475년에 백제를 침공하여 불과 10여 일 만에 수 도 한성(漢城)을 점령하였다. 고구려군은 개로왕과 그 가족을 모 두 포로로 잡아 처형하고 기타 왕족 8천여 명도 고구려의 수도로 압송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한성을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 부근 일대 의 백제 영토를 점령하게 되었으며, 백제는 왕권의 전제화와 왕실 의 권위 신장을 위하여 추진해 오던 제반 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후 백제는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文周王 : 475∼ 476) 때 금강 유역의 웅진(熊津 : 공주)으로 천도하고 부흥을 위 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문주 왕과 삼근왕(三斤王 : 477∼478)·동성왕(東城王 : 479∼500)대의 혼란기를 거쳐 무령왕(武寧王 : 501∼522)이 즉위하면서부터 명실 공히 왕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정국도 안정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수 차례에 걸쳐 백제를 침공하여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6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지배계층 내부에 극심한 대립의 양상 을 노출시켰다. 그리하여 세력 확장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백제는 성왕(聖王 : 523∼553) 때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 (泗  : 부여)로 옮기고 중앙과 지방의 각종 행정제도를 정비함으 로써 국왕이 전제권을 회복하게 되자 정국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 다. 아울러 경제와 문화도 여기에 힘입어 눈부신 번영의 모습을 드러내어 백제의 국력이 전반적으로 신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551년에 고구려는 신라군과 연합한 백제군의 침공을 받고 한강 하 류지역의 6개 군(軍)을 백제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백제는 동맹관계를 파기하고 한강 유역을 독점한 신라를 공격하던 성왕이 관산성(管山城 : 옥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고 비로 그 국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그후 백제는 대내외적으로 정치 적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에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소강상태를 유지하면서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에 전력을 경주함으로써 국력의 피폐가 극도에 달하여 민심이 국가로부터 이반(離叛)되는 말기적 현상을 노출시키기에 이르렀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고구려는 신라(新羅)의 요청에 따라 4 세기 말에 백제와 왜(倭)의 연합군을 물리친 것을 계기로 하여 신 라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고구려가 정치·군사적 압 박을 가중시키자 신라의 눌지왕(訥祗王 : 417∼457)은 433년에 백 제와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국경지역에 많은 산성(山城)을 축조하 는 등 고구려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신라가 6세기 초의 지증왕(智證王 : 500∼513)대부터 국력 신장 을 위하여 기울인 일련의 노력은 법흥왕(法興王 : 514∼539)대의 율령(律令) 반포(520)에 의하여 법제화되었다. 또한,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진 병부(兵部)의 설치는 신라의 국방력을 일신시 키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남조의 양(梁)과 외교관계를 강화하면서 불 교(佛敎)를 수용하여 국교로 공인하고(535) 독자적으로 '건원(建 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는(536)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신라는 532년의 본가야(本加耶 : 김해) 합병을 시발점으로 하여 본격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551년에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죽령(竹嶺) 이북 철령(鐵嶺) 이남 한강유역의 10개 군을 탈취당했다. 이어서 신라가 백제의 점 령지역을 기습공격하여 일거에 장악하고 한강 유역을 독점하게 되 자 남쪽으로는 오직 신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남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으로 남조의 진 (陳) 및 북조의 북제(北齊)와 활발히 교류하여 선진문물을 적극적 으로 수용함으로써 국력을 신장시켜 나갔다.

2. 군사적 환경

(1) 고구려의 국방태세

1) 고구려의 군사제도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그 연맹왕국(聯盟王國)의 지배층을 형성 하고 있던 계루부(桂婁部)·순노부(順奴部)·연노부(涓奴部)·관 노부(灌奴部)·절노부(絶奴部) 등 5부(五部) 조직을 정치·사회의 중핵으로 하고, 더 나아가 이를 군사조직의 근간으로 삼았다. 당 초에 5부는 각 부족의 집단을 지역에 따라 구분하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차 부족적 성격이 희박해지기 시 작하였다. 더욱이, 국가의 통치구조가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체제 로 발전해 감에 따라 지역적으로 구분되던 종래의 부족 개념은 내 부(內部)·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부(北部)라는 단순한 방위(方位) 구분 개념으로 전화(轉化)되었다. 정치의 중앙 집권화 추세와 병행하여 군사조직도 새로히 변모하게 되었던 바, 국왕을 최고 통수권자로 하는 단일지휘체제하의 전국적 군사조직 이 재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새로운 군사조직이 출현하게 됨에 따라, 대대로(大對 盧 : 제1관등)·태대형(太大兄 : 제2관등)·울절(鬱折 : 제3관 등)·태대사자(太大使者 : 제4관등)·조의두대형( 衣頭大兄 : 제 5관등) 등 중앙정부의 고급 관료들이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취급 하는 주요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가지고 군(軍)의 고급지휘관인 '장군(將軍)'의 임무를 겸장(兼掌)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대 로는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총괄하는 수상(首相)으로서 3년을 임 기로 하여 교체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 예하에는 역시 장군급에 해당하는 무관인 대모달(大謀達, 일명 막하라수지) 이 대당주(大幢主)로서 대부대를 지휘하였다. 한편, 지방의 5부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장관인 욕살(褥薩) 이 도사(道師)의 보좌를 받으면서 행정과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 다. 5부의 욕살은 전국적으로 분포된 60여 개의 대성(大城)을 관 장하였다. 욕살 휘하의 지방장관인 처려근지(處閭近支)와 가라달 (可羅達)도 역시 무관으로서 170여 개의 소성(小城)에 대한 행정 및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처려근지와 가라달의 휘하에는 제7관등 인 대형(大兄) 이상의 무관인 말객(末客, 일명 말두)이 임명되어 각각 병력 1천여 명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군사제도는 행정제도의 일부분이었으나, 군정일치(軍 政一致)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지방의 경 우, 행정통치 조직은 곧 군사 지휘체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편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 지방관은 대개 품계가 높은 무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의 성곽에 주재하면서 관할지역에 대한 군정(軍政)의 대권을 행사하였다. 고구려는 대성(大城)을 중심 거점으로 삼고 그 아래에 2∼3개 소성(小城)을 소속시켜 이를 집중관리하는 군정체제를 운용하였 다. 따라서, 효율적인 유지 및 협조체제가 확립된 가운데 공격과 방어에 있어서 군사력의 집중과 분산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조직적인 군정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함으로써 해당지역의 방위는 물론, 부단한 외적의 침공 사태에 직면해서도 항상 효과적으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 었다.

