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피까지 보고 가시려면 여기를~(-.-)

 

6. 영국해협 돌파작전
...당시 별다른 자료가 없어 취미가 연재글을 들고 왔습니-_-다.

 

작전의 배경(이랄까)

   아시다시피, 비스마르크가 격침된 이후로 해군 총사령관 레더 제독의 히틀러에 대한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히틀러는 독일 해군의 모든 행동에 대해 (육군처럼)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브레스트에는 독일의 주력함인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그리고 브레스트에 들어온 '프린츠 오이겐' 세 척의 대형함정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레더 제독은 이들 주력함정과 아직 건재한 비스마르크의 자매함 '티르피츠'를 합류시킬 수 있다면 아직 '라인연습'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마는, 문제는 히틀러의 대해함대에 대한 불신이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반면에, 영국 수상 처칠은 '브레스트'의 이들 독일함정들을 전략상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으로 규정, 브레스트항에 대한 집중공격을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브레스트에 대한 폭격은 기술적으로도 곤란한 점이 많았으나, 1941년 영국 공군 폭격 항공단이 투하한 폭탄의 75%정도가 브레스트에 투하되었을 정도로 처칠의 브레스트 공격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였습니다. 처칠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41년 7월초 프린츠 오이겐에 드디어 한 발의 폭탄을 때려박을 수 있었습니다. 7월 24일에는 계속적인 영국 공군의 공격을 피해 몰래 브레스트를 나서 비스케만의 '라팔리스' 항으로 향하던 샤른호르스트가 영국공군에게 덜미를 잡혀 무려 5발의 폭탄을 맞고, 이 폭격으로 대화재를 일으킨 샤른호르스트는 3천t이나 되는 해수를 선체에 끌어들여 겨우 침몰을 면하고, 만신창이가 된 채 간신히 브레스트로 돌아로 수 있었습니다. 그나이제나우는 이미 예전에 입은 손상을 수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로서 독일해군의 강력한 주력함 3척은 1941년 7월말 현재 모두 브레스트항에 숨어 수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대양함대의 주력함 3척이 모두 작전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상황은 그렇지 않아도 대양함대에 대해 불신감을 더해가던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이 사건이 터지자 독일 해군이 보유한 대형함정의 존재가치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노르웨이에 대해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브레스트항을 거점으로 계속 유지함으로서 중요한 병력을 허비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논리를 편 것입니다. 영국군의 노르웨이 공격은 1941년 3월부터 재개되고 있었는데, 먼저 대규모 기습대(코만도)가 노르웨이 북서해안을 공격했고, 8월 25일부터 9월 3일에 걸쳐서는 스피츠베르겐 제도에 침투, 노르웨이인들과 러시아인들을 선동시켜 탄광들을 마비시켰고, 12월 27일에는 복크세이셤을 공격하여 해안포대를 완전히 파괴했고, 1만6천톤 이상의 선박을 격파했으며, 98명의 포로까지 잡는 대 활약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에 대한 영국군의 일련의 공격행동은 히틀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특히 12월 27일의 복크세이 섬이 공격당한 것은 큰 충격이었고, 히틀러는 결국 나름대로의 중요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 결론이란 바로 대양함대에 대해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 임무를 중지시키고 노르웨이라도 제대로 방어를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영국이 노르웨이 북부를 계속적으로 노릴 것이고, 그 다음에는 대규모 함대와 지상부대를 동원하여 나르빅을 점령하려 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렇게 되면 스웨덴과 핀란드도 위협받게 될 것이고, 전쟁의 향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판국에 귀중한 함정들을 하릴없이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묶어둘 수는 없다는 것이며, 모든 전함과 순양함들은 노르웨이로 집결해서 노르웨이라도 제대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궁극적인 결론이었지요.

   레더 제독은 이런 히틀러의 견해에 대해, 일단 비스마르크의 자매함인 티르피츠를 가능한 한 빨리 노르웨이의 트론하임 항으로 보내는 데에는 전적으로 찬성하였으나, 브레스트항에 있는 3척의 독일 주력함에 대해서는 히틀러와 의견을 달리 하였습니다. 최단거리 코스인 도버해협을 지나 북상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그렇다면 이들 함정이 노르웨이로 가려면 아이슬란드 북쪽을 돌아 독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너무 소모적인 행동이었고, 일본이 참전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당에 일단 출격중인 포켓전함 아드미랄 쉐어의 작전진행을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의견을 내었습니다. 레더 제독의 이러한 의견을 히틀러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히틀러는 그 특유의 객기를 발휘하여 도버 해협을 강행돌파한다는 무모해보이는 작전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히틀러는 자신이 그런 대담한 행동을 벌일 수 있다는 데에 대해 스스로 만족감까지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군부에서는 이런 무모한 작전에 반대하였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감'을 내세워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도버 해협을 돌파하는 것이야 말로 영국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므로 큰 이점이 있고, 도버 해협을 돌파할 것이 아니라면 브레스트의 모든 대형함정들을 폭파하고 승무원들과 배에 달린 함포들을 노르웨이로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적의 의표를 찌른다는 작전도 작전이지만 브레스트의 함대를 상선공격임무에는 더이상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문제아로 여기고 있던 것이었지요.

