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 고구려 대 수·당 전쟁의 특성

고구려 대 수·당 전쟁(高句麗對隋唐戰爭) 은 고구려(高句麗)가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는 50여 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서 수(隋)의 4차(598, 612, 613, 614)와 당(唐)의 2차(645, 647)에 걸친 침공에 맞서 싸워 이를 격퇴시킨 동북아시아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란이었다. 고구려는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광개토왕(廣開土王)의 활발한 정복사업에 의하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이래, 중국 대륙의 제국(諸國)과는 주로 요하(遼河)를 경계로 하여 대치하는 형세를 유지하였다. 요하와 그 지류(支流)들로 구성된 하류 이서의 '요서(遼西)'지역은 대부분이 소택지대(沼澤地帶)로 되어 있어, 특히 우기(雨期)가 되면 인마(人馬)의 통행이 불가능한 애로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고구려와 중국이라는 양대 세력 사이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에는 천연적인 장애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요하 이동의 '요동(遼東)'지역은 '요서'지역보다도 양호한 농경 여건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 많았다. 따라서, 중국 대륙의 통일제국인 수·당은 국내의 안정과 더불어 요동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이를 동방의 보루로 삼으려는 야 욕을 노출시켰던 것이며, 반면에 고구려는 수·당의 이와 같은 침 략기도를 좌절시키고 요동지역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여 이를 대 중국 방어선의 안전지대(安全地帶)로 삼으려 하였다. 이 같이 요동지역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중국이라는 양대 세력집 단의 이해가 상충되자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고조되어 갔다. 더욱 이 중국의 장기적인 분열과 혼란을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룩한 한 족왕조(漢族王朝)인 수 제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구려 의 자주적인 태도는 수의 고구려 침공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네 차례에 걸친 고·수 전쟁(高隋戰爭)에서 수가 고구려에 패퇴되자, 이로써 한족(漢族)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실추되어 양대 세력의 관 계는 민족적 감정 대립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 제국이 등장하면서부터 더 한층 심화되어 갔 다. 이는 고·수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수 제국이 멸망하 였다고 판단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와 중 국 사이에는 4차에 걸친 고·수 전쟁에 이어서 2차에 걸친 고·당 전쟁(高唐戰爭)이 발발하게 되었다.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모두 6차에 걸쳐 전개되 었던 이 대 수·당 전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 다.

첫째, 이 전쟁은 한민족(韓民族)이 한족(漢族)의 통일국가와 싸 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고구려는 동천왕(東川王) 20년(246)에 위장(魏將) 관구검( 丘 儉)이 이끄는 1만 명의 침공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342)에는 또 다시 전연(前燕)의 모용황 (慕容 )이 거느린 4만 군대의 침입을 받는 등, 중국 대륙으로부 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들의 침략 규모는 수만 명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이에 대항하는 고구려의 병력 규모 또한 침략군의 병력 규모를 초과하지 못하였다. 3세기 중반부터 4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있어서의 중국은 강력한 통일제국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관계로 대규모적인 군사 를 동원할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과 고구려 의 전쟁 규모 또한 비교적 소규모의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에 비하여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중국 대 륙을 통일한 수 제국은 광범위한 영토와 2천4백여만 명의 인력을 확보하여 전대에 비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 제국은 이미 제1차 고구려 침공(598) 당시에 수륙 군 30만을 동원하였으며, 제2차 침공(612) 때에는 좌우 각 12군씩 총 24군으로 편성된 1백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함으로써 이 를 '2백만 대군'이라고 대내외에 선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어 서 제3차 침공(613) 때에는 30만 대군이 동원되었으며, 제4차 침 공(614) 때에도 이와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수 제국의 뒤를 이어 통일제국을 건설한 당 제국도 제1차 고· 당 전쟁(645)에서 고구려 원정에 10만이 넘는 정예군을 동원하였 으며, 제2차 침공(647) 대에는 비교적 소규모라고 할 수 있는 수 만 명의 정예병력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변방지역을 교란시키면서 그 이듬해에는 일거에 3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를 침공한다는 전략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측에서도 이와 같은 수·당 제국의 대규모 침공에 맞서서 매번 최소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싸웠다. 그리하여 이 전쟁은 무리한 소모전을 거듭한 끝에 수 제국이 먼저 멸망하고 고 구려도 수·당의 침공 야욕을 좌절시키는 데에는 일단 성과를 거 두었으나, 과도한 군비(軍費) 소모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진한 결 과, 끝내는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함으로써 무모한 소모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교훈 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 전쟁은 한민족(韓民族)이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에 대 항하여 가장 잘 싸운 사례의 하나였다. 고구려군은 수·당군이 침공해 올 때마다 그에 대항하여 뛰어난 수성전술(守城戰術)을 구사함으로써 그들의 내륙진출을 억제하고 급기야는 스스로 퇴각하여 물러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다. 수가 네 차례 고구려 침공전쟁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제2차 고·수 전쟁과 제3차 고·수 전쟁에서 모두 패퇴한 것은 고구려인 들이 요동성을 끝까지 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2차 고·수 전쟁 당시에 요동성(遼東城)에서 돈좌된 수군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30만 별동부대를 고구려 수도 평양으로 진출시키자, 고구려군이 이들을 섬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은 한민족 전란사에 길이 남을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10만이 넘는 대군이 동원되었던 제1차 고·당 전쟁(645) 에서 안시성의 고구려인들은 외부지원이 완전히 차단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였다. 당군은 수대(隋代) 이래로 개발된 온갖 공성장비들을 동원하고 토산(土山)을 축조하는 등, 새로운 공성전 술을 도입하여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였으나, 안시 성 군민들이 치밀한 수성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당군의 이러한 기도 는 무산되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는 고구려가 전력의 전반적인 열세에도 불 구하고 주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하여 전세를 역전시킴 으로써, 전쟁에 있어서의 승패는 병력(兵力)의 다과(多寡)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값진 교훈을 남겼다.

