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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19일 개설입니다

 

 

고선지(高仙芝)장군

 

   일단은 넋두리를 좀 풀겠습니다.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된 때가 옛날옛날-_-의 계몽사 어린이용 한국사전집이었습니다. 담당시대였던 통일신라시대의 모든 이야기들중에서 단연 인상적이었던 이야기였습니다마는, 그 이후로는 관련 자료를 접할 일이 없었습니-_-다. 자료가 참으로 빈약하더라는. 그러다 올 초 KBS에서 역사 스페셜 신년 특집으로 2부에 걸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영상으로 보여준다는 것 빼고는 어렸을 때 본 내용에서 벗어남이 없더라-_-는.

   개인적으로 장군 이야기에서 관심있었던 부분이라면 서기 747년의 원정때에 힌두쿠시 준령을 넘던 험한 원정길 부분과 사라센 제국과 붙은 탈라스 전투에 관련된 부분이었는데, 볼 수 있었던 어지간한 글들은 과정과 수치자료는 없이 그 결과만 보여주었고, 그나마 저 두 이야기에서 약간이나마 그 과정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참조한 1차사료는 중국 사서인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과 '삼국사기' 정도가 되겠는데, 삼국사기에서 본 내용은 참으로 빈약하였고, 나머지는 한글본으로는 볼 수가 없더군요. 그리하여 이 글은 한국사전집에서 본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아동용 표현-_-을 개수하고, KBS의 특집에서 내용의 출처 사료를 찾아다 붙여 달았고, 야후 백과사전에서 소소한 관련정보를 찾아다 붙인 글입니다. 예전부터 올리려다가 버벅댄 이유가 당최 관련지도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 글도 없는데 하물며 지도야 - 적당한 녀석이나 붙이고 말로 때워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모든 일이 삽질인게, 얼마전에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고선지 평전'이라는 책이 출간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대로 알고 보시려면 저거 구입해보시는게 천배만배 낫겠죠. 집쥔도 사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당사 부분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는데, '자치통감'도 한글번역본으로 나오고 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 그런데 비싸더군-_-요.

 

장군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고구려가 망한 뒤에 당나라는 망국 고구려인들의 저항운동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삼국사기에서는 '보장왕을 비롯한 20만명', 자치통감에서는 '3만8천여가구'로 언급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중국의 오지로 강제이주를 시키게 된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이 3만8천여 가구 중에 하나였을 터인데, 당나라의 하서군(河西軍)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우고 장군이 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기록에서 장군의 출생연월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의문처리된 것으로 보이고, 고선지 장군은 20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안서(安西)에 가서 아버지의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었으나, 중국인 출신의 안서 절도사(安西節度使)였던 전인완(田仁琬)이나 개가운(蓋嘉運)에게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이민족 출신인 부몽영찰(夫蒙靈樽)이 부임하였을 때, 그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고 한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중원의 침략을 방어하고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통제를 위하여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匈奴), 돌궐(突厥), 토번(吐蕃)족들과 끊임 없는 전투를 벌여오고 있었다. 당대에는, 2대 태종(太宗, 재위 626~649) 시대에는 내분으로 인하여 약해진 서돌궐을 제압하여 서역을 통제할 수 있었는데, 이 당 태종은 중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황제 자리에 오른 것 뿐만 아니라, 북방이 유목민들 또한 복속시키고 그들에게 천가한(天可汗)의 존호를 받은, 이민족을 제대로 제압한 몇 안되는 중국 황제중의 하나였다. 사족을 달자면,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고구려는 이 호걸의 압박을 물리친 진짜 대단하면서도 운 없던 나라라고 생각이 되더라는.

 
(뜬금없이) 당 태종(太宗) 이세민

 

   이후 능력없는 황제들과 야심에 찬 2명의 황후들로 인한 혼란시대를 지나, 개원의 치로 유명한 8대 현종(玄宗, 재위 713~756)의 명을 받고 고선지가 서역 정벌에 나섰을 때에는 서역의 정세는 크게 달라져 있었는데, 아라비아반도에서 알라에 대한 믿음 아래에 불같이 일어난 사라센 제국이 파미르 고원을 향해 크게 세력을 내뻗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서돌궐이 중간에 끼어 있어 직접 부딪칠 때가 없었으나, 이제는 파미르 고원을 무대로 당나라와 세력을 판가름하게 된 것이었다. 고선지 장군은 사라센 제국과 맞서기 전에 우선 토번족과 사라센 제국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토번족은 당나라의 서쪽 진출에 늘 위협을 주던 티벳 고원의 억센 종족이었는데, 이들은 한 때 천산북로(天山北路)로 진출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산을 넘어 아무르 강의 상류 등지로 나아가 사라센 제국과 손을 잡고 당나라의 세력을 꺾으려 하였고, 당의 동맹국이었던 소발률(小勃律)국에는 공주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고, 이리하여 소발률국을 비롯한 20여개국이 당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상황이었다.