   결국 군 내부에서도 히틀러의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군 수뇌부에서도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엄청난 도박이기는 하지만 한 번쯤이라면 해 볼만하지 않겠는가"하는 기대로 작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작전의 가장 큰 열쇠는 독일함대에 대해 계속적인 항공엄호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1942년 1월 1일, 신임 공군참모총장 '한스 에숀넥'은 전투기대 총감인 '아돌프 갈란트'에게 "이 작전의 성패를 결정짓는 열쇠야말로 강력한 전투기부대의 엄호에 달려있으므로 이에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내렸습니다. 1월 12일에 총통관저에서 레더 제독과 에숀넥 총장, 갈란트 총감 그리고 신임 브레스트 함대의 사령관 '오토 칠리어스'중장 등이 모인 가운데 비상 작전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작전회의에서 긴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 작전개시전에 독일함대의 행동을 최대한 자제한다.
2. 야간에 브레스트를 나서 주간에 도버해협을 돌파한다.
3. 갈란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전투기대는 전력을 다해 함대를 엄호한다.

 

야간에 스윽-_- 브레스트항을 나서는, 선도 구축함의 뒤를 따라나서는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

 

   이 작전의 암호명은 '체르빌스(지옥문의 파수견 이름 - 그러면 영어로는 켈베로스겠군요)'작전으로 이름지어졌습니다.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브레스트 함대 사령관 오토 칠리어스와 전투기대를 맡은 아돌프 갈란트의 몫이었습니다. 해군과 공군으로부터 서로 연락장교가 파견되어 긴밀한 협동이 이루어졌고 브레스트를 나서는 독일 함정에도 각 해상전투기대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탑승하였습니다. 그리고 항공엄호를 위해 BF-109와 FW-190전투기가 약 250대, 야간 엄호용 BF-110전투기가 30대가 준비되었습니다. 작전시기에 관해서는 악천후에 조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강하게 흐르는 때가 최고이므로 이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2월 1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한편, 영국군도 사실은 독일 해군의 도버 해협 돌파 가능성을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 2월 2일 영국 해군성에서는, "얼핏 보기에 독일 해군이 도버 해협을 뚫고 북상하는 것은 너무 무모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거함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구축함과 항공기의 엄호하에 해협을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쪽에 그들을 저지할 만한 강력한 함정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일의 순양전함 2척과 중순양함 1척이 대형구축함 5척과 소형구축함 5척 그리고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으며 도버해협을 돌파하는 장면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오고, 그 다음날 영국군에게 이러한 독일군의 도버 해협 돌파 가능성에 대하여 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의하여 도버 해협 연안의 '보포트' 뇌격기와 '소드피시' 뇌격기등 약 40대가 즉각출동태세에 들어갔고, 해협 근처의 해군병력으로 6척의 구식 구축함들과 어뢰정등이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스카파 플로'에 있는 강력한 영국 주력전함들은 트론하임에 티르피츠를 견제해야 하는 이유로 그 곳을 나설 수는 없는 처지였습니다. 언급한 대로 영국군은 이미 독일군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고, 브레스트로 구축함들이 모여들자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독일군은 보기에는 브레스트에서 가만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 공군의 폭격대가 독일 해군의 작전 당일 저녁 브레스트를 공습한 뒤에도 보고서에는 언제나처럼 '독일함대는 브레스트에 정박중'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영국해협 돌파작전

   1942년 2월 11일, 브레스트항을 출발하는 독일함대는 선두의 구축함 7척과 그 뒤를 따르는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그리고 프린츠 오이겐 순서였습니다. 저녁무렵 브레스트를 나서려 하는 순간에 공습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여, 함선들은 황급히 안전지대로 대피하였습니다. 공습이 끝나자 함대는 다시 출동준비를 갖추고 브레스트항을 서둘러 떠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가 예정보다 약 2시간 늦은 2300시 경이었습니다. 브레스트를 나선 독일 함대는 자정이 넘어 프랑스 북서안의 '웨산'섬을 돌아 동쪽으로 진로를 변경, 약 27knot의 속도로 도버 해협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하였고, 0530시경에는 쉘부르만에서 어뢰정부대를 합류시켰고, 이 때부터 BF-110 야간전투기가 엄호에 들어가 0850시까지 같이 비행하였습니다. 영국군은 레이더를 장착한 '허드슨'정찰기를 이용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적인 초계활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이날은 영국군 정찰기가 독일군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날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0900시 경부터는 독일군은 영국군에 대해 레이더 방해전파를 내보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방해전파는 이미 늘 독일군이 내보내고 있던 것이었으므로 영국군은 별다른 이상을 간파할 수 없었습니다.

