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피까지 보고 가시려면 여기를~(-.-)

 

7. 대 소련 호송선단 전역
...당시 별다른 자료가 없어 취미가 연재글을 들고 왔습니-_-다.

 

대 소련 원조작전의 시작

   1941년 6월 독일은 소련과의 싸움을 시작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여 그 해가 채 가기도 전에 소련군의 2/3이상을 섬멸하고 모스크바를 포위했습니다. 소련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아 보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큰일 난 것은 비단 소련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소련이 완전히 항복한다면 독일은 유럽대륙을 완전히 정복하게 되고 그 다음 차례는 영국이 될 것은 뻔한 일, 그래서 영국수상 처칠은 독소전이 개시되자마자 소련을 원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다음날 처칠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우리는 소련과 그 국민들을 최대한 지원할 것" 이라 말했고, 1941년 8월 29일자로 스탈린에게 보낸 친서에서 200대의 토마호크 전투기를 우선 보내고, 이어 440대의 허리케인 전투기와 기술자들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한 술 더 떠서, 9월 4일자로 보낸 답신에 처칠에 대해 "프랑스 또는 발칸에 독일이 30개 내지 40개 사단을 소련으로부터 빼 내야 하는 대규모의 제2전선을 구축해 주고, 가을이 되기 전에 알루미늄 3만t, 매월 적어도 100기의 항공기와 500대의 전차를 제공한다는 보증"을 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은 패배를 당할 것이고, 유럽의 대규모 항쟁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엄살을 떨었습니다. 이로서 영국은 미국과의 협의하에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소련에 대한 원조를 시작했습니다. 소련에 대한 원조량은 초기에는 마치 "바닷물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정도로 아주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영국 주력함대에 부담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정기적으로 소련에 수송선단을 파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게 됩니다.

   소련으로 가는 길은 3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신속하게 물자를 이송할 수 있는 항로가 바렌츠 해를 통과하는 북방항로였는데, 문제는 배가 다니는 항로 자체가 상당한 악조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강풍이 부는 만년빙하속을 통과해야 하고, 파고는 보통 20m를 넘나드는 데에다가, 높은 파도에 실려 배 위로 들이치는 바닷물은 순식간에 얼어붙고, 배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여 배의 중심까지 흔들려 버릴 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극해의 차가운 물과 멕시코만의 더운 물이 만나 짙은 안개를 만들고, 눈도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문제는, 여름에는 밤이 없이 내내 낮만 계속된다는 것이습니다. 적 항공기에 대해서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북극항로는 이런 곳 - 영국 경순양함 밸파스트(Belfast)

 

   처칠의 주장에 의해 소련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의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습니다. 목표가 되는 소련항구는 2곳이었는데, 하나는 '무르만스크', 다른 하나는 '아르항겔스크'였는데, 이 중 아르항겔스크는 빙하의 이동 때문에 겨울에는 사용할 수 없었고, 상시 사용가능한 부동항은 무르만스크뿐이었기 때문에, 이곳이야말로 북극해의 수송항로를 완전히 지배하는데는 절대적인 거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무르만스크는 각종 방어시설이 가득 차 있었고, 독일군은 핀란드군과 협력하여 무르만스크를 계속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상군에 의한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항공병력을 동원한 폭격은 간헐적으로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영국군은 1941년 8월 21일 허리케인을 장만한 제151비행대를 무르만스크 부근으로 파견했습니다. 이 항공병력의 엄호에 힘입어 원조물자를 실으로 영국으로 출발하는 QP-1선단이 출항하였습니다. QP란 영국과 소련을 오가는 선단을 부르는 약어로 영국에서 소련으로 향하는 선단은 PQ. 소련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선단은 QP로 표시하고, 그 뒤에 붙은 숫자는 선단번호를 의미했습니다. 10월 11일 원조물자를 실은 PQ-1선단은 알항게리스크에 도착, 대 소련원조의 첫 단추는 순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은 1941년 가을 시점에서 독일군은 소련으로 향하는 선단을 공격할 준비가 충분치 못했습니다. 우선 항공병력의 대부분이 대 소련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해군의 작전에까지 동원될 비행기가 거의 없었고, 게다가 해군 총사령관인 레더 제독과 국방군의 실질적인 최고사령관인 괴링 공군원수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항공정찰 지원을 받기는 언제나 힘들었고, 도버해협 돌파작전 이전까지는 각 함정들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영국군도 그리 좋지는 않은 것이, 영국 본국함대 총사령관인 토베이 제독은 10월 태평양 지역의 긴장대비를 위해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극동지역으로 파견하기로 한 결정 때문에, 본국의 영국 함대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남은 것은 전함 킹 조지 5세와 항모 빅토리어스, 그리고 순양함 6척 뿐이었는데, 이 전력으로는 독일 전함 티르피츠의 행동을 완전히 봉쇄하기는 어렵다는 견적이 나온 상태였습니다. 한편, 영국 잠수함들은 이미 북극해에서 활동을 벌이고는 있었습니다.

