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피까지 보고 가시려면 여기를~(-.-)

 

9. 1943년 이후의 독일 해군 - 대서양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분노가 치민 히틀러는 대양함대를 해체하려고 하나, 사임을 하면서까지 막으려는 레더 제독과, 히틀러의 의도를 알고 취임했으면서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히틀러에게 반대 의견을 올린 되니츠 제독의 노력으로 모든 대형 수상함이 고철화 + 해안포대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갈라먹어야 할 잠수함부대의 총사령관인 되니츠 제독이 살리려고 했다면, 그 필요성이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허나, 미운털이 박힌 이상 과거와 같은 적극적인 활동의 시기는 지나 버렸고, 보급(특히 연료) 문제와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대형 수상함들은 은거지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독일쪽에서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은 대양함대였지만, 상대인 영국의 평가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만약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가 노르웨이에 주저앉아만 있었더라도, 우리 해군은 킹 조지 5세급 2척과 넬슨급 2척을 견제용으로 항상 묶어두어야만 했을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상당히 높은 전력지수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주저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적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위협스런 수상함들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은 각고의 노력을 벌입니다. 노르웨이는 종전까지 독일군 점령지역으로 남아있었는데, 대형 수상함들의 존재도 어느 정도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도 싶습니다.

   지금까지 흘러온 대로 대서양 쪽에 배치된 두 척의 대형 수상함 각각의 이야기를 되는대로 쳐 볼까 합니다. 이후 대서양에서의 이야기도 이 정도면 어지간할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요.

 

샤른호르스트의 마지막

   앞의 도버해협 돌파작전에서 기뢰에 의해 2차의 손상을 입은 샤른호르스트는, 손상에 대한 수리는 끝났으나 여전히 발틱해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43년 초 2회에 걸쳐 북대서양 돌파를 시도했지만, 2번 모두 영국군의 공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3월의 3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악기상을 틈타 북해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1943년 3월부터는 소련으로의 연합측 전쟁물자 수송이 북극해역을 거쳐 무르만스크로 가지 않고 이미 그들이 장악한 지중해를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수송되었고, 무르만스크로의 수송이 재개된 것은 1943년 말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래서 1943년 여름동안은 북극해역에서의 호송선단을 덮칠 기회는 그리 없었습니다.

 

잘나가던 어느 때... 의 샤른호르스트

 

   1943년 8월 초 스피츠베르겐 섬을 기습한다는 작전이 세워졌습니다. 북부그룹 사령관 쿠메츠 해군중장은 이 섬을 공격하기 위해 구축함 6척을 이용하여 육군병사들을 상륙시키고 티르피츠와 샤른호르스트가 지원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9월 초 히틀러로부터 공격작전의 허가가 내려져, 9월 6일 오후 티르피츠와 샤른호르스트는 은거지를 벗어나, 8일 자정에 스피츠베르겐 섬을 도착하였고, 3시간 후에는 병력들을 태운 구축함들이 에이즈 협만으로 진입했습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9월 9일 오후 모든 작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독일군의 상륙당시 스피츠베르겐의 영국군은 독일 함대의 출현을 보고하기는 했으나 이미 대응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고, 급거 잠수함과 경순양함 밸파스트(Belfast), 구축함 임파서블(Impossible)을 스카파 플로에서 출격시켰지만 독일 함대의 포착에는 실패했습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작전 후 샤른호르스트는 알텐 협만 묘박지로 돌아와 랑그 협만에 주저앉고 다른 함정들은 알텐 협만을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1943년 2월 아이슬란드에서 호송작전중인 경순양함 밸파스트 - 그냥 사진이 좋아보여서(--)

 

