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피까지 보고 가시려면 여기를~(-.-)

 

8. 바렌츠 해 해전과 레더 제독의 사임

 

바렌츠 해 해전

   혹시 이름이 붙은 연유를 알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여기를 보시면
   (이렇게 산만하게 장난치는 걸 좋아(--)합니다. 출처는 보면 아시겠지만, 시공 discovery series--)

   독일 해군은 또한 히틀러가 사사건건 대양함대의 행동을 속박하는 것과 심각한 연료의 부족은 함대의 활동범위를 더욱 축소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2년 말 '티르피츠(Tirpitz)'가 수리를 위해 트론하임으로 철수함으로써 북극해 항로에 대해 독일군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크게 감소했습니다. 이런 좋지 못한 상황에서 레더 제독은 북극해를 통과할 연합국선단을 공격해서 독일 함대의 위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레겐보겐' 작전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 작전은 중순양함 히퍼와 6척의 구축함으로 편성된 부대를 영국 수송선단의 호위함정과 교전하게 하고 그 사이 포켓전함 뤼초우가 수송선들을 격침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도, 앞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북대서양 항로는 폐쇄되어 버릴 수는 없는 처지. 1941년 11월까지 영국은 북대서양 항로를 통한 수송선단의 파견을 그만 두었으나, 러시아와 강력한 요구에 의해, 영국은 다시 선단을 출격시키게 됩니다. 12월 18일 15척의 상선과 7척의 구축함, 5척의 코르벳함으로 구성된 JW-51A는, 피해를 입지 않고 1주일 후에 무르만스크 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다음에 JW-51B선단이 14척의 상선으로 구성되어, 12월 22일에 러시아로 길을 나섭니다. '온슬로(Onslow)', '오르비(Orbi)', '오베이던트(Obeident)', '오브듀어(Obdure)', '오르웰(Orwell)', 그리고 '아샤테(Ascharte)' 6척의 구축함, 1척의 소해함, 2척의 콜벳함, 2척의 견인함이 '제17소함대'로 편성되어 선단의 근접호위를 담당하고, 경순양함 '자마이카(Jamaica)'와 '쉐필드(Sheffield)' 두 척이 '버네트'소장 휘하에 'R함대'로 편성되어 호위를 담당합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인 영국 경순양함 쉐필드. 포클랜드의 그넘이 물론 아님(--)

 

   JW-51B가 출항한지 5일째 되는 날, 너무 거센 파도로 선단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12월 30일 아침, 드디어 U-354가 이들 선단의 일부를 발견, "6~10척의 수송선단 발견, 호위병력은 빈약"이라는 무전을 보냅니다 이 보고를 받은 레더 제독은 독일 함대가 전과를 올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레겐보겐 작전을 발동하게 됩니다. 중순양함 히페르, 순양전함 뤼초우, 구축함 6척의 독일 함대는 히틀러에게 줄 신년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출발하였습니다. 지휘관은 히페르의 함장인 '오스카 쿠메츠' 중장이었습니다. 쿠메츠 중장이 레더 제독에게 맨 처음 받은 명령은 "우세한 적과의 교전은 피하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상황에 따라 적을 격멸하라."였습니다. 이 명령을 굳게 새긴 쿠메츠 제독은 12월 30일 18시 알텐 피요르드를 나섰습니다. 히페르와 뤼초우는 각기 나뉘어 선단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쪽이든지 한 쪽이 먼저 적과 교전을 시작하면 그 동안 다른 한 척이 상선대로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히페르와 구축함 6척을 직접 지휘하던 쿠메츠 제독은 상황을 봐서 구축함 3척을 뤼초우 쪽으로 이양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레더제독은 주의에 주의를 요하던 히틀러의 명령을 상기하고 갑자기 함대에 "적과 같은 규모라도 교전은 피하라, 대형 순양함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라는 전보를 보냅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일선 지휘관에게는 정망 김빠지는 명령이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12월 31일 02:40시, 히페르와 뤼초우는 각각 갈라져서 북동쪽으로 향했고, 07:15시 경에는 선단후방 약 39km까지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난 후 쿠메츠의 함대는 정체불명의 함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쿠메츠는 구축함 '엘콜드'에게 그 함정을 조사해 볼 것을 명하고 히페르를 그 쪽으로 유도해갔습니다. 엑콜드의 후방에는 히페르 부대의 구축함 2척과 뤼초우 부대의 구축함 3척이 뒤를 따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08:30시 경, 히페르는 선단의 좌후방에, 뤼초우는 선단의 우측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때 JW-51B선단은 구축함 부대가 호위중이었고, 순양함 셰필드와 자마이카가 선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이나 영국군 모두 시계가 극히 불량해서 적의 위치를 알 수 없었고, 결국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서야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독일군과 영국군 부대 중 처음으로 붙은 것은 구축함 부대였는데, 09:15시 경 영국 구축함 1척이 독일 구축함 3척과 마주치게 되었고 약 7.4km의 거리를 두고 포격전이 시작되었고, 포격소리와 섬광을 발견한 영국군의 구축함 부대는 곧장 교전에 합류하였습니다.