2) 고구려의 군사력

고구려인은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를 생활 영역으로 하여 목 축과 수렵을 주된 생활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적 요 인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인들은 장정(壯丁)으로 성장하는 동안에 기마술(騎馬術)과 궁술(弓術)을 비롯하여 각종의 무기류들을 다루 는 기술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장정들은 평소 생 활에 필요한 기능의 일부로서 습득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유사 시에는 전사(戰士)로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고구려는 상무적 기상에 의하여 풍부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하 여 국민개병제를 채택하여 고구려 사회 전체를 병영화(兵營化) 시 킴으로써 4세기 중엽부터 동아시아 대륙의 군사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매년 2회씩 실시하는, 국가적 차원의 대행사인 수렵대회(狩獵大會)는 고구려인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전기(戰技)를 연마하는 중요한 장(場)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친 광개토왕 시 대의 활발한 정복 활동과 5세기 말경 문자왕대의 영토확장 정책에 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어 요동지역과 송화강(松花江) 유역 일대까 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확보는 고구려의 국력을 재신장시키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는 이로부터 이 지역 일대의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 게 되었던바, 특히 이 지역의 산물인 북방계통의 우수한 기마(騎 馬)와 강도 높은 철(鐵)의 안정적인 공급은 군사적 수송수단과 전 략물자의 생산체계에 큰 변화를 가져와 고구려가 군사대국으로서 의 면모를 갖출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요 군사 거점으로서 60여 개의 대성(大城)과 170여 개의 소성(小城)을 확보하고, 이곳 에 병력과 각종 전쟁물자를 비축하였다. 고구려의 성곽은 적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하나 적을 방어하기에 는 유리한 산악지형에 위치한 산성(山城)이 대부분이었다. 대개 3 면이 고지나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나머지 1면이 완경사를 이루는 곳으로, 넓은 평야지대와 교통의 요지에 인접하여 이 지역들을 통 제하기에 용이한 산악지대에 의존하여 축성되었다. 따라서, 산성 에 주둔하는 방어군측은 수성(守成)과 공격(攻擊)에 있어서 많은 이점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성 밖의 공격군측은 공성에 많은 제약 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특히, 중국 대륙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요동지방의 경우에는 공 수 양면(攻守兩面)에서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많을 경우에는 십수 만에 달하는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함으로써 군사 도시를 형성하기 도 하였다. 그러한 만큼 이러한 성곽에는 활·갑옷 등의 무기류와 충차(衝車)·비루(飛樓)·운제(雲梯) 등과 같은 공성 및 수성장비 들이 대량으로 확보되어 있었다. 그에 따른 군량도 수만 내지 수 십만 석이 비축되어 있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 후방 지원이 단절 된 고립 상황에서도 일정기간 동안 독자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태세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산성을 배경으로 한 공방전에서 항상 뛰어난 전투기량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 의 한족(漢族) 침략세력은 '고구려는 산악을 이용하여 산성을 쌓 고, 또 이 성을 방어하는 전술에 숙달되어 있으므로 이를 굴복시 키기는 매우 어렵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비교적 규모가 큰 대성(大城)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장 관인 욕살(褥薩)의 지휘를 받았는데, 그 휘하에는 다시 2∼3개의 규모가 작은 소성(小成)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 소성은 하급 지방 관의 통치를 받고 주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유사시에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역시 관할지역의 군정을 장 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민족의 침입과 같은 전면전이 발발하면 대성은 전술 지휘본부 및 병참기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휘하에 소속된 소 성의 전투를 지원하고 그 후방의 다른 성과의 연락을 유지하는 기 능을 가지고 있었다. 주둔 병력의 규모는 성곽의 위치와 중요성에 따라 적게는 수백 명으로부터 많게는 수만 명이 주둔하기도 하였 으나 대개의 경우에는 2천 내지 3천여 명의 병력이 주둔하였다. 고구려는 이미 5세기 후반기에 최대의 영역을 확보한 데에 이어 서 6세기 전후에 이르러서는 그 호수(戶數)가 1백여만 호에 이르 는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전국에 2백여 개의 대소 성곽을 거점으로 확보하고, 병력 규모 20만 내지 30만 명 수준의 상비군 을 유지하였다. 그 중에서 10여만 명 이상의 기마병을 확보함으로 써 이들이 유사시에는 기병 특유의 기동력과 충격력으로 적에 대 하여 특히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고구려 군사력의 주력을 이루고 있던 기병부대는 북방계통의 우수한 말을 타고 휴 대가 용이한 기병용 궁시(弓矢)와 장창(長槍)을 주무기로 하여 대 적전투에 있어서 승패를 좌우하였다. 고구려의 보병부대는 창검(槍劍)을 단병무기(短兵武器)로 휴대 한 이외에도 사거리가 각각 3백여 보(步)에서 1천 보에 달하는 궁 시(弓矢)와 쇠뇌(弩)를 장병무기(長兵武器)로 휴대하면서 투석기 (投石機)인 포차(砲車)와 차노(車弩)·충차(衝車)·운제(雲梯) 등 공성 및 수성장비를 보유함으로써 강력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 다. 또한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하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대부분이 전사(戰士)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유사시에 신 속히 동원되어 전투에 가담할 수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특수한 생활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결과였다. 그러한 까닭에 고구려는 거 대한 군사병영이나 다름이 없는 2백여 개의 성곽에 항시 20만 내 지 30만명 선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동북아시아 대륙의 패자(覇者) 로 군림할 수 있었다.