   1943년 12월 22일 트롬쉐 서쪽 640km 해점에서 독일 항공기가 북쪽으로 향하는 선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호송선단은 상선 17척정도와 유조선 3척으로 구성되어 3~4척의 순양함과 구축함 및 고속 호위함 9척 정도의 호위를 받고 있었는데, 24일 재차 발견되어 소련으로 가는 호송선단임이 확실해지자, 샤른호르스트와 제 4구축함전대의 구축함 5척은 12월 25일 19:00시에, 은거지에서 기어나와 23:00시까지 노르웨이 연안을 빠져나와서 25knot의 속력으로 선단을 추적하였습니다. 계획대로라면 26일 10:00시경에 선단과 접촉할 예정이었으나, 26일 09:21시에 중순양함 '노포크(Norfolk)', 경순양함 '밸파스트'와 '셰필드(Sheffield)'로 구성된 영국 순양함 초계부대를 만납니다. 이들은 레이더로 샤른호르스트를 접촉하고 접근하여 09:24시에 밸파스트가 먼저 포격전을 벌였고, 샤른호르스트는 2발을 얻어맞고, 겨울 북대서양의 악기상에 의해서 09:40시경에 두 집단은 다시 거리가 벌어집니다. 그러나 샤른호르스트의 목적이 호송선단일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 초계부대 사령관 '버네트' 해군 중장은 예상되는 항로를 앞질러 12시 직후에 다시 레이더로 발견을 합니다. 버네트 제독은 예하 순양함과 4척의 구축함들로 함포와 어뢰로 과감하게 공격을 하였으나 타격을 주는 대신에 노포크가 2발을 얻어맞고 함미 포대 사용불능, 승조원 다수 사망, 그리고 함의 거의 모든 레이더장비가 박살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여러 번 출연한 영국 중순양함 노포크. 연돌을 보면 아시겠지만, 당시로도 오래된 현역

 

   영국 초계부대의 방해에 부딪쳐 통상파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된 샤른호르스트의 지휘관 '베이' 제독은 여기서 갑자기 중대한 작전상의 판단착오를 일으켰습니다. 더 이상 공격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고 12:40시에 노르웨이를 향해 회항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압박 때문에 전함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당시 독일 해군 작전의 최우선 순위였고 순양함들과의 포화를 나눈 것이 그런 지시를 생각나게 했다고 하지만, 샤른호르스트와 영국 순양함들의 화력을 비교해보면 그다지 겁먹을 이유가 없었는데, 너무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보여집니다. 거기에다가, 기왕 회항할 생각이면 추적을 확실히 뿌리쳤어야 했고, 겨울의 북대서양의 난바다의 험한 파도는 방향을 잘 이용하면(그러니까, 파도를 정면으로 받는 방향으로) 대형함 쪽이 저항 문제로 더 빠른 속력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영국 순양함들의 감시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강력한 영국 전함의 공격을 후에 받게 됩니다. 2차 접촉 이후에 바네트의 초계부대는 노르웨이로 회항하는 샤른호르스트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계속 추격하는 한편, 연락을 받은 본국 함대 사령장관 '프레이저' 해군 제독은 전함 '듀크 오브 요크(Duke of York - 뒤적뒤적해 본 바에 의하면 번역하면 '요크 공'으로, 보통 영국 왕실에서 임금의 동생을 가르키는 호칭으로 보입니다)'를 출항시켜 샤른호르스트와 맞붙게 합니다.

 

샤른호르스트 샤낭에 큰 역할을 한 영국 전함 '듀크 오브 요크(Duke of York)'

 