   1941년 11월 중순부터 독일군의 북극해 병력이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15cm 포를 장비한 신형 Z-31급 구축함 5척이 증강되었고, U-Boot 3척이 바렌츠 해와 무르만스크 지역을 초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41년 12월 말, 영국군 코만도 부대에 의해 복크세이 섬이 기습당한 뒤 열린 총통 대본영 대책회의에서는 더 이상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극항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의견일치가 이루어졌고, 드디어 전함 티르피츠를 북극해로 출동시키는 결정이 내려지게 된습니다. 이 당시까지 영국과 소련을 오가는 선단은 악조건의 항로를 빼고는 비교적 순조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1941년 말까지 PQ-7선단까지 진행되었고, 전차 약 750대, 항공기 약 800대, 각종차량 약 1400대, 그리고 물자 10만t을 운송할 수 있었습니다. 1942년 초 영국 해군성에서는 독일 함대의 출격에 대비하도록 공군과 해군에 경계령을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순차적인 병력증강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토베이 제독은 영국의 주력함대가 소련으로 향하는 선단과 영국의 생명선인 대서양 북쪽항로 어느 곳도 충분히 호위하지 못할 상황이라며,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계속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소련으로 향하는 선단은 약간의 피해는 입고 있었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항해하고, 1942년 2월에는 PQ-11선단이 무르만스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티르피츠의 첫 출격

   3월 8일 저녁무렵, 노르웨이의 트론하임을 초계중인 영국 잠수함으로부터 독일의 전함 또는 순양전함이 출격중이라는 경보가 전해졌습니다. 이 보고는 정확한 것이었는데, 사실 티르피츠는 이미 3월 5일 구축함 3척과 같이 처녀 출전하여 소련으로 향하는 선단을 추격하는 중이었습니다. 한편, 전함 킹 조지 5세와 듀크 오브 요크,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순양전함 리나운 및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편성된 토베이 제독의 부대는 티르피츠와 약 370km떨어진 지점에 있었던 반면, 소련으로 향하는 PQ-12선단은 티르피츠와 약 50km떨어진 곳을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으로서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영국군을 도와준 것은 악천후였습니다. 영국 항모 빅토리어스도, 티르피츠 모두 정찰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군과 독일군은 마치 어둠속을 헤메듯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3월 9일 08:00시, 티르피츠의 무전을 청취하여 위치를 알아낸 영국군은 빅토리어스로부터 급히 알바코어 12기를 발진시킨습니다. 이들은 티르피츠에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가하였으나, 티르피츠도 급격히 지그재그 운동을 하면서 이를 회피하였고, 결국 티르피츠에게는 1발의 어뢰도 명중하지 못하고 영국기만 2기가 대공포화로 격추되었습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티르피츠는 열세를 느끼고 영국 주력부대를 피해 다시 노르웨이로 진로를 돌려 3월 12일 오전 트론하임으로 귀항한습니다.