(2) 수의 국방 태세

1) 수의 군사 제도

수(隋)는 북주왕조(北周王朝 : 557∼580)를 계승한 정권이었으 나, 국가통치의 근간이 되는 문물제도는 대부분 북제(北齊 : 55 0∼577)의 것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수가 북제의 이러한 여러 제 도를 적용함에 있어서는 적지않은 부작용이 노출되었다. 이에 수 문제(隋 文帝 : 578∼604)는 남조 후기의 왕조인 양(梁 : 502∼ 556)과 진(陳 : 557∼589)의 문물을 도입하여 이를 혼용하였다. 따라서, 수의 각종 문물제도는 북제와 양·진 세 왕조의 것을 혼 합한 복합적인 것이었다. 수는 이와 같이 하여 남북조(南北朝) 후기의 각종 제도를 정비 한 결과,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비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에는 최고 관부(官府)인 3성(三省)을 설치하여 국정을 총괄하도록 하고, 상서성 예하에는 다시 6부(六 部)를 설치하여 주요 행정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방행정제도의 경우에는 '주요한 곳을 남기고 불필요한 곳은 제거하며, 작은 곳을 합하여 크게 한다'는 원칙에 따라 6세 기 후반까지 존재하던 211개 주(州), 508개 군(郡), 1124개 현 (縣)에 대한 대폭적인 정비작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종래의 지방행정조직인 주·군·현 3급제(三級制)를 주·현 양급제(兩級 制)로 개편함으로써 지방행정기구의 방만한 운용으로 말미암은 국 가 재정의 과다한 지출을 억제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 후 주·현 양급제는 다시 군·현 양급제로 개편되 었던 바, 양제(煬帝) 때인 603년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지방행정조 직이 190개 군과 1255개 현으로 조정되어 행정의 능률을 보다 더 제고시킬 수 있게 되었다. 수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와 함께 583년부터 호구조사(戶口調査) 를 실시하여 호적부(戶籍簿)에서 누락된 호구(戶口)를 철저히 색 출하고, 이를 등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60여만 명이 호적부 에 새로히 등재됨으로써 당시까지 파악된 장정(壯丁)의 수가 40만 명에 불과하던 것이 2백여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게 되어, 그에 따 른 국가의 조세(租稅) 및 요역( 役)의 수취도 급증하게 되었다. 호구의 총수(總數)도 문제 초년에는 4백여만 호를 넘지 못하고 있 었으나, 589년에 진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성취한 이후로 60여만 호가 추가되자 그 수효는 460여만 호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따 라, 국가 세수(稅收)가 증대되고, 경제가 번영하여 정치와 사회도 안정의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수는 국가 통치 기반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북주(北周)의 군제를 개선 발전시켜 통일을 완수한 직후인 590년부터 부병제(府 兵制)를 기반으로 하여 군사제도를 정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군 인의 병적(兵籍)을 지방행정기구인 주(州)·현(縣)에 소속시키고, 군인에게도 일반 백성과 동일한 면적의 토지를 지급하여 민(民)· 군(軍)의 경제적 평준화를 기함으로써 징집대상을 확대시키고, 병 농일치(兵農一致)의 군사제도를 확립시켜 나갔다. 이때 지방에서 는 상설군부(常設軍府)로서 표기장군부(驃騎將軍府)를 두고 그 나 머지의 잡다한 군부들은 모두 폐지해 버렸다. 그후 607년에 표기 장군부가 응양부(鷹揚府)로 개편되면서 지휘관은 표기장군은 응양 낭장(鷹揚郎將)으로, 부지휘관인 거기장군(車騎將軍)은 응양부낭 장(鷹揚副郎將)으로 개칭되는 등의 변화를 겪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지방군사기구의 단일화와 함께 군부는 주현(州縣)의 행정체계와 분리되어 중앙의 군령기관(軍令機關)인 병부(兵府)와 직결되는 군사행정 기관으로 확립되었다. 따라서, 이후로부터 군 부(軍府)는 징집된 장병의 지휘관리만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부병 (府兵)은 중앙 직속의 지방군부인 응양부병(鷹揚府兵)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수는 605년에 양제가 즉위하자 부병제의 제2단계 개편을 실시하 여 전국의 응양부 병력인 부병을 12위(十二衛)에 분속(分屬)시키 고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명과 장군(將軍) 2명을 두어 부대 를 지휘하도록 하였던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좌익위 (左翊衛) ………… 대장군(1), 장군(2)
· 우익위 (右翊衛) ………… 대장군(1), 장군(2)
· 좌효기위(左驍騎衛) ……… 대장군(1), 장군(2)
· 우효기위(右驍騎衛) ……… 대장군(1), 장군(2)
· 좌무위 (左武衛) ………… 대장군(1), 장군(2)
· 우무위 (右武衛) ………… 대장군(1), 장군(2)
· 좌둔위 (左屯衛) ………… 대장군(1), 장군(2)
· 우둔위 (右屯衛) ………… 대장군(1), 장군(2)
· 좌어위 (左禦衛) ………… 대장군(1), 장군(2)
· 우어위 (右禦衛) ………… 대장군(1), 장군(2)
· 좌후위 (左候衛) ………… 대장군(1), 장군(2)
· 우후위 (右候衛) ………… 대장군(1), 장군(2)