셋째, 이 전쟁은 전투에 있어서 기상의 변화와 지형지물의 이용 등, 작전지역의 환경적 특징과 중요성이 뚜렷이 부각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고구려와 수·당 제국은 요하를 경계로 하여 양분된 요동과 요 서지역을 각각 지배권 안에 넣은 채로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었 다. 따라서 고구려는 제2차 고·수 전쟁 당시에 자연 장애물인 요 하를 이용하여 수군의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후방지역에서의 대적 태세를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도록 하는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군이 살수대첩을 통하여 수군 별 동부대 30만 대군을 섬멸한 것은 그들이 작전지역의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적에게 타격을 가한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대 수·당 전쟁의 주요 작전지역이었던 요동지방은 기상 변화가 극심하여, 우기(雨期)에는 집중호우로 요하와 그 지류들이 범람하였으며, 가을에는 때아닌 한파가 몰아치는 경우도 허다하였 다. 따라서, 고구려군은 적의 침공에 직면해서는 장기적인 농성작 전을 전개함으로써 이러한 기상 이변에 의하여 그들이 간접적으로 타격을 입도록 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의 이와 같은 전술 에 말려든 당군은 그 주력부대가 요동지역에 발이 묶여 내륙으로 진출해 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철군하곤 하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작전지역의 기상과 지형지물에 익숙한 방어군 (防禦軍)이 이러한 제반의 조건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무 모하게 강공작전을 전개하는 침공군을 물리쳐 승리한 전투의 전형 (典型)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이 전쟁은 육로군(陸路軍)과 수로군(水路軍)의 협동작전 이 그 어느때보다도 강조된 전례였다. 수·당의 육로군은 여러 갈래로 얽힌 요하의 지류들을 도하하면 서 장거리를 행군한 끝에 가까스로 요동지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요동지역에 진입한 이후부터는 보급의 지연 또는 두절이라는 또다른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수·당 침공군 을 지원해야 할 치중부대도 반드시 이 요하 연안의 소택지대를 통 과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뿐 아니라,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였던 관 계로 조달업무 수행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당은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수로군을 편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군량 및 보급품을 해로로 운반하여 요동반도 남단 에서 육로군을 지원하도록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 수로군에게는 육로군에 대한 병참지원 임무 이외에 도 육로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시기에 맞추어 대동 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을 협공하는 임무가 추가로 부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당군의 이와 같은 작전기도는 그들의 육로군 이 요동에서 돈좌되어 버려 수륙군 상호간에 협조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결국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육로군과 수로군의 효과적인 협동작전 수행 여부가 전쟁의 승패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입증해 주 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이 전쟁은 고대(古代)의 재래식 전쟁이 보여줄 수 있는 전투의 유형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였다. 고구려는 요동의 주요지역에 다수의 성곽을 축조하여 이를 요새 화함으로써 지역방위의 보루로 삼았다. 이들 각 성(城)은 군량과 무기를 충분히 비축하고 있었으므로 유사시에는 장기간에 걸쳐 적 과 대치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 수·당 전쟁 기간중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전투는 성곽을 사 이에 두고 이를 함락시키려는 수·당의 침공군과 이를 고수하려는 고구려군 사이의 공방전으로 전개되었다. 수·당군은 성곽을 함락 시키기 위하여 충차·비루·발석차·팔륜누거 등과 같은 각종 공 성장비(攻城裝備)들을 동원하였으며, 고구려군은 전통적인 궁시 (弓矢)와 사거리가 긴 쇠뇌·발석차 등을 이용하여 적의 접근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돌격부대가 성벽을 무너뜨리고 입성하려 할 때에 미리 준비해 둔 목책으로 적의 입성통로를 신속히 봉쇄함으 로써 위기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전쟁은 일반적으로 성곽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의 유형을 보이고 있었던 바, 이는 특히 동아 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수 많은 재래식 전쟁의 전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고구려 대 수·당 전쟁의 개관