   변변히 교전도 해 보지 못하고 티르피츠를 놓친 영국군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영국수상 처칠은 이미 1월 25일에 "티르피츠가 트론하임에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고, 이 전함을 파괴, 또는 피해를 주는 것만으로도 현재로서는 해상에서의 최대의 사건이 될 것이다. 이 전함과 비교될 목표물은 달리 있을 수 없다. 또한, 이 전함에 브레스트나 다른 독일 국내의 항만 정도의 대공방비가 있을 리 없고, 손상만을 입힌다 하더라도 독일로 귀환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중략)...이 대전의 성패는 대서양의 미국 전함 2척과 손상을 입은 영국 주력함의 4배에 해당하는 이 티르피츠에 달려있다. 본인은 이것을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한다..." 라는 각서로 티르피츠의 수송선단에 미치는 위협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 위협을 제거할 좋은 기회를 날려먹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한편, 독일의 레더 제독 또한 티르피츠가 잘못 되었더라면 영국군의 전함과 항공모함에게 격침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간담에 서늘해 있었습니다. 레더는 비스마르크가 첫 출격에서 격침당했던 사실을 상기하고, 티르피츠의 출격에 있어서 정찰과 공격 모두 항공기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미완성 항모인 그라프 체페린을 빨리 완성시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건조중이던 여객선과 중순양함 등 4척을 간이항모로 개장시켜 줄 것을 또한 요구하였습니다. 중순양함을 간이항모로 개장하는 데 대해서는 히틀러도 동의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완성된 것은 단 1척도 없었습니다. 대신, 북극해 방면의 독일군 항공병력은 상당한 증강이 이루어졌습니다. 레더 제독은 이제부터라도 소련으로 향하는 선단을 적극 공격해서 대양함대의 위력을 보여줄 것을 결정, '뢰셀스프룽(체스에서 기사가 쓰는 장군수)'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이 작전은 활용 가능한 전 함선을 둘로 '나르빅'부대와 '트론하임'부대 둘로 나누어 협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르빅 부대는 포켓전함 뤼초우, 아드미랄 쉐르,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되었고, 트론하임 부대는 전함 티르피츠와 중순양함 히페르,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일 출동규모로 볼 때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공군은 항모와 상선만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며, 적 호위함대는 티르피츠와 히페르가 상대하고, 나머지 포켓전함들도 상선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시 난관이 생겼으니, 히틀러가 이 계획에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공군력을 동원해서 먼저 영국군 항공모함을 격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긴 논의 끝에 레더는 히틀러와의 논쟁을 포기하고 대양함대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대체안으로, 공군기가 적 선단을 발견하면 나르빅 부대가 노르웨이 북부로 이동하고, 트론하임 부대는 나르빅으로 향하게 하고, 그 후 히틀러가 판단하기에 영국 본국함대가 독일 함대를 공격할 우려가 없으면 나르빅 부대와 트론하임 부대가 노르웨이 북방 약 190km지점에 집결하여 선단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린다는 내용의 그럭저럭 히틀러의 입맛에 맞는 작전을 준비합니다.

 