그리고 12위의 소속 병력인 부병 집단을 형성하는 각 지방의 응 양부에는 기병(騎兵)을 관장하는 월기교위(越騎校尉) 2명과 보병 (步兵)을 지휘 통솔하는 보병교위(步兵校尉) 2명이 배치되어 병종 (兵種)의 구분에 따르는 고유 임무를 수행하였다. 수는 20세부터 60세까지의 장정을 부병으로 편성하여 부병의 구 성원 각 개인이게 17결(結)의 토지를 지급하고 병농일치(兵農一 致)의 운영체제에 따라 춘(春)·하(夏)·추(秋)의 세 계절에는 농 경에 종사하고, 농한기(農閑期)인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군사훈련 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1년에 1개월 내지 2개월씩 교대로 상 경하여 수도 경비를 담당하는 이른바 상경입번(上京入番)의 의무 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수도경비를 담당하는 부병은 이 기간 동안 위사(衛士)로 불리면서 무기와 식량을 개인의 부담으로 마련하여 휴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국가는 그 대가로서 부병의 토지에 면 세 혜택을 주었다. 그리고 부병은 입역 연령인 20세부터 면역 연령인 60세에 이르 기까지 1회에 한하여 3년 동안 국경지방의 주요 지역에 설치된 진 (鎭)·수(戍)에 파견되어 국경 경비 임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었 다. 수는 부병을 유사시에 필요에 의해 모병한 병력과 함께 새로이 편성된 부대의 지휘계통에 따라 그 지휘하에 예속시켰는데, 여기 에서 부병은 주력부대가 되고 모병한 병력은 지원부대가 되었다. 이와 같이 편성된 출전부대의 지휘관은 행군원수(行軍元帥)로서 그 수효는 출전 병력의 규모나 부대수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출전부대가 다수일 경우에는 반드시 1인의 행군원수가 선 임 지휘관인 절도(節度)가 되어 각 부대의 행군원수를 통괄 지휘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출전부대의 행군원수 휘하에는 다시 수 십 명의 행군총관(行軍總管)을 임명하여 각각 독립된 단위부대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행군총관은 일반적으로 6천여 명 규모의 병력을 거느리고 독자 적인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행군총관 을 통제하는 행군원수는 대개 30여 명의 총관을 휘하에 두고 있었 으므로, 그 휘하 병력은 총 18만여 명에 이르는 셈이었다. 행군총 관의 휘하에는 하급부대인 단(團)이 있어, 단장(團長)이 이를 지 휘하였으며, 단장 아래에는 10개의 대(隊)가 있어 10명의 대정(隊 正)이 각각 1백 명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한편, 전투부대의 주력인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은 대개 그 구성비율이 1 : 2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기병이 4개 단(40대 : 4 천 명)인 반면에, 보병은 그 배수에 해당하는 8개 단(80대 : 8천 명)으로 통합하여 1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행군총관이 지휘하는 6천 명의 군사도 기병 2천 명(2개 단 : 20대)과 보병 4 천 명(4개 단 : 40대)으로 편성되어, 보·기 협동작전의 조화를 이루어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2) 수의 군사력