 

파미르 고원을 넘은 소발률 정벌전

   현종 6년인 서기 747년 3월, 고선지 장군은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가 되어 당나라의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라 안서도호부를 떠난 지 40여일 만에 카시가르에 이르렀고, 이곳을 떠나 파미르 고원을 바라보며 행군한 지 20여일 만에는 터어키의 카시쿠르간에 이르렀으며, 다시 20일 후에는 파미르 고원의 가장 높은 곳을 지나고, 파미르 강을 건너 오늘날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오식닉국(五識匿國)에 이르렀을 때에는 또 20여 일이 지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고선지 장군은 군을 셋으로 나누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목표로 진군하였다.

 
원정의 여로(날림)

 

   서기 747년 7월, 연운보 앞의 파륵 강에 집결한 고선지군은 강가에 제단을 마련하여 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에 기병 몇 사람을 뽑아 먼저 강을 건너게 하여 전군을 고무한 후 야간에 전군 도하를 시도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군사들이 무사히 강을 다 건너자, 고선지 장군은 통쾌한 표정을 지으며 감군인 변영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아군의 절반정도가 도하하였을 때 적에게 기습을 당했더라면 우리는 패했을 터이나, 이제 모든 군이 도하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적의 운명을 내 손에 쥐어 준 것이다." 당의 군사들은 1만의 토번 주둔군을 여지없이 쳐부수기 시작하였고, 기습을 당한 토번 부대는 한나절쯤 되어 무너져 버렸으며,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 연운보 전투에서 5천의 적군을 죽이고, 1천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필의 말과 또한 상당한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전투 후 고선지 장군은 3천의 군사를 두어 후방을 지키게 하고 7천을 이끌고 전진을 시작하여,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중국 신강지역 사이의 통로가 되는, 와칸 계곡의 해발 3천798미터의 바로길 고개를 넘고, 그에 이어 해발 4천575미터인 다르코트 산을 향해 나아갔다. 다르코트 산은 구당서에 탄구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진(東晉)의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은 그의 여행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이 눈산에는 독기를 뿜는 독룡이 있다.
만약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비위를 건드리면 만에 하나도 살아남기 어렵다.

 

   고선지 장군의 이 행군로는, 1906년 5월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 경이 가장 현대적인 장비를 갖춘 7,8명의 대원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 길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낸 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구당서에 의하면, 연운보에서 3일을 행군하여 다르코트 산 정상에 이르자, 군사들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타나자 사기가 떨어지며 이렇게들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도대체 절도사 나으리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 건가?" 그 때 소발률 복장을 한 기병 20명이 불쑥 나타나 고선지 장군 앞으로 다가와, "소신들은 소발률국의 군사들입니다. 위대하신 장군님의 부하로 있고 싶어 찾아왔으니 부디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꿇어 엎드린 채 간곡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고선지 장군의 계략으로, 측근병사들에게 소발률 병사들의 복장을 입힌 다음에, 거짓으로 항복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튼, 이로 인해 사기가 오른 병사들은 험한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였고, 소발률국의 수도인 아노월(阿弩越)로 진격해내려갔다.

 
장군과 당군이 넘어간 다르코트 산길

 

   아노월을 목표로 하여 야신 계곡을 따라 절벽 길을 내려간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고선지 장군은 아노월 성의 뒤를 갑작스레 치기 위해, 1천여 명의 별동대를 길기트 강을 따라 먼저 보냈다. 드디어 적진에서 혼란이 일기 시작하였고, 이 틈을 타 고선지 장군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아노월 성의 앞쪽을 들이쳤다. 그러자 성 안에서 난리가 일어났는데, 성을 끝까지 지키려는 장수 6명이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포박되어버린 것이었다. 성 안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밖으로 도주하려 하다가 피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고선지 장군의 말에 따라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질서를 찾았고, 포박된 6명의 장수를 스스로 참수시켰다. 당나라 군의 침입을 들은 토번 지원군이 소발률국을 돕기 위하여 급히 진군하였으나, 길기트 강과 인더스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등나무다리를 간발의 차이로 끊어 지원군의 전진을 막았다.

   증원군의 기대가 사라진 소발률국의 왕과 대소신료들은 고선지 앞에 나와 항복하였고, 이 때까 당나라 현종 6년인 서기 747년 7월이었다. 신당서에 의하면 이 때의 원정으로 불름(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등 서역72개국이 당나라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고선지 장군은 그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 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이 원정에 대해 스타인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따를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이다."

 

세계 역사의 흐름의 분기점이 되는 탈라스 전투

   당나라 현종 9년인 서기 750년, 고선지 장군은 현종의 명에 따라 다시 서역 원정의 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파미르 고원 서쪽 시르강 중류에 있는 석국(石國, 타시켄트)를 정복하러 가는 것이었다. 석국을 비롯한 지역의 9국은 당나라와 사라센 제국사이에서 양면정책을 폈는데, 때마침 사라센 쪽으로 기울어졌고, 이에 당나라에서는 석국을 정벌하기로 하였다.