이어지는 호송선단과 독일군의 공격

   계속되는 호송선단인 PQ-13선단에 대해서 독일군은 이번에는 겨우 구축함 3척을 투입하였으며, 이들은 영국군의 호위함 트리니다드를 격침시키기는 하였지만 독일군 또한 구축함 1척을 상실하게 됩니다. 한편 U-Boot부대는 영국과 소련을 오가는 선단에 대하여 간헐적이나마 공격을 가하고는 있었습니다. 3월 하순에 이르러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공군과 U-Boot를 동원하여 이들 선단에게 대규모 공격을 가할 것을 결정하고 출격했지만, 악천후 속에서 선단을 발견도 못하고 맙니다. U-655 1척만이 선단을 발견하기는 했으나, U-655도 호위함정에게 격침되는 신세가 되고 만습니다. 3월 29일에는 북극해의 강풍으로 흩어져 버린 선단의 일부를 U-585가 발견했지만 U-585또한 호위함에게 격침되었고, 그 다음날 겨우 공군과의 합동작전으로 5척의 상선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한습니다. 이는 큰 전과는 아니었지만, 영국군에게 불길한 예감을 던져주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이어서 PQ-14와 QP-10선단을 덮쳐, 24척 가운데 5척을 격침시켰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전과는 아주 불만스러운 것이었습니다. 5월 하순에 벌어진 PQ-16선단과 QP-12선단 공격에서는 U-Boot와 함께 독일 공군기 100기 이상이 출격하여 맹폭을 가했지만 PQ-16선단의 6척을 격침시켰을 뿐이었고, QP-12선단은 단 한척도 격침시키지 못하는 초라한 전과를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1942년부터는 초반에 겪었던 물자 부족문제 대신,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수송력의 문제였습니다. 우선 소련측이 물자를 수송할 만한 배가 충분하지 못해, 물자의 3/4는 연합국의 선박으로 수송해야만 했고, 봄 무렵부터 독일군의 위협이 서서히 커지자 그렇지 않아도 악조건인 항로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그리하여 3월부터는 원조물자의 양이 오히려 수송능력을 초과하여 영국에 물자가 쌓여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수송선단을 35척으로 늘려줄 것을 계속 요청하였고, 소련의 스탈린 수상으로부터도 급히 원조 물자를 보내달라는 통사정이 거세어졌음은 물론이습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계속되는 압력으로 입장이 곤란해 진 처칠은 1942년 5월 17일 3군 참모위원회에, "스탈린 수상뿐 아니라 루즈벨트 대통령도 지금 우리가 수송선단을 중단시키는 데 크게 반대할 것이다... 미국의 선박은 줄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근심을 간직한 내 느낌은 호송선단이 어떻게 해서든 18일에는 출항해야 할 것 같다. 반수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성공이다. 만일 이것이 실패한다면 영국이 2대 연합국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크게 약화된다. 어떤 경우에도 기후와 운명의 불확실성이란 것은 있으며, 이것이 오히려 우리를 도울 지도 모를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PQ-17선단의 출발을 지시합니다.

 

PQ-17선단의 비극

   1942년 6월 27일, PQ-17선단이 출항했습니다. 무르만스크'이 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목적지는 '아르항겔스크'항이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아니나 대략) 선단은 34척의 상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호위선단으로 구축함 6척, 대공함 2척, 잠수함 2척, 콜벳함 2척, 구난선 3척이 동행했고, 이들을 '해밀턴' 소장이 지휘하는 영-미 연합함대의 순양함 4척과 구축함 3척이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북쪽 해안에는 영국 잠수함 9척과 소련 잠수함 2척이 배치되었는데, 이들 잠수함은 독일의 전함 티르피츠를 공격하든가 최소한 출동경보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국 해군 총사령관인 '토베이' 제독은 전함 '듀크 오브 요크'와 '워싱턴', 항공모함 '빅토리어스', 순양함 3척, 그리고 다수의 구축함으로 서방 해상을 초계하면서 티르피츠가 출격하면 즉각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PQ-17 선단의 항해 초반의 모습
이후 전쟁의 가장 잔인한 희생물의 하나가 되지-_-요

 