수는 중앙의 최고 행정기관은 3성을 정점으로 하여 583년부터 지방의 주·현 제도가 정비되자, 정국의 안정이 이루어지게 되었 다. 뿐만 아니라, 문제를 비롯한 지배계층이 솔선수범한 근검절약 정책의 추진 결과, 경제적으로도 안정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안정을 배경으로 하여 문제(文帝)는 584년에 1백여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수도권을 관통하는 대운하인 광통 거(廣通渠)를 개통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균전제(均田制)의 실시 로 말미암아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운하를 이용한 지역간의 물 자 유통이 활발해지자 상업도 빠른 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수는 정치적 안정과 보조를 함께하여 군사적으로도 내 실을 다져 나감으로써 통일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 여 건국 후 근 10년이 경과한 588년에 3명의 행군원수 휘하에 90 여명의 행군총관이 지휘하는 90개의 독립부대로 편성된 52만여 명 의 병사를 동원하여 남조의 진을 멸망시켰다. 통일전쟁을 끝낸 뒤 로 수는 전쟁에 동원되었던 군사들을 향리(鄕里)로 돌려보내고, 590년부터 군적(軍籍)을 민적(民籍)에 편입시켜 민과 군의 구분을 폐지한 민군합일(民軍合一)의 군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부병제를 확립시켜 나갔다. 이어서 그로부터 5년 후인 595년에는 돌궐(突 厥)이나 토욕혼(吐谷渾) 등, 북방민족과 대치하고 있는 관중(關 中)의 군사적 요지를 제외한 지역에서 개인이 무기를 제작하거나 휴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말미암아 수는 황제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정치·경제적 안정을 이룩하여 세계적 대제국의 면모를 과시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수는 통일전쟁과 이민족(異民族)과의 대결에서 전투경험을 축척한 50여만 명의 부병집단과, 언제라도 모병하여 부병이나 다름이 없는 전투부대로의 편성이 가능한 민간 인 집단을 확보함으로써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 강대국으로 발전하 게 되었다. 특히 문제는 즉위 초기부터 추진해 오던 이른바 '북수 남공(北守南攻)' 정책에 박차를 가하여 북쪽으로는 3차례나 장성 (長城)을 증축하고 수세(守勢)로서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저지한 반 면, 남쪽으로는 군사적 공세(攻勢)를 집중하여 남방 여러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통일제국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후, 수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바탕 위에 막강한 군 사력을 보유하게 되자 종래의 '북수남공'정책을 지양하고 적극적 인 북진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고 구려와의 전쟁이었다. 최초로 이루어진 문제의 고구려 원정의 실 패에 이어서, 양제의 3차에 걸친 보복적인 침공으로 말미암아 이 전란은 대규모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수 왕조는 문제 때의 안정 기조를 바탕으로 하여 양제 때에 이 르러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590년 경에 460여만 호로 파악되던 인구가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이 경과한 양제 초기에는 890여만 호로 급증하였다. 경지면적도 1940여만 경(頃)에서 5585 만여 경으로 급증하여 국력신장의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 때 수는 동서간 거리가 9천3백여리, 남북간의 거리가 1만4천8백여 리에 달하여 그 판도내에 190개 군과 1천2백개 현이 포괄된 대제 국을 형성한 가운데에, 50년 내지 60년간의 국가 예산에 해당하는 2천6백여만 석의 군량을 비축하고 있었다. 수 양제는 605년에 1백여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문제 때 이룩 된 광통거에 이어서 두 번째 대운하인 통제거(通濟渠)를 개통시켰 다. 2년 후인 607년에도 1백여만 명을 동원하여 1천여 리의 장성 (長城)을 축조하고, 그 이듬해(608)에는 다시 1백여만 명을 투입 하여 영제거(永濟渠)를 개통시킴으로써 불과 수년 동안에 연 인원 3백여만 명을 집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였 다. 수의 이러한 인력 동원 능력은 그들이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바, 양제는 607년에 변방지역을 순수(巡狩)할 때 병력 50만, 치중행렬 1천여 리에 달하는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하여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이와 아울러, 수는 북방민족과의 전쟁에 대비한 신무기 개발에 도 주력하였다. 수 양제는 607년부터 무기 제작자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각종 무기류들을 대량으로 생 산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609년에는 민간인의 무기 제 조 및 휴대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진 가운데 양제의 대대적인 무기 사열식이 거행되었는데, 기병부대의 기습적인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조립식 차단벽인 육합판성(六合板城)이 새로운 방어무기로 발명되어 주목을 받았다. 수는 608년부터 북방민족인 토욕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그간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력 신장을 배경으로 하여 축적된 군사 력을 과시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수는 이 실전을 통하여 각종 신형 무기들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이듬해(609)에 토욕혼 을 정벌하는 데에 성공을 하였다. 토욕혼 정벌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친 수는 각종 무기의 성능과 그들 군제의 전술상 결함을 보강하 여 전력을 정비한 후, 새로운 침략 전쟁으로 고구려에 대한 대규 모 침공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3) 주변 국가의 방위 태세