 
타시켄트의 위치

 

   아랍측 사료에 의하면 10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린 고선지 장군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는 원정을 단행, 서기 751년 1월 석국의 성밖에 이르렀고 현지군과 전투에 들어갔다. 승리한 당군은 밀물같이 성 안으로 몰려들어갔고, 살아남은 적군은 항복하였으며, 왕과 공주는 포로로서 장안(長安)으로 압송되었다. 노획한 보물은 모두 100여섬이나 되었고, 황금은 낙타로 대여섯바리나 되었으며, 노획한 말과 무기는 셀 수 없었다. 이에 당 현종은 고선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벼슬을 내려 그 공로를 기렸다. 허나 당군은 석국을 너무 철저히 약탈하여 폐허로 만든 데에다가, 거기에다가 장안으로 이송된 석국의 왕이 강경파 문신들에 의해 참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서역 여러나라들은 흥분하였으며,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라센 제국은 이들을 꼬드겨 연맹군을 조직하여 당에 대항할 태세를 취하였다.

   현종 10년인 서기 751년, 고선지 장군은 사라센 제국의 연맹군을 치기 위해 7만의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 고원 북쪽에 있는 탈라스로 갔다. 전투가 벌어진 탈라스강은 천산산맥의 지맥인 탈라스 연산(連山)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러내리다가 사막으로 사라지는 강으로, 아라비아어로는 탈라즈, 중국 사서(史書)에는 도뢰수(都賴水) 또는 달라사(羅斯)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랍측 사료에 의하면 억울하게 참수당한 석국왕의 아들이 당시 호라산의 총독이었던 아부 무슬림에게 도움을 요처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지하드 이븐 살리히 장군을 사령관으로 한 사라센 군대가 파병되었다고 한다.

 
전장이었을 탈라스 평원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 전투는 꽤 관심이 가는 것이,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지 백 수십년 만에 강력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비잔틴 제국의 부흥의 근거지였던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간단히 점령하고 제국을 패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며, 아프리카 서쪽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의 커다란 판도를 자랑하는 사라센 제국과, 당시까지의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당 제국,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이 두 제국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툰 세기적 싸움이었기에 관심이 갈만한 일이었다는.

   서기 751년 7월, 진을 친 지 며칠 후 당군과 사라센 연맹군과의 싸움이 붙었다. 양군은 7월의 무더운 중앙아시아 대륙의 평야에서 5일 밤낮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하는데, 결국은 거짓으로 당군에 합류한 돌궐 계열의 카르륵(葛邏祿)군의 배신으로 인하여 배후를 찔린 당군측의 패배로 전투는 끝났다고 하며, 아랍 사서에 의하면 당군의 대부분의 병력이 사살되고, 2만 정도의 포로가 중동 지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탈라스 전투의 결과 당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은 영원히 파미르 이서의 통제권을 상실하였으며, 부수적인 귀결로, 중동으로 끌려간 중국 포로들에 의하여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되었다는 야사는 유명한 이야기.

   고선지 장군은 귀국 후 사정을 정확히 알기에는 여의치 않으나,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으며,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고 한다. 허나 일선에서는 물러난 상태였으며, 이 때의 고선지 장군의 심정을, 당대의 유명한 시인 두보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만리라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번개보다 더 빠른 걸 세상이 아는데,
청사로 갈기 딴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길을 다시 달릴까

 

   심심하게 묶여있는 고선지 장군의 말을 빗대어 한직으로 물러난 장군의 처지를 읊었다고 하면 될 듯.

 

고선지 장군의 억울한 마지막

   현종 14년인 서기 755년,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 및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의 직위에 있던 안녹산(安祿山)이 범양(范陽, 지금의 북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선지 장군은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에 임명되어 반란군 토벌의 임무를 받게 되었다. 안녹산의 반란군은 낙양(洛陽)을 빼앗고,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장안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때 고선지 장군은 상부 명령대로 섬주(陝洲)를 지키고 한 때 부하였던 절도사 봉상청은 동관(潼關)을 지키고 있었다.

   안녹산의 반란군은 장안의 길목인 동관을 점령하려 하였고, 선발군으로 나간 봉상청에게 반란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고선지 장군은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전략적 요충지였던 동관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명령없이 군대를 이동한 데에 대한 일과, 이동 전에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부창고를 열어 식량과 비단을 부하들에게 나누어준 일을,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그만 어이없이 진중에서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아마 그가 안록산과 같은 이민족이었더 것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을터.

   이리하여 현종 14년인 서기 755년 12월 13일 고선지 장군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맞는 고선지 장군의 모습은 구당서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군사들은 "누명입니다" 라고 외쳤고, 그 소리가 땅을 흔들었으나, 고선지 장군은 함께 참형을 당한 봉상청의 시신을 보면서, "공은 내가 선발했고,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다. 지금 함께 죽으니 이도 모두 운명이로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여기까지...입니다. 언급한 대로 이 글은 십수년전의 가벼운 텍스트에 근거한 부실한 글이고, 더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언급된 책을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_-다. 한국인의 거리개념으로는 매우 멀고 먼 오지에서 무명을 떨친 비운의 한국인이라는 생각에 예전부터 허어~ 해온 이야기를 이제야 한 번 적어봅니-_-다. 마지막으로, 연구를 하여 책을 쓰신 분이 정말로 부러워보이더라는 배부른 돼지의 넋두리를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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