   PQ-17선단이 출항한 지 4일째인 7월 1일, 독일의 U-Boot와 콘돌 정찰기는 처음으로 이들을 발견,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월 2일 저녁무렵에는 독일 공군기로부터 어뢰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격에서는 쌍방간에 아무 피해가 없었습니다. 7월 4일에는 드디어 독일군의 항공어뢰에 의해 선단의 수송선 3척이 처음으로 침몰당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의 피해는 감당할 만 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영국 해군성은 선단 전체의 운명을 뒤바꾸어놓는 전보를 타전하게 됩니다. 이 전보의 내용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이 당시 영국 해군성이 이해하고 있던 상황을 설명하자면... 독일의 레더 제독은 7월 2일 트론하임 부대의 전함 '티르피츠'와 중순양함 '히페르' 그리고 구축함 1척을 출동시켰습니다. 영국군은 이것을 7월 3일 오후에 알아차렸는데, 공교롭게도 이 때 영국군의 항공정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군성은 티르피츠를 비롯한 독일 전함이 PQ-17선단을 추격할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PQ-17의 진행상황에 대해 매일매일 속을 태우던 해군성에서는 티르피츠를 중심으로 한 압도적인 독일 함정이 공격을 가해온다면, 이것은 U-Boot나 독일 항공력보다도 훨씬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PQ-17선단의 속도는 잘해야 7~8knot 정도였기 때문에 티르피츠는 마음만 먹으면 10시간이면 선단을 따라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해군성은 1분 1초라도 빨리 선단을 분산시키는 것 외에 다른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7월 4일 밤 다음과 같은 3통의 긴급전보를 선단으로 타진했습니다.

21:11시 : '긴급, 순양함은 급히 서방으로 후퇴하라'
21:23시 : '긴급, 수상함대에 중대한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 선단은 분산하여 소련의 각 항만으로 향할 것'
21:36시 : '긴급, 선단은 분산하라'

   적어도 그 당시 상황에서는 정당하였다고 하지마는, 해군성이 내린 이 명령은 결과적으로 일대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호위선단을 지휘하던 해밀턴 소장도 이제는 모든 사태가 자신의 권한 밖이었기 때문에 수송선단을 내버려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때 독일의 트론하임 부대는 알타 피요르드에서 나르빅 부대와 합류, 티르피츠, 쉐르, 히페르, 그리고 구축함 7척이 알항게리스크로 향하기 위해 동진을 시작했다가. 영국의 선단이 분산했다는 정보를 듣고 즉각 다시 귀항한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분산한 선단이라면 항공기와 U-Boot로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이라는 면도 있고, 예전 비스마르크의 비극도 이유가 되었겠다면 되었겠지요.

   아무튼 이제 완전히 분산된 PQ-17선단에게는 이제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었습니다. 분산된 다음 날 아침부터 독일군의 Ju-88폭격기, Bf-110전투기등이 득달같이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막아줄 영국군의 항공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거대한 수송선들은 독일군 폭격기들이 떨어뜨리는 어뢰와 폭탄을 맞고 화염에 휩싸여 갔습니다. 불타는 선박들에서는 승무원들이 불을 끄기도 전에 다시 폭탄이 작렬하였고, 수송선들은 대 폭발을 일으키며 하나 둘 바다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이번에는 U-Boot들이 바턴을 이어받아 무방비속의 선단을 헤집고 다니며 무차별 어뢰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이 때부터 3일동안은 PQ-17선단의 승무원들에게는 30년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겁니다. 결국 이들은 독일 항공부대에게 11척, U-Boot부대에게는 10척을 상실하였고, 사지를 빠져나와 간신히 소련까지 도달한 것은 겨우 상선 11척과 구난선 2척뿐이었습니다. 구조선도 3척을 상실하였고, 격침된 배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도 거의 배와 운명을 같이 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대부분 얼음이 떠다니는 지옥같은 바다에 빠져 동상에 걸려 사지를 절단해야만 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항공기 210대, 전차 430대, 각종차량 3350대, 그리고 각종 물자 13만t이 고스란히 수장되었는데, 이는 적어도 1개 군을 무장시킬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PQ-17은 사실상 전멸되었고, 연합국이 겪은 많은 바다의 패배 중에서도 가장 우울한 패전이 되었습니다.