   듀크 오브 요크는 일몰께인 16:10시에 샤른호르스트를 레이더로 처음 접촉하여, 버네트 제독 휘하 순양함들의 조명탄 사격으로 샤른호르스트의 위치를 파악하고 16:48시 1만1000m 정도의 거리부터 사격을 시작하여, 3발째에 샤른호르스트의 1번 포탑을 잡습니다. 샤른호르스트는 남은 2개의 포탑으로 응사하였는데, 전파탐지를 겁내어 쓰지 않던 레이더가 그나마 악기상으로 인하여 고장이 나서 레이더 조준 사격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둠 속에서 적함 함포의 발사포연만 가지고 조준을 잡아야 했던 어려운 상태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격으로 상대를 위협해 왔습니다. 18:20시까지 교전이 계속되었으나 샤른호르스트는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우세한 속도를 이용하여 듀크 오브 요크와의 거리를 벌여 교전에서 빠져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마는, 그대로 놓아보낼 생각이 없는 프레이저 제독은 순양함들로 방해를 하면서, 구축함들을 투입하여 어뢰 공격을 가합니다. 마침 듀크 오브 요크의 14inch포를 엔진실에 얻어맞어 속력이 18knot로 떨어진 샤른호르스트는 이 뇌격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후 듀크 오브 요크와 순양함들의 포격에 녹아나간 샤른호르스트는, 19:40시 경에 5knot의 속력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경순양함 자메이카(Jamica), 밸파스트 그리고 구축함들에게 마지막으로 숱한 어뢰를 맞고 북해 한 가운데에 가라앉습니다. 화려한 전적의 마지막으로, 싸움 중에 적어도 13발의 14inch포 / 12발의 6inch포 / 11발의 어뢰를 얻어맞았으며, 1900여 명의 승조원 가운데 단지 36명만이 구조되었습니다.

 

샤른호르스트의 마지막 전투...의 상황도

 

   다음날, 프레이저 제독은 "여러분의 노고에 의하여 강적 샤른호르스트와의 해전은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다. 훗날 이 중의 어떤 해군 사관이 장차 몇 배나 되는 적과 맞서는 열세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샤른호르스트와 같이 용감하게 함을 지휘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말로 샤른호르스트 사냥에 참가한 장병들의 노고와 상대의 감투정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샤른호르스트의 이 마지막 전투는, 독일 대형 수상함의 대서양에서의 마지막 작전, 또 대서양에서의 마지막 전함 대 전함의 포격전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었으니 이름값은 한 것이 아니냐... 도 싶습니다마는. 뭐 하튼.

 

티르피츠의 마지막

   베르겐에서 버티고 있던 티르피츠는 위에서 언급한 9월의 스피츠베르겐 기습시에 샤른호르스트와 같이 지원사격에 나섭니다. 티르피츠는 이 때 유일하게 주포 사격을 해 보았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작전 후 티르피츠는 알텐 협만 묘박지로 돌아와 카아 협만에 투묘하고 대잠방어를 위해 티르피츠 호 주위에는 어떠한 적의 잠수함도 접근이 불가하도록 함정이 드나들 때만 열고 닫는 문이 열려있는 어뢰그물 상자를 둘러치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잘나가던 어느 때... 의 티르피츠

 

   영국군은 이곳에 정박한 티르피츠를 없앨 궁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인간어뢰를 참고로 만든 'X정'이라는 소형 잠항정이었지요. X정은 배수량 30t, 4인승으로 협만 부근까지는 잠수함에 예인되어 항해하여 잠수함 방어망을 돌파하여 5km를 항해하여 티르피츠의 바닥에 시한기뢰를 설치하여 격침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침투시기는 춘분이나 추분 전후가 가장 적기로 고려되고 있었는데, 최초 계획으로는 모두 6척이 있으므로 독일 주력함 3척을 모두 공격한다는 계획하에 9월 10일 6척이 모두 출항했는데, 도중에 고장과 사고로 9명이 행방불명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공격에 나선 것은 모두 3척뿐이었고, 그러는 동안 포켓전함 뤼초우는 독일로 귀환하였고 샤른호르스트는 랑그 협만으로 가 버려, 이들 3척은 모두 티르피츠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알텐 협만의 입구에서 수상주행으로 항해하다가 이어 잠항하여 티르피츠의 함저에 기뢰를 설치하여 08:30분에 폭파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9월 22일 0905시, 티르피츠의 승무원이 대잠방어망의 안쪽에 소형 잠수함으로 보이는 물체를 목격하였고, 고사포장은 수류탄을 싣고 어뢰정으로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를 피해 다시 잠항한 X정들 가운데 먼저 티르피츠의 1번포탑 부분에 북상한 것은 X6이었는데, 이를 발견한 독일군이 X6에 사격을 가해 승무원들은 포로가 되고 이미 설치한 폭약은 독일군에 의해 제거되어버렸습니다. 이러는 동안 다시 일을 끝낸 X7호가 부상하여 이를 발견한 티르피츠의 20mm와 30mm기관포 사격이 있었지만, 1012시에 대폭발을 일으켜 발전기와 주포 사격통제장치등이 파괴되고 함의 모든 조명이 꺼져 버렸습니다. 이 피해는 현지 수리 가능 능력을 초과한 것으로 티르피츠에게는 크나큰 타격이 되었지요. 독일군의 반격으로 X7호는 격침되고 X5호도 발견되어 결국 격침되었지만, 티르피츠는 대양작전을 할 수 없는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므로 일단 영국군의 작전은 성공한 셈이라고 해야 겠지요.