고·수 전쟁이 일어날 무렵의 동아시아 세계는 고구려를 중심으 로 한 돌궐·백제·왜 등의 남북세력(南北勢力)과 수와 신라의 연 결에 의하여 형성된 동서세력(東西勢力)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 다. 그러한 관계로 남북세력은 그들에게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수 제국에 대항하려 하였으며 동서세력인 수와 신라도 남북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중국대륙과 한반도에서 각각 패권을 장악하 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양대 진영의 맹주격인 고구려와 수 가 이와 같은 상황을 대변하여 군사적인 격돌을 벌이게 되었던 바, 바로 이것이 고·수 전쟁이었다. 고구려는 이미 평원왕 말년부터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하기 시 작하였다. 평원왕은 수 건국에 뒤따라 통일의 추세를 보이기 시작 하는 중국의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량을 비축하는 한편으 로 은밀히 중국인 무기제조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무기를 제조·수 선하는 등, 군비증강에 주력하였다. 평원왕대의 군비증강 노력에 힘입어 고구려는 그로부터 10여 년 이 경과한 영양왕 9년(598)에 이르러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 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하여 수와 무력대결에 자신감을 얻게 된 고구려는 수에 대한 초기적 공세로서 요서지방을 공격하여 수 의 전력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영양왕은 말갈 군사 1 만 명을 이끌고 요서지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는데, 이에 대하 여 수군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더 이상의 접촉을 중지하고 신속히 요동지방으로 퇴각하여 대수 국경 방어태세를 더 한층 강화시켰 다. 이로써 고구려는 수의 전력을 탐색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 였으나, 수는 이 사건을 차후에 그들이 고구려를 침공할 명분으로 내세움으로써, 제1차 고·수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수군은 598년에 육로군을 주력으로 하고 수로군을 지 원부대로 하여 편성된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침공을 단행 하였다. 그러나 침공군의 주력부대인 육로군은 요하 일대에서 홍 수(洪水)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막대한 병력을 손실당한 끝 에 지리멸렬 상태에서 철수하였으며, 수로군도 항진 도중에 풍랑 을 만나 허다한 인명과 장비를 잃은 채로 동래항으로 귀항하고 말 았다. 제1차 고·수 전쟁에서 수의 이와 같은 실패는, 지나치게 의욕만을 앞세운 수군이 교전 상대국인 고구려의 군세를 과소평가 한 나머지, 작전지역의 특수한 지형·기후 등에 관한 정찰활동을 소홀히 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였다. 수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제1차 고·수 전쟁에서의 이와 같 은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황제로 즉위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서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써 고구려 침공부대 의 기동로와 작전지역에 관하여 주도면밀한 정보수집활동을 전개 하였다. 이와 같은 전쟁 준비작업의 완료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수 제국의 통치기반이 안정되자, 수 양제는 612년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수는 육로군을 주력으로 하고 수로군을 지원부대로 한 24군으로 편성된 1백만이 넘는 대군을 대고구려 전선(戰線)에 투입하였는 데, 침공군의 주공부대로 편성된 육로군은 초전(初戰)의 요하 도 하작전에서 고구려군으로부터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고구려군은 20여 일 동안 침공군의 도하를 저지하여 그들의 예봉(銳鋒)을 둔 화시킴으로써 요동지역의 제성이 전투태세를 더 한층 강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해 주기도 하였다. 고전 끝에 가까스로 요동지역에 진입한 수의 육로군은 4월 하순 부터 6월 초순까지 수 차례에 걸쳐서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막대 한 전력(戰力)만을 손실한 채 전황(戰況)은 고착상태에 빠지고 말 았다. 그러자, 양제는 우기가 닥쳐올 경우 수군이 진퇴양난에 빠 질 것을 우려하여 정예군 30만을 차출하여 편성한 별동부대를 고 구려 수도 평양으로 진출시켜 고구려 방어군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자 하였다. 그러나 수군의 별동부대는 을지문덕의 유인전술에 말 려들어 살수전투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한편, 지원부대인 수로군도 3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산동반도 에서 서해를 가로질러 패수(浿水 : 대동강)를 거슬러 올라가 평양 성으로 직진하였으나, 고구려군의 매복작전에 의하여 패퇴되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군은 수륙 양면에서 수의 침공군에 타격을 가하 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후 613년 4월에 재발한 제3차 고·수 전쟁에서도 양군은 요동 성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벌였다. 30만 정예군으로 고구려를 재침 한 수는 앞서의 제2차 고·수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요동지역의 관문인 요동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각종의 신형 공성장비와 새로운 공성기술을 총동원하여 치열한 공세를 가하였으나, 공격을 시작한 지 20여 일이 지나도록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수의 후방지역에서 군량조달의 책임을 맡고 있던 예 부상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와 관련하여 병부시랑 곡사정 이 고구려 진영으로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수 양제는 하는 수 없이 요동성 공략을 포기하고 고구려 영내에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본국의 정세가 어수선해지자, 수 양제는 고구려 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될 경우에 침공군이 진퇴양난의 처지에 처하게 될 경우를 상정하고 서둘러 철군준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수군은 각종 공성장비와 다량의 보급품들을 요동성 주 변의 진중에 고스란히 남겨둔 채로 야음을 이용하여 은밀히 퇴각 하였다. 