1) 북방 민족의 방위 태세

수(隋)의 통일제국이 형성될 무렵인 6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북 방 변경지역에는 돌궐(突厥), 거란(契丹), 해(奚), 말갈(靺鞨) 등 군소(群小) 유목민족(遊牧民族)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거란 의 동북지역에서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여 주변민족에 위 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던 한민족(韓民族)의 고구려(高句麗)와 중 국 한족왕조의 틈바구니에 끼어 세력이 크게 위축되기도 하였다. 중국 대륙 북쪽의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생활수단으로 삼고 있던 북방민족은 자신들의 세력이 주변 민족에 비하여 월등히 약화되어 있을 때에는 평화적인 외교정책으로 그들과 선린관계를 유지함으 로써 민족의 생존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이들 북방민족은 부족간의 통합을 추진하여 일단 통일세 력을 형성하거나 중국, 고구려와 같은 주변 국가가 내부의 혼란 등으로 국력이 약화되었을 때에는 강력한 기병부대를 편성하여 변 경지역을 침공하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기마(騎馬)를 중요한 생활 수단으로 이용하 였으므로 그 구성원 전체가 잘 훈련된 기병(騎兵)이나 다름없이 기사(騎射)에 능숙하였다. 따라서, 유사시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신속하게 기병으로 소집되어 전투에 가담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 은 여건으로 말미암아 북방민족은 기병 위주의 공격적인 방위 태 세를 유지하면서 주변의 다른 민족을 침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 다. 특히 돌궐과 거란은 해(奚)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면서 각각 중국의 북쪽 변방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돌궐 이 북방 유목민족 중 최강의 실력을 보유한 집단으로 부상하였다. 돌궐은 6세기 중엽에 이르러 부족의 통일세력을 형성하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신장되어 주로 중국의 북방 변경지역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국이 유화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할 때에는 중국과의 결혼정책에 의한 동맹 또는 상품교역을 통한 평화적인 국교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강경 외교노선을 추구할 경우에는 이에 대항하여 대 중국 방위태세를 강화하면서 무력 대 결을 벌여 중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고수하거나 중국에 굴복하여 조공(朝貢)을 바치고 그 속국(屬國)이 되어 주종관계를 수립함으 로써 평화를 유지해 나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 왕조가 중국대륙의 통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자, 돌궐은 수가 대 북방 경계태세를 확립하기 이전에 기선 을 제압하기 위하여 583년에 침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수의 강 력한 대응조치로 말미암아 돌궐은 대수전쟁(對隋戰爭)에서 대패한 데다가 내분까지 발생하여 동·서 돌궐의 불화가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더욱이 동·서 돌궐은 수의 이민족 통치정책인 이이제이정책(以 夷制夷政策)에 말려들어 첨예한 대립현상을 노출시켰으며, 이러한 돌궐의 동족상잔은 수의 국제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유리한 요 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수가 고구려 침공에 주력한 나머지 돌 궐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키자 그들은 차츰 세력을 신장시키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동돌궐은 수 양제가 제4차 고구려 침공을 단 행한 이듬해인 615년에 대대적으로 수의 국경지역을 침공하여 이 세민(李世民)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후퇴하기도 하였다. 그후 수말(隋末)의 대란(大亂)을 통해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 여 중국의 전토(全土)가 동란상태에 빠지게 되자, 동돌궐은 한동 안 대세를 관망하면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즉, 그들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수에 대항하는 강력한 반란세력인 이세민군에 대해서도 호의를 보이는 이른바 '양면외교(兩面外交)'를 추진함으로써 실리(實利)를 취하 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615년 수를 침공하였다가 패퇴당한 후로 치명적인 타격 을 입고 그 형세가 쇠퇴하여 더 이상 중국을 위협할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중국 대륙 동부지역에 위치한 거란은 동으로는 고구려, 서로는 돌궐의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약소 민족이었다. 거란은 584년 에 돌궐의 공격을 받게 되자 수에 보호를 요청함으로써 수와 밀접 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후 605년에 거란은 부족의 세력 신장을 꾀하여 강력한 기병부대로 수의 변방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수의 반격을 받아 대패한 것을 계기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더 이 상 중국을 위협하지 못하였다. 이 밖에도 동돌궐의 동부와 거란의 서부지역의 해(奚), 고구려 의 북방에 말갈(靺鞨) 등이 주변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들 은 모두 고구려와 돌궐의 형세에 눌리어 위축된 상태에 있었으므 로 오로지 수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보호를 받아 부족의 생존을 도모하기에 급급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수나 고구 려, 돌궐 등 주변 국가에 위협벅은 존재로 성장하지 못하고 말았 다.