 

석양때를 배경으로 하여... 조용히 숨어-_-있는 티르피츠

 

   독일군 기술자들의 필사적인 복구 노력으로 1944년 3월경 드디어 티르피츠는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이를 탐지하고, 소련으로 향하는 JW-58B선단의 출항을 앞두고 만에 하나 티르피츠가 출격할 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다시 티르피츠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 1944년 4월 3일 '텅스텐'작전을 발동시켰습니다. 바라큐더 함상 공격기들과 전투기 약간을 실은 항모 '빅토리어스(Victorious)'와 '퓨리어스(Furiois)'를 주력으로 호위항모 4척을 더 동원하여 티르피츠 공격에 나섰습니다. 4월 3일 이른 아침, 영국군 항모기동부대는 카 협만 220km정도 지점에 접근하여 공격기 40대와 호위기 40대를 발진하고 폭격대 제 2파도 같은 규모로 발진하였습니다. 우선 전투기들이 티르피츠의 사격통제장치를 파괴하기 위해 기총소사를 가하였고 뒤이어 바라큐더 공격기들이 800kg철갑폭탄, 250kg철갑폭탄, 대잠용 고폭탄등을 집중투하했습니다. 티르피츠는 연막을 치고 산발적인 대공포화로 폭격을 방해했지만 제1파 공격으로 9발의 폭탄을 얻어맞은 다음에 1시간 뒤 벌어진 제2파의 공격에서는 5발의 명중탄을 더 얻어맞고, 승무원 128명이 전사하고 함의 수리에 3개월 이상의 견적이 나왔습니다. 그나마 영국군이 투하한 철갑폭탄은 저공공격으로 충분한 가속도를 얻지 못하여 티르피츠는 더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하자 영국군은 다시 티르피츠 사냥에 나서, 7월 19일 바라큐더 공격기 44대와 전투가 48대가 출격하여 공격했지만 이 시기는 독일군의 조기경계망이 강화되어있어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8월 22~29일에 걸쳐 정규항모 '포미더블(Formidable)', 퓨리어스, '인디패티거블(Indifatigable)' 3척과 경항모 2척을 동원하여 계 4회 연 242대를 투입하여 폭격을 가했으나 이 작전 역시 전혀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11대의 공격기만 상실하고 밀았습니다.

 

영국 해군의 공습에 다구리... 당하고 있는 티르피츠

 

   이처럼 해군항공대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군은 해군 함재기들이 탑재한 폭탄의 위력으로는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으므로,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폭격기를 동원하여 보다 강력한 타격을 가해야 하겠다는 생각 아래에 '톨 보이(Tall Boy)'라고 하는 6t(*_*)폭탄을 탑재한 영국공군 4발 중폭격기인 '랭카스터(Lancaster)'를 이용하여 공격한다는 방침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티르피츠가 웅크리고 있는 카아 협만은 영국에서 발진하는 폭격기의 행동반경 밖이었으므로 다른 출격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공군은 노르웨이에 인접한 소련의 비행장을 이용하는 방안을 생각해냈고, 9월 10일 영국으로부터 랭카스터 폭격기 36대가 발진하여 6대가 중도귀환하고 30대가 아르항게리스크에 착륙했습니다. 이들은 9월 15일에 출격하여 톨 보이 폭탄과 200kg기뢰폭탄을 퍼부었지만 명중한 것은 톨 보이 폭탄 달랑 1발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폭탄 자체가 워낙 위력이 커서 티르피츠의 앞부분 갑판이 대파되고 10m * 16m의 구멍이 뚫려 1000t 이상의 해수가 침수되었고 그 진동으로 엔진이 손상되어 행동태세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티르피츠의 전술적 가치는 없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였지만 영국군은 티르피츠를 완전히 격침시키지는 못하였다고 하여 긴장을 풀지 않았습니다.