 

해협을 돌파하는 독일함대, 맨 앞이 칠리어스 중장이 탑승한 구축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순

 

   영국군이 '이상한 징조'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 1020시가 넘어서였습니다. 먼저 프랑스 연안 상공에 다수의 비행기가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이어 해상초계중인 스피트파이어(Spitfire) 정찰기가 독일군의 어뢰정의 발견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1042분에는 2대의 스피트파이어가 독일군의 BF-109 2대에 쫓기는 도중에 드디어 독일군의 주력함이 북상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황급히 기지로 도망한 이 스피트화이어 2대에 의해, 영국군은 1109시에야 브레스트의 독일 주력함이 출동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게 됩니다.

   영국군 연안항공단 사령관은 '조버트' 소장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만한 것이, 독일군은 이미 영국군이 당초 예상하고 있던 지점보다 벌써 약 550km이상 떨어져 있던 데에다가, 해가 질 무렵까지 공중 공격을 할 수 있는 시간은 6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즉각 각 부대의 긴밀한 협동에 의한 항공공격을 가해야 했으나 현 시점에서 즉각 출격이 가능한 것은 '만스톤'기지에 있는 소드피쉬 뇌격기 뿐이었고, 보포트 뇌격기 부대는 공격범위 밖에 있거나 또는 어뢰대신 폭장을 한 상태에 있는 등 전혀 출격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제1차 항공공격 지휘를 맡은 '에드먼드'중령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어 버렸습니다. 당장 출격 가능한 것은 소드피쉬 5개 중대 중 달랑 1개 중대뿐이었고, 이것으로는 고속으로 북상하는 독일함대를 잡기에는 역부족일 것이 뻔한 데, 거기다가 전투기의 호위도 당장은 받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중령은 (군바리의 비극이랄까) 전투기의 호위 없이 1개 중대 6대의 뇌격부대를 출격시킬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눈에 선한 것, 1개 중대 6대의 뇌격부대는 독일군의 강력한 대공포화에 휘말려 단 1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모두 격추되고 말아버리고, 에드먼드 중령을 비롯한 모두 18명의 탑승인원 중에 단지 5명뿐만이 구조되어 살아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는 동안 독일함대는 이미 1230시 경에 도버 해협을 통과하여 북해로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전투기대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독일 구축함

 

   영국의 조버트 사령관은 콘월과 노포크에 있는 보포트 뇌격기대에 출격준비를 명하고 서니 섬에 있는 보포트 뇌격기대를 출격시켰으나 영국군의 전투기와 공격기 사이에 독일군의 방해전파로 교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의 보포트 뇌격기대가 독일 함대에 접근할 즈음인 1430시에, 기뢰를 건드린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는 큰 폭발음을 내며 대열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이 폭발은 상당히 큰 것이어서 주변의 다른 함정에서도 그 진동을 느낄 수 있었고, 폭발로 큰 피해를 입은 샤른호르스트는 어쩔 수없이 벨기에나 네델란드에 임시 기항하여야 할 듯 보였으나, 샤른호르스트의 승무원들은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여 응급수리를 해 내어, 1500시가 지나자 다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상공에서는 보포트 뇌격기대와 독일 전투기들간에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영국 해군의 구축함부대도 공격을 가해왔지만, 영국군의 공격이 대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축함 1척에 손상을 입힌 것 빼고는 독일군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저녁무렵이 되자 독일측에 더 유리하게 악천후가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이젠 영국군은 더이상 독일군을 공격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요. 독일 함대는 네델란드를 지나 독일 본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1955시 경 이번에는 그나이제나우가 기뢰를 건드렸으나, 응급수리로 항해는 계속되었고 그나이제나우와 프린츠 오이겐은 다음날 0700시에 '킬' 운하입구의 '브룬스뷔텔'에 도착할 수 있었지요. 한편, 샤른호르스트는 운도 없게도, 뒤쳐져 따르던 그날 2134시에, 그나이제나우가 당했던 그 장소에서 또 기뢰에 걸려 손상을 입었습니다. 이번에도 샤른호르스트는 큰 피해를 입어 기관이 거의 정지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1천t에 이르는 해수를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나, 겨우 응급수리를 마치고 13일 아침 '빌헬름스하펜'에 임시로 기항하게 됩니다.

   이로서, 샤른호르스트가 큰 피해를 보았지만, 체르벨스 작전은 결과적으로는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으로서는 브레스트의 독일함대가 주는 위협은 없어졌다는 득도 있으나, 바로 자신들의 앞바다를 독일 함정들이 유유히 통과하는 모습을 보게 됨으로서 해양제국의 자존심에 뽀큐를 먹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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