 

사냥당하고 있는 PQ-17 선단의 모습
위는 독일 공군기의 폭격, 아래는 독일 U-Boot의 어뢰에 녹아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평가되었던 사실이라면, 독일군의 대형 수상함들은 여전히 아주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들은 선단에 대해 포 한발도 쏘지 않았다지만, 이들의 존재 자체가 영국군에 대해 엄청난 위압감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영국군은 선단을 분산시키라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히틀러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대형 수상함들은, 히틀러나 독일 수뇌부에게보다도 오히려 연합국에 의해 더 큰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독일의 항공병력과 U-Boot가 거둔 승리를 만들어주는 뒷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국군은 은둔하고 있는 독일의 대형 수상함들을 격침하기 위해 이후 필사적인 노력을 벌입니다.

 

이후의 대 소련 원조 일시 중지

   PQ-17의 대 실패가 일어난 다음, 영국은 북극해의 빙하군이 어느 정도 녹고 백야기간이 지날 때까지 PQ선단을 중지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으며, 소련의 스탈린 수상은 처칠에게 전문을 보내 작전실패와 수송선단 운행중지에 대해, 그리고 서부유럽에 제2전선을 구축해주지 않는 것까지 싸잡아 아주 모욕적인 언사까지 써가며 비난하였습니다. 한편, 독일의 레더 제독은 8월 26일 열린 히틀러와의 회의에서, 비록 연합군의 선단이 당분간은 북극해를 통과하지 않을 것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연합국은 소련으로 물자를 보내야 하므로, 북극해에 U-Boot를 상시 배치하되 대형 수상함들은 노르웨이에 위협용으로만 배치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은 물론 히틀러의 입맛에 맞는 작전계획이기는 했지만, 대형 수상함들에 대한 연료부족이 심각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PQ-17이 괴멸된 지 2달이 지나서야 다음 선단인 PQ-18선단을 출항시킵니다. 이에 대해 독일군은 계획대로 수상함은 동원하지 않고 항공기와 U-Boot로만 공격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군도 이번에는 구축함 16척에 전투기를 12대 실을 수 있는 소형 항공모함까지 동원해 수송선단을 호위하였고, 강력한 본국함대는 이번에도 서방해상을 초계하였습니다. PQ-18선단 또한, 특히 독일군의 항공병력과 치열한 공중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강력한 호위덕분에 독일군의 항공기를 수십 기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는 했습니다마는, 하지만 독일군의 항공기에 의해 8척, U-Boot에 의해 2척이 격침되어 모두 10척을 잃게 되는, PQ-17선단과 같은 괴멸상태에까지는 가지는 않았지만, 큰 피해를 입습니다. 다시 한 번 간담이 서늘해 진 영국군은 소련으로의 선단의 운행을 당분간 완전히 중지했습니다.

 

위장도색을 하고 피요르드에 은둔하고 있는 독일 포켓전함 '뤼초우(Lutzow)',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국 수송함대에 큰 위협이었다죠.

 

   이렇게 하여 영국의 1941년 10월에 시작되어 1년동안 계속된, 첫 대 소련원조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PQ선단이 끝났습니다. 이 기간동안 PQ선단은 연 219척이 소련으로 도착하여, 항공기 2665대, 탱크 3276대, 차량 2만4400대, 중유 및 경유 6만9483t 그리고 탄약과 물자 61만4664t 등을 소련에게 원조했습니다. 이 물량에 대해 소련측에서는 너무 적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나타냈지만, 영국의 처칠 수상은 이에 대해 "고통을 받고 있는 동맹국을 위해 심장의 피를 빼준 것" 이라고 표현할 만큼 크게 평가하였습니다. 한편, PQ선단은 소련측에 물자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50척 이상의 선박과 항공기 656대, 전차 1226대, 각종차량 8422대, 연료 7373t 그리고 탄약과 물자 23만2483t을 수장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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