2) 백제의 방위 태세

백제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서의 체제를 정착시키면서 수도 경비를 담당하는 상비군을 보유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따 라 상부(上部)·전부(前部)·중부(中部)·하부(下部)·후부(後部) 의 5부(五部)로 나누어 각 부에 5백 명씩 총 2천5백 명의 중앙군 (中央軍)을 설치하였다. 이들 상비군은 6좌평(六佐平 : 제1관등) 중 도성 경호임무인 숙위(宿衛)를 담당하는 위사좌평(衛士佐平)의 휘하에 예속되었으며, 부대의 실질적인 지휘는 군사지휘관인 달솔 (達率 : 제2관등)이 맡았다. 지방에는 중앙의 5부에 상응하는 행정조직인 5방(五方 : 중방< 中方 : 古沙城>·동방<東方 : 得安城>·남방<南方 : 久知下城>· 서방<西方 : 刀先城>·북방<北方 : 熊津城>)에 각각 7백 명 내지 1천2백여 명씩 총 5천여 명의 상비군을 편성하여 방령(方領 : 제2 관등)이 지휘하도록 하였던 바, 이들은 5백여 호에 달하는 주민들 과 함께 민군(民軍)이 일체가 되어 생활하였다. 그리고 각 방성 (方城)의 예하에는 군장(軍將 : 제3관등)이 지휘하는 6∼10개의 군(郡)이 있었는데, 군의 민정(民政)은 도사(道使 : 일명 성주)가 따로 담당하였다. 그리고 각 군 아래에는 5∼6개의 소성(小城)이 소속되어 있었던 바, 백제 말기까지 전국적으로 2백여 개의 성이 5부, 57군에 분속되어 77만 호의 민호(民戶)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국적 규모의 군사업무는 6좌평 중 국방을 담당하는 병관 좌평(兵官佐平)이 주관하였다. 백제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의 원칙 아래 중앙과 지방의 통 치조직을 군사조직(軍事組織)으로 편성함으로써 강력한 방위 태세 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러 고구려의 침공으로 임진강 하류의 요새인 관미성(關彌城)을 상실하게 되면서부터 대 고구려 항쟁에 수세를 면치 못하였다. 백제는 북방 변경지역의 전략적 요새인 관미성을 수복하기 위하 여 세 차례(393, 394, 395)에 걸쳐서 이 지역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396),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직접 지 휘하는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게 되었다. 임진강과 한강 하구로 진입하여 상륙한 고구려 수군(水軍)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백제는 임진강과 한강 유역 일대의 아차성(阿且城), 구모성(句牟 城 : 연천), 구모야라성(句牟耶羅城 : 장단), 미추성(彌鄒城 : 인 천) 등과 수원, 시흥 부근 지역에 이르는 58성 7백여 촌락을 상실 하고 왕제(王弟)와 대신 10여 명을 포함한 1천여 명의 볼모를 고 구려에 보내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고구려와 화약을 맺어 일단 위 기를 모면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에 탈취당한 한강 이북의 점령지를 되돌 려받고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이로 말미암 아 국제적으로 위신이 실추되고 고립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백제는 왜국(倭國)과의 관계 강화를 통하여 국제적 지위 향 상에 노력하는 한편, 내적으로는 고구려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군 사력 강화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전성기가 계속되 고, 백제의 내부에서도 집권 귀족 세력의 정쟁이 계속되어 고구 려, 백제 양국간의 힘의 불균형 상태는 쉽사리 해소되지 못하였 다. 그후 백제는 개로왕(蓋鹵王 : 455∼474)이 즉위하자 왕족 중심 의 지휘체제를 강화하면서 중국 남조의 송(宋)과 북조의 북위(北 魏)와의 교류를 통하여 국제적 지위 향상에 주력하였다. 또한 472 년(개로왕 18)에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여 북위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백제의 움직임은 오히려 고구려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와 고구려는 475년 9월에 3만 대군을 동원하 여 백제를 침공하였다. 백제는 고구려 침공군에게 전진기지인 북성(北城)과 한성(漢城) 을 탈취당하고 개로왕과 태후(太后), 왕자(王子) 등이 참살되고 8 천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와 같이 대 고구 려 방위 태세가 여지없이 붕괴되어 버리자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 津 : 공주)으로 옮기고 국가의 재건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 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문주왕(文周王 : 475∼476)과 삼근왕(三斤王 : 477∼478)대의 혼란기를 거쳐 동성왕(東城王 : 479∼500)대에 이 르러 왕권을 강화하면서 비로소 안정 기반을 구축하기에 이르렀 다. 이와 동시에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 위협이라는 공동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신라와 제휴하여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대 고구려 공동 방위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백제에서는 내분으 로 말미암아 동성왕이 시해(弑害)된 것을 계기로 한때 혼란이 야 기되었으나 이윽고 무령왕(武寧王 : 501∼522)이 즉위하면서부터 또다시 안정을 되찾아 본격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방위태세를 강화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는 고구려가 동예(東濊)의 군사를 동원하여 시도 한 남침을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가 있었다. 그후 성왕(聖王 : 52 3∼553)이 즉위하자 백제는 군사력 강화 작업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대고구려 방위 태세를 '대고구려 공격 태세'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백제는 신라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551년에 대대적인 대고구려 침공작전을 개시한 결과 고구려가 점 유하고 있던 한강 유역의 6군(六郡)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을 거두 었다. 그러나 동맹국인 신라의 기습적 침공으로 말미암아 백제는 한강 유역의 6군을 신라에게 탈취당하고 말았다. 그후 백제는 554년에 대가야(大伽倻)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신라 에 보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성왕이 관산성(管山城 : 옥천) 전투에서 전사하자 국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위덕왕(威德王 : 554∼597)은 재위 50여 년 동안 방위 태세를 수세(守勢)로 전환 하여 내실을 공고히 하는 데에만 주력하였다. 그 결과, 무왕(武王 : 600∼640)대에 이르러서 백제는 비로소 국력을 회복하여 고구려 와 신라에 대한 방위 태세를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고 구려는 수(隋)의 거듭된 침공을 받고 있던 터였으므로 백제가 군 사력을 증강하여 대 고구려 방위태세를 공격태세로 전환하고 배후 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제제를 가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는 이때부터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서 벗어나 신라 침공에 전력을 기울일 수가 있게 되었다. 그후 백제는 빈번하게 신라에 대한 보복침공을 감행하여 타격을 가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다소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지나치게 군사력 강화에 주력한 나 머지 도리어 국력이 크게 소모되어 마침내 말기적 현상을 초래하 게 되었다.