이로써 수는 제3차 고·수 전쟁에서도 참패한 것이나 다 름없을 정도로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대 고구려 전쟁에서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수 양제는 614 년에 또 다시 제4차 고·수 전쟁의 전단을 열었다. 그러나 수는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국내의 혼란이 심화되자, 고구려가 제의한 외교적 타협안을 수락하고 공격을 개시하기 직전에 요하에서 기수 를 돌려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수 제국 사이에는 전쟁에 세 차례나 거듭되 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제2차 고·수 전쟁과 제3차 고·수 전쟁에 서 뛰어난 수성전술을 구사하여 요동성에서 수군의 진로를 차단함 으로써 결정적인 승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수군은 대 고구려 전쟁에서 번번히 심대한 손실을 당한 결과, 급기야는 제국 (帝國) 그 자체가 멸망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 제국이 멸망한 뒤를 이어 태원유수 이연(李淵)이 당 제국을 건설하자, 고·당 양국간에는 한동안 평화적 관계가 지속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고·수 전쟁때 발생한 포로를 교환하고 문화 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건국 초기의 당 제국은 국내의 안정확보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선결과제 였으므로 고구려와의 잠정적인 평화의 지속을 희망하였다. 또한 네 차례의 고·수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피폐한 고구려도 더 이상 무리한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과의 충돌을 회피하 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당 양국간의 관계는 고조를 이어 태종이 즉위한 후 10여 년이 지난 64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매우 우호적으로 유지 되었다. 당 제국은 서역지방 공략에 몰두하면서 고구려와 충돌을 자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평화는 상당기간 지속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당 제국이 서역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원의 패자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다지게 되자, 고구려에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함으로써 점차로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특히, 당 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집권한 이후로 대 신라 정책을 강화한 데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나타내면서 이를 빌미로 삼아 고구려의 외교노선을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고구려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신라의 외교적인 책략 에 이끌려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여 대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당의 요구를 묵살한 채 신라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자, 국왕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연 개소문의 죄상(罪狀)을 응징한다는 대외적 명분을 내세우고 645년 에 고구려 침공을 단행하였다. 이때 당군이 고·수 전쟁 당시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을 자랑하 던 요동성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는 광범위한 영토와 인적 손실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이 선전하여 당군의 진로를 차단하자 전황은 이곳에서 고착되어 전반적인 작전에 차질 을 초래하여 끝내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의 대군은 안시성이라는 작은 성에서 돈좌되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두 달 이상의 시일을 보내게 되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한파(寒波)가 밀려오기 전에 요하 유역에서 벗어 나려고 서둘러서 철군을 개시하였다. 한편, 당의 수로군도 초전에는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을 함락 시키고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여 크게 기세를 올렸으나, 육로군이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함에 따라, 이들도 퇴각하여 산동반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군은 제1차 고·당 전쟁을 계기로 하여 대 고구려 전략을 전 면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군은 이후로부터는 항상 소 규모 부대를 파견하여 고구려 변경지역의 긴장을 유발함으로써 점 진적으로 고구려의 국력을 소모시킨다는 일종의 고사작전(枯死作 戰)을 구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략 개념에 따라 당 이 647년에 제2차 고·당 전쟁을 일으켜 이 교란작전을 전개하자, 고구려의 변경지역은 물론 내륙지역에까지 큰 혼란에 빠지게 되 어, 당의 대 고구려 전략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유언에 따라 당이 고구려 침공을 중지함으로 써 제2차 고·당 전쟁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당분 간 양국간에는 소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