 

여러번 보았을(--) 중순양함 아드미랄 히페르의 당시 모습

 

   뒤쳐저 따라오던 히페르에 탑승한 쿠메츠 제독은 이 때에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때 쓴 메모에서 '시계가 극히 나쁨. 상대하고 있는 함정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판단할 수 없음. 시야에는 합계 10척정도 보이지만 그 가운데 선단을 추적하는 아군함정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음.'이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1척의 영국 구축함이 연막을 치면서 히페르쪽으로 다가오는게 발견되었고, 히페르는 이 영국 구축함에게 사격을 퍼부었으나 명중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히페르의 사격으로 히페르의 존재를 알아차린 영국군은 구축함 부대를 고속으로 히페르를 향하게 하여 어뢰공격을 감행하는 듯 했다가 다시 회피하는 기만전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쿠메츠 중장은 레더 제독의 명령을 상기했다. 영국군은 분명 자신보다 열세이나 자신의 순양함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는 판단을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지원포격만 하도록 명령했던 것이지요. 10:00시 경 영국의 구축함 부대는 쉐필드를 비롯한 영국 순양함이 지원을 위해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 때 영국의 구축함들은 고전중이었고 10:20시경에는 영국 구축함 온슬로에 히페르의 20cm 포탄이 명중했다. 분명이 화력에서는 영국 구축함과 중순양함 히페르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전투를 계속하면 결정적 타격을 줄 것이 뻔하였으나, 쿠메츠는 레더의 명령을 상기하고 히퍼를 후방으로 급히 철수시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영국의 구축함 부대는 순양함 쉐필드와 자메이카를 전장으로 유도하기 위해 선단의 선두로 위치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10:45시, 영국군의 코르벳함이 정체불명의 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는데, 이 정체불명의 함은 바로 선단의 4km까지 접근한 포켓전함 뤼초우와 구축함 3척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실상 뤼초우의 부대는 영국 선단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뤼초우도 급속히 안개 속으로 후퇴해버리고 마는데, 전투기록에는 '10:50시 시계불량.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불가.'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군이 너무나 확실히 우세한 상황이 아니면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독일 해군의 행동은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 무렵 전장으로 달려오던 영국 순양함부대는 드디어 히페르를 발견, 곧바로 포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포격은 13km밖에서 시작되었는데, 영국군의 정확한 포격으로 3발의 탄환이 히페르에 명중하고 맙니다. 이 피탄으로 보일러실에 침수가 된 히퍼는 속력이 28knot로 떨어졌고, 그로부터 5분 뒤에는 역시 영국 순양함 쉐필드의 포격으로 독일 구축함 1척이 격침되고 1척이 대파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11:49시 쿠메츠는 전 독일 함대에 대해 퇴각 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4시간에 걸친 혼전이 경순양함 쉐필드의 7번의 일제사격으로 끝내 독일군의 완패로 끝나는 순간이었지요.