3) 신라의 방위 태세

신라는 6부(六部)의 연합체로서 출범한 연맹국가였으므로 6부의 군사조직을 근간으로 하여 이른바 동기(東畿)·남기(南畿)·서기 (西畿)·북기(北畿)·막야(莫耶) 등 6정(六停)을 편성하였다. 이 들 6정은 초기에는 주로 수도 경비를 담당하기 위한 중앙군(中央 軍)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6세기 초기부터 그 배치지역이 점차 수도권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됨에 따라, 6정은 단순히 중앙군이 아닌, 신라 국방력의 주력으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하였 다.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 500∼513)과 법흥왕(法興王 : 514∼ 539) 양대의 40여 년을 경과하면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통치체 제를 공고히 하고 중국 북조의 북위(北魏)와 교류하면서 선진문물 을 수입함으로써 이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후, 6세기 중엽의 진흥왕(眞興王 : 540∼575)대에 이르러 신 라는 모든 군사조직의 지휘권을 군정 담당부서인 병부(兵部)에 귀 속시켜 종전의 수세적 전략을 공세적 전략으로 전환하고 적극적인 영토 확장 사업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신라는 551년에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상류지역의 10군(郡) 을 점령하고, 이어 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한 한강 하류지역의 6군 을 탈취함으로써 한강 유역 일대를 독점하였다. 신라는 영토확장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6정의 개별부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대당(大幢)을 편성하고, 이어서 점령 지에 새로 설치된 주(州)에 상주정(上州停)·신주정(新州停)·하 주정(下州停)·비열홀정(比列忽停)·실직정(悉直停) 등의 군사집 단을 편성하였다. 각 정의 소속군사는 해당 지역의 주민들로서, 평상시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비상시에 동원되어 군사(軍師)의 지 시에 따라 전투부대로 편성하도록 되어 있는 병농일치의 동원체제 였다. 또한, 군(軍)의 부대편성도 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병농일 치의 동원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신라는 화랑도(花郞徒)를 육성하여 국가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인재를 배출하고 상무적 기풍을 진작시켜 국민의 단결을 공고히 한 바탕 위에 중앙에서 진 골귀족을 주·현에 파견하여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여 군 사 우위의 병영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강력한 방위 태세를 유지해 나갔다. 이와 같은 국방체제하에서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영토를 잠식하여 서쪽으로는 한강 유역으로부터 동북쪽으로는 함 흥평야 일대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판도를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6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는 임진강과 그 상류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고구려와의 경계를 이루고, 백제와는 아산만 (牙山灣)에서 차령(車嶺)을 거쳐 관산성(옥천)을 연하는 선과 소 백산맥 중남부 산악지역을 경계로 삼게 되었다. 이로부터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있던 영토를 서해안과 동해안 일대까지 확 장함으로써 강적인 고구려와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국경에서 대치 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는 실지 회복을 위한 고구려와 백제의 부단한 공격 을 받게 되었으며, 그에 대항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위태세를 갖추 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진지왕(眞智王 : 576∼578)대에 이르러 국왕의 무능으로 말미암 아 신라의 방위 태세는 한때 해이되는 사태가 야기되었으나 진평 왕(眞平王 : 579∼631)의 즉위를 계기로 다시 강화되었다. 진평왕 이 즉위한 10여 년에 걸쳐서 신라는 각종 행정부서를 신설하거나 기능을 세분화하여 운영체제를 개선하는 등 관제를 재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신라는 영토 확장과 국경선 신장에 부응할 수 있 는 정치·군사·경제적 측면의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방위태세의 능률을 제고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신라는 국방력의 강화와 통치체제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내실 을 공고히 하게 되자 6세기부터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隋)와도 긴 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당시의 고구려는 수와의 패권 경쟁에만 주력하고 있었으 므로 신라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견제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신 라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흐름에 힘입어 6세기 말까지 인접국인 고 구려나 백제의 무력침공을 받지 않고 상당기간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자, 비로서 602년과 603년에 걸 쳐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신라는 진평왕 즉위 후 20여 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이 개편한 관제를 성 공적으로 정착시킨 결과, 진흥왕대에 광범위하게 신장된 국경지역 에 대한 방위태세를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신라는 이와 같은 힘을 바탕으로 하여 백제의 침공군을 아모성(阿莫城 : 운봉)에서 물리친 데에 이어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고구려의 침공군을 패 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598년에 수 문제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고구려가 신라를 수의 유력한 지원세력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위협을 가 중시킴에 따라, 신라의 위기는 심화되었다. 이에 신라는 대수 외 교활동을 강화하여 수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고구려의 위 협을 견제하려고 기도하였다. 그 결과, 611년에 신라의 출병 요청 으로 이듬해(612)에 고구려가 수의 대규모 무력침공을 받자 큰 혼 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신라의 대고구려 방위태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외교적인 활동을 통하여 군사력을 보완하려는 신라의 정책은 고구려의 대북방 항쟁력을 현저히 약화시킴으로써 중국의 수가 고구려 침공작전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