 

공습을 피해 은둔... 하고 있는 티르피츠

 

   독일군은 행동불능이 된 티르피츠를 노르웨이 북부의 해안포대로서 사용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를 위해 함수를 응급수리하고 폭격당해도 격침될 염려가 적은 수심이 낮은 적당한 곳으로 이동시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고정포대로 이용하기 위해 이동하여 자리를 잡은 사실은 현지 저항군에게 즉각 탐지되어 위치가 영국군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영국공군은 소련에서 즉각 랭카스트 폭격기들을 발진시켰고, 현지개수를 통해 기내에 보조연료탱크를 장비한 랭카스터 폭격기들은 10월 29일 19대가 출격했습니다. 이 공습에서는 별다른 전과 없이 1대가 스웨덴에 불시착했습니다. 그로부터 날씨가 좋아질 때를 기다린 영국공군은 11월 12일 다시 폭격에 나섰습니다. 랭카스터 폭격기의 공습에 맞서 티르피츠는 모든 대공포화를 동원하여 사격했지만, 이번에는 1발의 톨 보이 폭탄이 좌현 사출기 부근에 명중, 기관실까지 돌입하여 함의 밐바닥에서 폭발했습니다. 곧이어 후부 좌현 거리측정기 부분에도 명중탄이 폭발했고 함체 주변에도 4발의 폭탄이 떨어져 선체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공습이 계속되는 동안 화재를 일으킨 티르피츠는 4번포탑에서 불길을 일으키더니 탄약고가 폭발, 선체가 35도 이상 기울어지고, 계속해서 함체가 60도 이상 기울어졌을 무렵 3번포탑에서도 대폭발이 일어나, 그 동안 끈질기게 버티었던 티르피츠도 폭격 11분만에 기이어 전복하여, 함체가 뒤집히고 맙니다. 당시 함내에는 많은 장병들이 있었지만 함께 선내에 갖혀 거의 대부분 사망하고 말아버리지요. 침몰한 티르피츠의 잔해는 대전이 끝난 뒤에 독일과 노르웨이의 회사에 의해 1948년부터 1957년에 걸쳐 해체되었습니다.

 

랭카스터들의 폭탄을 맞고 결국 뒤집어져버린 티르피츠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전함의 파괴를 강조해왔던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우리가 항상 보내기를 원하던 곳으로 이 괴물을 보내게 되어 이제 안심이 됩니다." 라는 전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대서양에서의 독일 해군 수상함의 활약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 북대서양의 호송선단을 둘러싼 전투에 대해 당시 여러 번 선단 지휘임무를 맡았던 노련한 군인이었던 '도널드 맥킨타이어' 대령은 훗날 당시를 회상하여, "만약 피아가 뒤바뀌었더라면, 우리는 적의 호송선단을 한 척도 빠져나갈 수 없게 할 수 있었다." 하였다고 합니다. 굳이 이 언급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독일 해군은 북대서양 항로에서 전함 2척을 비롯한 충분히 호송선단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전력을 가지고, 초반에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바다를 잘 아는 강적 영국 해군과, 대형 수상함 피해에 지나친 두려움을 보이며 적극적인 전투행동을 금지한 히틀러라는 또 하나의 강력한 내부의 적에게 포위를 당하여 기대 이하의 전과를 보여주었다고 하면... 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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