 

발렌츠 해 해전의 진행상태

 

   JW51B선단은 엄청난 위협에 직면하였었으나 독일군의 너무 신중한 행동으로 인하여 단 1척의 상선도 피해도 입지 않고 1943년 1월 3일 무사히 무르만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전을 '바렌츠해 해전'이라고 하는데, 독일군이 실패한 원인은 불량한 시계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장에서 지휘관들이 주도권을 완전히 쥐고 작전수행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바렌츠해 해전의 실패는 아주 좋지 못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 북아프리카에서는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패주하는 중이었고 동부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에 파울루스의 제6군이 고립되어 전멸의 위기에 처해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판국에 의기양양하게 출동했돈 독일의 주력전함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피해를 입고 돌아왔으니 히틀러가 격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분노와 레더 제독의 사임

   격노한 히틀러는 이때 2차 세계대전 전 기간을 통틀어 손꼽을 만한 놀라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함대를 보존하는 것은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 나는 대양함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과는 커녕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따라서 구축함을 제외한 모든 대형 함정은 해체하고 그 대포, 승무원, 장갑은 독일의 대서양 장벽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레더는 히틀러의 이러한 명령에 대해 상세한 내용의 각서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독일 함대의 임무는 상대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지력이 있는 것이니, 함대를 해체한다면 이는 연합군에게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다 바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대형함을 해체한다면 적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승리를 얻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는 요지의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대답은 레더 제독에게 더 한층 모욕감만 안겨주었습니다. "함대는 적과의 병력우열을 계산하고 나서야 싸우는 겁장이에 불과하였다. 군인으로서 총통은 싸울때는 철저하게 싸울 것을 희망한다." 그러나 사실 대양함대가 겁쟁이가 된 것은 히틀러의 끊이지 않는 불안감과 그에 따른 지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레더 제독은 히틀러의 명령을 따를 수 없었고, 결국 사임의 길을 택했습니다. 레더가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히틀러는 적지 않게 놀라기는 했으나, 함대를 해체하라는 명령은 끝내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새 해군 총사령관, 칼 되니츠 제독

 

   이리하여 1943년 1월 30일, 에리히 레더 제독은 해군 총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히틀러는 그 후임으로 칼 되니츠 제독을 지명하였습니다. 그는 아시다시피 U-Boot부대의 사령관으로서 그간 상당한 전공을 쌓았기 때문에 히틀러의 신뢰도 두터웠고,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 영향력도 레더보다 더 강하였고, 정기적으로 히틀러와 만나 회의를 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잠수함대 사령관이면 함정대를 해체하려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잘 실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임명하였을 터이지만, 새로 해군 총사령관이 된 되니츠는 사안을 검토하고 다른 제독들의 의견을 들어 본 다음에, 함대를 축소시키는 것은 있어도 해체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히틀러의 의도에 반하는 보고를 내었습니다. 결국 3주간의 설득 끝에 히틀러는 대형 함정 완전 해체명령을 취소하게 됩니다. 대신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북대서양에서
선단 위협용으로

전함 티르피츠,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

발틱해 방면에서
훈련함으로

포켓전함 뤼초우, 쉐르,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경순양함 뉘른베르크

퇴역조치

구식전함 슐레지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중순양함 히페르, 경순양함 라이프치이, 쾰른

그 외에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 건조 중지

 

   레더와 되니츠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연합군은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바다에서 우위를 지키며 전 병력을 U-Boot의 격멸에 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됩니다마는, 독일 해군은 정상적인 대규모 작전을 펼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이전 이야기를 보시려면 여기를

다음 이야기를 보시려면 여기를

바로 오신 분은 카운터까지 찍어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